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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팟은 중앙일보 기자들의 목소리로 전달하는 이야기를 담은 공간입니다. 소소한 일상의 이치부터 미래 전망 인문학까지 각양각색의 팟캐스트를 지금 바로 들어보세요!

에피소드 462

뉴요커가 읽어주는 3분뉴스 NEW E.318 A dearth of humility

2020.06.04 16 0
KOREA JOONGANG DAILY

NGO

Legendary investor and co-founder of the Quantum Fund Jim Rogers is an eccentric figure in many ways. He travelled around the world on his motorcycle and in his car and wrote two books, “Investment Biker: Around the World with Jim Rogers” and “Adventure Capitalist: The Ultimate Road Trip.” It is not common to see travel journals that point out the factors affecting the economic efficiency of the places visited.

전설이 된 퀀텀펀드의 공동 설립자 짐 로저스는 여러모로 독특한 인물이다. 오토바이와 자동차로 두 차례나 세계를 누볐다는 점도 차별화 요소다. 그 행로를 정리한 두 권의 여행기(『월가의 전설 세계를 가다』『어드벤처 캐피털리스트』) 역시 별스럽다. 방문지의 경제 효율성 저해 요인을 지적한 여행기는 흔히 볼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The impediments include developed countries and NGOs. Their “soulless aids” weaken industrial competitiveness of Africa and hinder economic development. He added that a considerable part of the aid was taken by dictators and intermediaries. He was especially harsh on NGOs.

그 저해 요인에 선진국과 비정부기구(NGO)가 포함됐다는 점도 눈길을 끌었다. 이들의 ‘영혼 없는 원조’가 아프리카의 산업 경쟁력을 약화시켜 경제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원조 물품의 상당량이 빼돌려져 독재자와 중간 상인의 배만 불리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지적도 곁들였다. 특히 NGO에 대한 비판은 신랄하다.


Rogers wrote that people ride air-conditioned four-by-fours with windows up and live a posh life, residing in luxury housing complexes with security guards at the entrance and watching satellite television. And they explain to poor locals how foolish they are. If aid is canceled, NGOs would no longer get a job in Africa. NGOs have become a big business. Created by corrupt governments and equipped with enormous financial means, NGOs produced many brokers going between foreign aids and corrupt governments. So wrote Rogers.

“이들은 에어컨이 나오는 사륜구동 자동차를 창문마저 꼭꼭 잠근 채 타면서 근사하게 살고 있다. (중략) 경비원이 지키는 출입구가 갖춰진 고급 주택 단지에서 위성 TV를 보면서 생활한다. 그러면서 가난한 현지인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를 설명하며 돌아다닌다. (중략) 원조가 중단되면 NGO는 아프리카에서 더는 일자리를 찾지 못할 것이다. NGO는 이제 큰 사업이 됐다. 부패한 정부로 인해 생겨나 막대한 자금 동원력을 갖게 된 NGO는 해외 원조와 부패한 정부 사이에 개입하는 수많은 중개인을 양산해냈다.”


Rogers exposed the hypocritical conduct of a German NGO that held a luxury meeting at a resort in Malawi and blocked the entry of local people. He claimed that local people felt mortified rather than grateful to NGOs and even called them neo-colonialists.

로저스는 말라위의 리조트에서 호화판 회의를 하면서 현지인 출입을 막은 독일 NGO 단체의 위선적 행태 등도 고발했다. 그러면서 “현지인들은 NGO에게 고마움이 아니라 모멸감을 느낀다. 이들을 새로운 식민주의자라 부르기까지 한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When the book was published in the early 2000s, the story belonged elsewhere in the world. In Korea, NGOs were praised for criticizing politics and businesses without sanctuary, using “freedom from money and power” as their weapon. But the contemporary mainstream NGOs in Korea don’t seem to be far from what Rogers had criticized, as they are characterized by ambiguous money management, an egoistic nature, flattery towards power and an absence of critical spirit.

As I see the ruling Democratic Party’s lawmaker-elect Yoon Mee-hyang entering the National Assembly, with a plethora of allegations against her, including her alleged misuse of donations for the Korean Council for the Women Drafted for 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 a civic group she headed until her election as a legislator, I feel very sad that courtesy and humility have disappeared in the field.

물론 책이 나왔던 2000년대 초만 해도 말 그대로 ‘딴 나라 얘기’처럼 보였다. 당시는 한국의 NGO가 ‘돈과 권력으로부터의 자유’를 무기로 정·재계를 성역없이 비판해 갈채를 받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투명한 자금 관리, 조직 이기주의, 권력 영합, 비판정신 상실로 특징지어지는 현재의 한국 주류 NGO는 로저스의 비판 대상에 겹쳐놓아도 위화감이 느껴지지 않는다. 정대협 의혹 보따리를 둘러멘 채 국회 입성을 강행한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보면 그 바닥에서 예의염치(禮義廉恥)마저 사라진 듯해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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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요커가 읽어주는 3분뉴스 E.317 Going around like a revolving door

2020.06.03 22 0
KOREA JOONGANG DAILY

회전문

In December 1881, H. Bockhacker was granted a patent for “Tür ohne Luftzug” or “Door without draft of air.” It was the first patent related to a revolving door. Patents for similar concepts followed. The most famous was for a “Storm-Door Structure” by Theophilus Van Kannel in the United States. The revolving door has three partitions that “effectively prevent the entrance of wind, snow, rain or dust” and “cannot be blown open by the wind.

1881년 12월 독일 발명가 H. 보크해커는 ‘외풍이 없는 문’(Tür ohne Luftzug)으로 특허를 취득했다. 회전문(revolving door) 관련 세계 첫 특허다. 비슷한 콘셉트의 특허가 잇따라 출원됐다. 가장 유명한 건 1888년 8월 미국 발명가 테오필러스 반 캐널이 출원한 ‘바람막이 문 구조’(Storm-door Structure) 특허다. 세 개의 격벽이 있는 회전문인데, 그는 “바람, 눈, 비 또는 먼지의 유입을 막는다. 바람이 문을 열 수 없다. 사람들이 동시에 출입할 수 있다. 거리의 소음을 차단할 수 있다”고 자랑했다.



The first revolving door was installed at a restaurant on Times Square in New York named Rectors in 1899. Some falsely claimed that Van Kannel invented the revolving door because he didn’t want to open doors for women. Some theme park rides modified the revolving door by turning it horizontally. Superman uses a revolving door to change his outfit.

최초의 회전문은 1899년 미국 뉴욕 맨해튼 타임스퀘어의 레스토랑 ‘렉터스’에 설치됐다. 여담이지만 반 캐널은 “여성에게 문을 열어주기 싫어 회전문을 발명했다”는 오해도 샀다. 또 회전문 아이디어를 변형해 회전축을 수평으로 눕힌 놀이기구도 발명했다. 한편, 슈퍼맨은 회전문을 탈의실로 쓴다.

As one can go around and get in and out using the revolving door, the term is used to refer to how the regulators in the government and the regulators in private industries switch positions. The driving force in the movement is the preferred treatment for former officials. The worst case is for a public official to move to a related private sector and then return to government.

빙글빙글 돌아 안팎을 오가는 특성에 착안해 ‘회전문 현상’이라는 정치 용어가 생겼다. 규제하는 당국과 규제받는 민간 산업 분야 간 인사 교류를 가리킨다. 교류의 추동력은 전관예우다. 최악의 경우는 공직자가 관련 민간 분야로 나갔다가, 다시 공직에 돌아오는 경우다.

In a farewell speech given in January 1961, U.S. President Dwight Eisenhower said, “This conjunction of an immense military establishment and a large arms industry is new in the American experience … In the councils of government, we must guard against the acquisition of unwarranted influence, whether sought or unsought, by the military-industrial complex […] We must never let the weight of this combination endanger our liberties or democratic processes.” It was a warning on how a retired general became an official in the defense ministry, then moved to a military-industrial complex to create a relationship of interest among the military, government and arms industry. This led to the legislation of the lobbying act for federal employees.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전 미국 대통령은 1961년 1월 퇴임연설에서 “방대한 군사 체계와 대규모 방위산업의 결합은 미국의 새로운 경험이다. (…) 정부의 협의회에서, 우리는 추구했든 추구하지 않았든, 군산복합체에 의한 부당한 영향력이 생기는 걸 경계해야 한다. (…) 우리는 이 결합이 우리의 자유나 민주적 절차를 위협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군 장성이 은퇴해 국방부 관리가 되고, 이후 방산업체에 들어가 군, 정부, 군수산업 간 이해관계를 형성하는 데 대한 경고였다. 이는 ‘연방 공무원 로비법’ 제정의 실마리가 됐다.

The Blue House personnel appointment is labeled “revolving door,” as former official Tak Hyun-min returned as a secretary. Blue House spokesman Kang Min-seok explained that Tak will further enhance Korea’s reputation that has been elevated for its successful Covid-19 response. Revolving door appointments are not limited to the current administration. The officials in the current administration had criticized the revolving door appointments in past administrations. This seems to be going around like a revolving door.

지난 주말 발표한 청와대 비서관 인사에 ‘회전문’ 딱지가 붙었다. 특히 행정관으로 퇴임했다가 비서관으로 영전한 탁현민 씨에 대해서다. 강민석 청와대 대변인은 “코로나19 대응 이후 높아진 우리나라의 국격을 (탁씨가) 더욱 향상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회전문 인사’ 논란이 비단 현 정권 만의 일은 아니다. 현 정권 인사들도 전 정권 때는 소리 높여 비난했던 게 ‘회전문 인사’다. 이 역시 회전문처럼 돌고 도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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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요커가 읽어주는 3분뉴스 E.316 To the end of Covid-19

2020.06.02 24 1
KOREA JOONGANG DAILY

코로나19 박멸 선언

In May 1980, the World Health Assembly “declares solemnly that the world and all its people have won freedom from small pox … calls this unprecedented achievement in the history of public health to the attention of all nations, which by their collective action have freed mankind of this ancient scourge and, an in doing so, have demonstrated how nations working together in a common cause may further human progress.”

“천연두로부터 자유를 얻었다는 사실을 엄숙하게 선포한다. 공공의료 역사상 전례가 없는 성취다. 세계 모두가 힘을 모아 인류 진보를 향한 또 다른 초석을 쌓았다.”



This is an excerpt from the declaration by the now-WHO on the eradication of smallpox on May 8, 1980. The half-page declaration exudes pride. The author of the declaration must have been overwhelmed by joy as the disease, which tormented humanity for thousands of years had finally ended. Eradication of smallpox took a long time: the WHO started the program to end smallpox in 1958 and issued the declaration 22 years later.

1980년 5월 8일, 세계보건기구(WHO)가 내놓은 천연두 박멸 선언문의 일부다. A4 반장 분량으로 짧지만, 문장 곳곳에선 자부심이 읽힌다. 그도 그럴 게 이집트 람세스 5세부터 백범 김구까지 수천 년 동안 인류를 괴롭히던 천연두가 사라졌다고 하니 타자기 앞에 앉은 선언문 작성자도 감격에 겨웠을 터다. 천연두 박멸까진 적지 않은 시간이 소모됐다. WHO가 천연두 박멸 프로그램을 가동한 게 58년이니 선언까지 22년이 걸렸다.



And it was the first and the last. A disease caused by a virus, which mankind declared to be eradicated, stopped at smallpox. It means that many viruses live with humans.

그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인류가 박멸을 선언한 바이러스 질병은 천연두에 멈춰 있다. 뒤집어 보면 여전히 많은 바이러스가 인류와 공존하고 있다는 의미다.

Covid-19 cases are growing again, mostly in the capital region. Disease control authorities have confirmed seventh-level infections. Meanwhile, the secrets of the strong transmissions of Covid-19 are slowly being unveiled. Researchers at the University of Texas analyzed the spike proteins of coronavirus and concluded that the virus sticks to human cells 20 times more than SARS.

수도권을 중심으로 코로나19 확진자가 다시 증가세다. 방역당국이 7차 감염까지 확인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전례를 찾기 힘든 코로나19의 강력한 전파력에 대한 비밀도 조금씩 풀리고 있다. 미국 텍사스대 연구팀은 코로나19의 스파이크 구조를 분석해 사스(SARS)보다 최대 20배 더 인간 세포에 잘 달라붙는다는 연구 결과를 내놨다. 비밀병기로 불리는 스파이크는 바이러스 표면을 덮고 있는데 축구화 바닥에 박힌 그것과 닮았다.



With a new wave of spikes, Covid-19 is about to conquer the world in half a year. As of the end of May, Covid-19 cases have been confirmed in 214 countries. From the human point of view, Covid-19 is a simple and reckless organism living on human bodies.

스파이크를 개량한 코로나19는 반년 만에 세계 정복을 앞두고 있다. 5월 말 기준으로 전 세계 214개국에서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왔다. 인간의 관점에선 인체를 숙주로 삼는 코로나19는 단순하고 무식한 생명체다.

The Korean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 Head Jung Eun-kyeong was right to call it a “very cruel virus.” But this is strictly from the human point of view. From the virus’s standpoint, there is no simpler, more effective, and cost-efficient survival strategy than thriving on humans.

“정말 잔인한 바이러스(정은경 중앙방역대책본부장)”란 평가가 지나치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이는 지극히 인간의 관점일 뿐이다. 바이러스의 입장에서 보면 이렇게 단순하고 효율성이 높고 가성비가 좋은 생존 전략은 없다.



In retrospect, humanity has always been at a disadvantage in a war against viruses. The enemy does not have a political confrontation or wealth gap. It is never easy to eradicate the enemy that only focuses on survival in any situation. That’s why humans are losing in the war against viruses despite scientific and technological advancements.

따져보면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인류는 언제나 불리하다. 상대방에겐 정쟁도 빈부 격차도 없다. 어떤 상황에서도 생존만 고민하는 그들을 박멸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에도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우리가 판판이 깨지는 이유다.

Can humans declare an eradication of Covid-19? If so, I want to propose the WHO hosts a contactless declaration ceremony via live broadcasting on smartphones. How about solemnly declaring the victory of social distancing as Covid-19 is eradicated?

인류는 코로나19박멸 선언에 나설 수 있을까. 그렇다고 한다면 스마트폰 생중계를 통한 코로나19 박멸 언택트 선언을 WHO에 제안한다. 이를 통해 사회적 거리두기의 승리를 이제는(?) 사라진 코로나19 앞에서 엄숙하게 선언하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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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요커가 읽어주는 3분뉴스 E.315 Life is not as simple as in a movie

2020.06.01 15 0
KOREA JOONGANG DAILY

제리 크라우스

You might not know about Jerry Krause (1939~2017) unless you are a baseball fan.
농구를 어지간히 좋아하지 않고서는 제리 크라우스(1939~2017)라는 인물을 알기 어렵다.

He was a baseball player in high school, and upon graduating, he started a career as a scout for the Baltimore Bullets, now the Washington Wizards. Though not a basketball player, he had a good eye to spot talent, and he discovered Hall of Famers like Earl Monroe and Jerry Sloan.

교교 시절 야구선수였던 그는 대학 졸업 후 미 프로농구(NBA) 볼티모어 불리츠(현 워싱턴 위저즈)의 스카우터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농구인이 아니었지만 좋은 선수를 찾아내는 ‘선구안’을 가진 그는 제리 슬로언, 얼 먼로 같은 ‘명예의 전당’ 급 선수들을 발굴했다.

Krause became famous when he became the general manager of the Chicago Bulls in 1985. The Bulls drafted Michael Jordan in 1984, but the team was still struggling. Krause drafted Scottie Pippen and Horace Grant in 1987, and brought in Bill Cartwright in 1988 and B.J. Armstrong in 1989. What made the team complete was Phil Jackson as head coach in 1989. After that, the team achieved two “three-peats” from 1991.

그가 유명해진 건 1985년 NBA 시카고 불스의 단장으로 부임하면서였다. 불스는 84년 불세출의 스타 마이클 조던을 드래프트에서 지명했지만 약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크라우스는 스코티 피펜·호레이스 그랜트(87년)를 영입했고, 빌 카트라이트(88년)·B.J 암스트롱(89년) 같은 선수들로 팀을 구성했다. 화룡점정은 89년 명장 필 잭슨을 감독에 앉힌 것이다. 마이클 조던의 ‘원맨 팀’이었던 불스는 91년을 시작으로 두 차례의 ‘스리 핏(three peat·3연패)를 이뤄냈다.

ESPN’s The Last Dance can be viewed on Netflix Korea. The documentary is about Michael Jordan and the Bulls dynasty in the 1990s. The greatest villain here is Krause. He was a genius scout and outstanding manager, but he did not win the hearts of the superstars, including Jordan. Jordan, other Bulls players and Jackson often clashed with him. While the late Krause appears in interviews, he did not get a chance to explain himself.

미국 스포츠 전문채널 ESPN이 방영한 ‘더 라스트 댄스(The Last Dance)’를 넷플릭스를 통해 한국에서도 볼 수 있게 됐다. 마이클 조던와 90년대 ‘불스 왕조’를 그린 다큐멘터리인데, 최대 빌런(악당)은 크라우스다. 그는 천재적인 스카우터였고 뛰어난 경영자였지만 조던을 비롯한 ‘슈퍼스타’들의 마음을 얻진 못했다. 조던과 불스 동료들은 물론, 필 잭슨 감독까지 그와 충돌했고 이미 세상을 떠난 크라우스는 생전 인터뷰로 등장하긴 하지만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한다.



It is easy for viewers to remember him as someone who brought down the Bulls dynasty. But Krause was the founder of the dynasty, the architect of the greatest team in history. Without Krause, there may not have been Michael Jordan. There is no perfect leadership. The most important leadership feature may not be charming character.

시청자는 그를 ‘불스 왕조를 무너뜨린 사람’으로만 기억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크라우스는 불스 왕조의 창시자였고, 사상 최고의 팀을 만든 설계자였다. 크라우스가 없었다면 ‘농구의 신’ 마이클 조던도 없었을지 모른다. 세상에 완벽한 리더십은 없다. 리더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인간적인 매력이 아닐 수도 있다.



An important fact is that Jerry Krause was not just a villain as featured in the Last Dance, just as Michael Jordan is no superhero. Every individual has different sides, as well as some hidden aspects. Life is not as simple as in a movie.

중요한 건, 제리 크라우스가 ‘더 라스트 댄스’에 나오는 것처럼 악당이었던 것만은 아니란 사실이다. 마이클 조던이 슈퍼히어로가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모든 인물에겐 양면이 있고, 때론 숨겨진 또 다른 면모가 있다. 세상살이가 영화처럼 단순하지 않은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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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요커가 읽어주는 3분뉴스 E.314 A Trojan horse?

2020.05.28 25 0
KOREA JOONGANG DAILY

뉴딜이라는 좋은 ‘말’

On July 25, 1933, New Deal arrived at the White House. Followers in Missouri sent the American saddlebred horse to show their support for the New Deal. The New York Times and other major media reported how President Franklin D. Roosevelt welcomed the horse with a smile. He needed the “show,” because there was opposition to his New Deal policy. Five months later, the New York Times’ Jan. 4, 1934 issue ran a top story about Theodore Roosevelt visiting Congress and telling the opponents that the New Deal would not disappear.

1933년 7월 25일 백악관에 ‘뉴딜’이 도착했다. 아메리칸 새들브레드 종(種)의 늠름한 말 한 필이었다. 미주리주(州) 뉴딜 정책 추종자들이 지지를 표하기 위해 보낸 선물이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흐뭇한 미소로 ‘뉴딜’을 맞았다는 소식은 뉴욕타임스(NYT) 등 주요 매체에 비중 있게 보도됐다. 이런 ‘쇼’가 필요했다는 건 그만큼 루스벨트 대통령의뉴딜 정책에 반대도 많았다는 얘기다. 약 5개월 후인 1934년 1월 4일 자 NYT를 찾아보면 루스벨트 대통령이 의회를 찾아 반대파에게 “뉴딜은 사라지지 않는다”며 강력 추진 승부수를 던진 내용이 1면 톱기사다.



Why send a horse? A clue can be found in the criticism. Opponents criticized the New Deal as a Trojan horse, claiming it was a tactic to use populist policies to boost the economy and win support from the public while spreading socialism. An anti-New Deal outlet ran a cartoon of a shabby wooden horse with the caption, “New Deal Dictatorship.”

그런데, 왜 하필 말이었을까. 뉴딜 정책에 대한 비판에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당시 반대파들은 ‘뉴딜은 트로이의 목마’라고 비판했다. 경기 부흥을 위한 포퓰리스트 정책을 통해 민심을 얻고, 사회주의가 스미게 하려는 작전이라 해석하고 배척한 것이다. 반(反) 뉴딜 기조의 매체엔 허름한 목마 그림에 ‘뉴딜 독재’라고 써놓은 만평이 등장했다. ‘뉴딜’이라는 살아있는말을 친(親) 뉴딜파가 선물한 데도 이런 배경이 있지 않았을까. 우리의 ‘뉴딜’은 볼품없는 목마 따위가 아니라, 에너지 넘치고 펄떡펄떡 숨 쉬는 말이라는 항변이라는 뜻에서 말이다.



In fact, Roosevelt’s New Deal got a lot of criticism. For example, benefits were concentrated among white males. Most American scholars’ research shows that women did not benefit, owing to the premise that they were passive beings under the care of the men. African Americans also did not benefit because of the racist policies in place at the time. Conservative economic historian Burton Folsom wrote in his 2009 book “New Deal or Raw Deal?” that Roosevelt’s preferential policy deprived the American economy of the chance to improve its health, and the harms continue today.

실제로 루스벨트의 뉴딜은 비판도 많이 받는다. 일례로, 수혜자들은 백인 남성에 집중됐다. 여성은 “남성의 보살핌을 받는 수동적 존재”라는 전제 때문에,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인종차별의 덫에 걸려 혜택을 못 봤다는 게 다수 미국 학자들의 연구 결과다. 보수 성향 경제사학자인 버튼 폴섬은 2009년 펴낸 『뉴딜인가 로딜인가(New Deal or Raw Deal?)』에서 “루스벨트의 시혜적 퍼주기 정책으로 인해 미국 경제는 체질 개선의 기회를 박탈당했고 그 해악은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There has been much talk about President Moon Jae-in’s Korean New Deal and Green New Deal. It is too rash to call it a Trojan horse and dismiss the bold fiscal plan. It could be an unripe criticism, neglecting people’s outcry at the juncture of life and death. Harvard University professor of economics Kenneth Rogoff said in an email exchange with me that in principle, the direction of the Green New Deal is correct. But what he added was the key. What’s happening in the future is more important. If you want a lasting policy, not for two years in the future, but 20 or 200 years later, you should study first instead of just talking about it.

문재인 대통령의 ‘한국형 뉴딜’에 이어 ‘그린 뉴딜’까지, 설왕설래가 많다. 하지만 현시점에서 “정권 재창출을 위한 트로이의 목마”라 결론짓고 귀를 막는 건 조금 섣부른 일 아닐까. 생존의 기로에 선 서민의 비명을 외면한 설익은 비판일 수 있어서다. 하버드대 저명한 경제학자 케네스 로고프는 기자와의 e메일에서 “원칙적으로 볼 때”라는 전제하에 “그린 뉴딜의방향은 맞다”고 평했다. 하지만 로고프 교수가 덧붙인 다음 말이 핵심이다.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는 것. 2년 후가 아닌 20년, 200년 후를 생각한 ‘찐’ 정책을 펼치고 싶다면 번지르르한 말 말고, 공부부터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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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요커가 읽어주는 3분뉴스 E.313 Time to build a consensus

2020.05.26 16 0
KOREA JOONGANG DAILY

5월 18일

My ethics teacher looked serious one day in May 1996, when the season was changing from late spring to early summer. He began the class by saying, “I was a high school student just like you … When gunshots became clear at night, I hid in a small room, with windows covered with blankets.” He ended the class by saying, “My mother discouraged me from going outside even in broad daylight.” As my memories are fading, I only remember the story in general. But the teacher speaking with his hands tightly holding onto the desk remains clear in my memory like a photograph.

입술이 두꺼운 윤리 선생님은 표정이 무거웠다. 늦봄에서 초여름으로 계절이 바뀌는 1996년 5월의 어느 날이었다. “여러분과 같은 고등학생 무렵이었다”로 시작한 수업은 “총소리가 또렷해지는 밤에는 이불로 창문을 가리고 작은 방에 숨어 지냈다”를 거쳐 “해가 중천인데도 어머니가 밖에 나가지 말라고 말렸다”로 끝났다. 기억이 희미해진 탓에 그의 말은 줄거리만 남았지만교탁을 움켜쥐고 얘기하던 모습은 한장의 사진처럼 또렷한 이미지로 머릿속에 박혔다.



I cannot presume why he talked about his dark memories from 16 years earlier. Perhaps he wanted to hold on to his fading memories. As an economic boom allowed people to live comfortably, people’s memories were getting blurry at the time. The May 18 Special Act was passed in December 1995, but there was no room for holding onto painful memories.

24년 전 그가 왜 16년 전의 어두운 기억을 꺼냈는지에 대해선 나로선 짐작하기 힘들다. 아마도 그 또한 희미해지는 기억을 붙잡고 싶었을 게다. 먹고 살기 딱 적당한 호황이 찾아온 그 무렵은 모든 게 흐릿하던 시절이었다. 95년 12월 5・18 특별법이 통과됐지만 타인의 아픈 기억을 붙잡을 수 있을 만큼의 작은 틈은 어디에도 없었다.



I am reminded of the teacher in May because he confessed that someone close to him was killed by the martial law army. It was very shocking for me. The textbook reflecting the fifth and sixth curriculum only explained the May 18 Democratic Uprising in a few sentences. There were no statistics of victims or dates for the events. All I learned about May 18 was a dry sentence, which read “a clash between citizens and suppressing forces. In the process, shockingly, a number of innocent citizens were killed.”

5월이 찾아오면 그가 생각나는 건 가까운 누군가가 계엄군의 총에 사망했다는 고백 때문이다. 내겐 큰 충격이었다. 5・6차 교육과정을 반영한 교과서는 5・18을 단 몇 줄로 설명했을 뿐이었다. 희생자 통계도 사건이 발생한 날짜도 없었다. ‘시민들과 진압군 사이의 충돌’이란 감정을 찾기 힘든 건조한 단어로 나열한 문장이 내가 배운 5・18의 전부였다. 돌이켜보면 24년 전 5월의 그날, 교탁 뒤에 선 그는 상당한 용기를 내야 했을 것이다. 어떤 종류의 사실은 꺼내 드는것만으로도 큰 결단이 필요한 법이다.



In my memory, my teacher 24 years ago was not angry about what happened in Gwangju in May 1980. He did not show any tears. He only shared the raw memories with his students. But he must have plucked up the courage to discuss the subject on that day in May 24 years ago. Some facts take determination to bring them up. It must have been his way of cherishing the memories of the victims. Has he gotten over the trauma?

24년 전 그는 80년 5월 광주에 대해 크게 분노하지 않았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어떤 종류의 눈물도 없었다. 차곡차곡 쌓아둔 날 것 그대로를 꺼내 우리에게 들려줬을 뿐이다. 아마도 그게 5・18을 추모하는 그만의 방식이었을 게다. 궁금하다. 그는 5월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났을까. 올해도 누군가에게 40년 전 광주에 대해 얘기하고 있을까.

May is here again. A few more bills have been enacted and several presidents have now attended the memorial ceremony. But not much has changed. Truth and lies clashed again this year too. The lies that are covered with superficial arguments attract people’s attention. On the other side is the truth with resignation and sorrow. It is the time to search for a national consensus.

다시 5월이 찾아왔다. 그동안 몇 개의 법이 신설됐고 몇 명의 대통령이 추모식에 참석했다. 하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진실과 거짓은 올해도 충돌했다. 그럴싸한 모습으로 치장한 거짓은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는다. 맞은 편엔 체념과 슬픔이 쌓인 진실이 서 있다. 난 24년째 과거를 지배하려는 거짓의 탐욕을 지켜보고 있다. 그 과정에서 진실이 교과서에 적힌 건조한문장일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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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요커가 읽어주는 3분뉴스 E.312 Seeing through things

2020.05.25 21 0
KOREA JOONGANG DAILY

세상을 투명하게 보려면

The history of glass goes back to 6000 B.C.. Roman scholar Pliny the Elder wrote in the encyclopedic “Natural History” that glass was made by ancient Phoenicians. Ancient glass was colored, and the opaque beads were used for accessories.

유리의 역사는 기원전 60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학자 플리니우스는 백과사전 『자연사』에서 “유리는 고대 페니키아인이 만들었다”고 적었다. 고대 유리는 색이 들어있고 불투명한 구슬 형태여서 주로 장신구로 사용됐다.



During the medieval period, technology to melt glass to make plates was developed, but glass was still opaque, and making completely colorless glass was difficult. Glass was fitted on frames to block wind, snow and rain and bring sunlight inside, but it was too expensive and fragile. Cathedrals and palaces used “stained glass” because colorless glass could not be made.

중세 이후 유리를 녹여 판 모양으로 만드는 기술이 개발됐지만 여전히 불투명했고 완전한 무색으로 만들긴 어려웠다. 창틀에 끼워 바람과 눈·비를 막고 채광하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었지만 너무 비싼 데다 잘 깨졌다. 대성당이나 궁전에서 ‘스테인드글라스’가 사용된 건 무색투명한 유리를 만들 수 없어서이기도 했다.



In the Renaissance period, technology to make colorless glass was developed by adding sodium carbonate to silica to remove impurities and lower the melting point. Galileo Galilei’s astronomical observation was made possible thanks to the development of glass technology.

르네상스 시대에 규사(硅砂)에 탄산나트륨을 더해 불순물을 없애고 용융점을 낮춰 다양한 모양으로 무색투명한 유리를 만드는 기술이 개발됐다. 갈릴레이가 천체를 관찰할 수 있었던 것도 유리 기술의 발달 덕분인 셈이다.



Glass became transparent, but there were still optical limits. When multiple lenses were used to make a telescope or microscope, distortions occurred. It took another 200 years to resolve these issues.

유리는 투명성을 얻었지만 아직도 광학적 한계가 많았다. 망원경이나 현미경을 만들기 위해 렌즈 여러 개를 겹치면 색수차·광학수차·구면수차 같은 왜곡현상이 발생했다. 이 문제가 해결되기까진 또 200여년이 걸렸다.



In 1812, German scientist and mathematician Carl Friedrich Gauss developed the Gauss-type lens by combining a convex lens and a concave lens to resolve distortion. In 1888, American telescope maker Alvan Clark invented the “double Gauss lens” by combining two sets of Gauss lenses to drastically reduce distortion, and the model became the origin of the standard lens used today.

독일의 과학자이자 수학자 칼 프리드리히 가우스는 1812년 볼록렌즈와 오목렌즈를 겹쳐 상의 왜곡 문제를 해결한 ‘가우스 타입’ 렌즈를 개발했다. 1888년 미국인 앨번 클라크가 가우스 렌즈를 앞뒤로 배열한 ‘더블 가우스’ 렌즈를 발명해 왜곡을 획기적으로 줄였는데 현대에 사용되는 표준 렌즈의 조상 격이다.



In the past, dozens of mathematicians had to solve complicated equations to calculate curvature and skilled technicians had to precisely make lenses. But today, they can be easily designed by computers. It took nearly 7,000 years for mankind to make colorless, transparent lenses that can reflect the world as it is.

수십 명의 수학자가 복잡한 방정식을 풀어 곡률을 계산하고 숙련된 기술자가 정밀 가공해야 했던 렌즈는 이제 컴퓨터로 쉽게 설계하고 만든다. 인류가 무색 투명한 유리를 만들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출 수 있는 렌즈를 갖게 되기까지 7000여년이 걸린 셈이다.

Science has advanced, but people’s perspectives seem to be distorted still. On the same topic, people look at the world through their own lenses, depending on their tendencies and interests. Korean society in 2020 is not different. The word “transparent” originates from Latin word “trans,” meaning “through,” and “parere,” meaning appear. I might need a superpower to see the world transparently.

과학은 발전했지만 사람들의 시각은 아직도 왜곡투성이 같다. 같은 사안을 놓고도 진영에 따라, 이해에 따라 자신만의 렌즈로 세상을 본다. 2020년 대한민국 사회도 다르지 않다. 영어 단어 ‘투명성(transparency)’은 ‘꿰뚫는다’는 뜻의 접두어 trans와 ‘나타나다’는 뜻의 라틴어 parere가 더해진 것이다. 세상을 투명하게 보려면 투시 능력이라도 있어야 할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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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요커가 읽어주는 3분뉴스 E.311 Lacking a Yoshimura

2020.05.22 35 0
KOREA JOONGANG DAILY

한국 보수가 찾아야할 '요시무라'

Hirofumi Yoshimura is the hottest politician in Japan. What made the 44-year-old Osaka governor a star was Covid-19. Japanese newspaper Mainichi Shimbun asked readers which politician responded to Covid-19 the best, and 188 out of 401 respondents chose Yoshimura. 59 chose Tokyo Governor Yuriko Koike, and only 34 chose Prime Minister Shinzo Abe.

요시무라 히로후미(吉村洋文). 요즘 일본에서 가장 뜨거운 정치인이다. 44세의 오사카부 지사를 스타로 만든 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다. 마이니치 신문이 '어느 정치인이 코로나에 잘 대응했나'고 물었더니 401명 중 188명이 그를 찍었다. 2위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도 지사는 59명, 3위 아베 신조(安倍晋三)총리는 겨우 34명이었다.



The governor has established his own, distinct brand after going a separate way from Abe. Abe failed to provide grounds for why schools around Japan were closing, why the state of emergency was declared and extended and why the Olympics was postponed by a year. He only said that the decisions were made upon “comprehensive review” and based on “political determinations.”

그에겐 확실한 '요시무라 브랜드'가 있었다. 아베 총리와 다른 길을 갔다. 아베는 왜 전국 휴교령을 내리는지,긴급사태선언을 왜 발령하고 왜 연장하는지, 왜 마스크를 2장만 배부하는지, 왜 올림픽을 1년만 연기하는지 근거를 전혀 못 댔다. 그때 그때 "종합적으로 검토했다","정치적 결단이다"라고만 했다.

But Yoshimura was different. He said that it was irresponsible to force people to drive into a tunnel without an exit and instead proposed the “Osaka model.” His closures and the order to refrain from going out will be lifted in phases, when specific conditions are met for seven consecutive days. And he kept the promise.

하지만 요시무라는 달랐다. "출구 없는 터널을 계속 달리라고 강요하는 건 무책임하다"며 '오사카 모델'로 불리는 출구를 제시했다. '중증자용 병상 사용률 60% 미만', '바이러스 검사 양성률 7% 미만', '감염경로를 모르는 확진자 수 하루 10명 미만'의 조건이 7일 연속 충족되면 휴업과 외출자제 요청을 단계적으로 해제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약속을 지켰다.



At the young age of 44, reckless speech and good looks are Yoshimura’s weapons. The former attorney built a colorful resume in a short period of time, including experiences as an Osaka city council member, a member of the House of Representatives and Osaka’s mayor. As Yoshimura has become popular, his Japan Innovation Party is also getting the spotlight. It traditionally enjoys the image of “radical right party” based in Kansai region, but with the Yoshimura effect, it now has the highest rating among opposition parties in some polls. The Japan Innovation Party was founded by former Osaka Mayor Toru Hashimoto, who said, “‘Comfort women’ existed everywhere in the world,” in reference to Korean women forced into sexual slavery by the Japanese during World War II. The far-right party has said that Koreans resent working hard.

44세의 젊음과 거침없는 언변, 준수한 외모는 그의 무기다. 변호사 출신인 그는 오사카시의원-중의원 의원-오사카 시장 등 짧은 기간에 다양한 경력도 쌓았다. 요시무라가 뜨면서 소속정당인 일본유신회까지 떴다. 간사이 지역이 기반인 '꼴통보수 정당' 이미지가 짙었지만 '요시무라 효과'로 일부 조사에선 전국 지지율이 야당 1위로 뛰어올랐다. 일본유신회는 "위안부는세계 어디에나 있었다"고 망언했던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전 오사카 시장이 만든 당이다. 한국 입장에선 이 형편없는 우익 정당도 생존을 위해 새 인물 발굴에 사력을 다한다.



The candidate nomination process for the most far-right party in Korea for the general elections in April was pathetic. It should have nominated 10 Korean Yoshimuras to fight the ruling party as it rode the “Corona Tiger,” but the reality was different. I could find no new faces. The nomination process was a mud fight among political heavyweights.

지난 4월 총선에서 한국 보수 진영의 공천은 눈뜨고 못 볼 수준이었다. '코로나 호랑이'의 등에 올라탄 여당과 맞서려면 '한국판 요시무라'를 열 명쯤은 공천해야 했지만 현실은 딴판이었다. 그럴듯한 새 인물은 눈을 씻고 찾아도 없었다. 공천작업은 황교안·김형오·홍준표의 갈등 속에 흙탕물로 변했다.



Former campaign manager Kim Chong-in’s ideas for leadership failed to sound convincing. But restoration of the conservatives is far-fetched. If the opposition party fails to nurture someone who can exceed people’s expectations, there is no future for conservatives. They may have to listen to the boastful praises of the liberals mentioning “Taejong” and “Sejong” for several more decades.

김종인 전 선대위원장의 느닷없는 '40대 경제전문가 기수론'이 잘 와닿지는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 욕심을 부리는 분들 수준으로 보수의 재건은 어림도 없다. 국민들의 기대를 뛰어넘는 인물을 키우지 못하면 보수의 미래도 없다. 그러면 '태종''세종'운운하는진보 진영의 기고만장한 용비어천가를 몇십년간 더 들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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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요커가 읽어주는 3분뉴스 E.310 Repaying the debt to the Navajo

2020.05.21 17 1
KOREA JOONGANG DAILY

나바호

Drive to the east of Las Vegas in the United States and you encounter vast red lands. Colossal sandstones across the horizon are breathtaking. It is Monument Valley, familiar as the setting of old Western movies such as “Stagecoach” (1939), “The Searchers” (1956) and “Once Upon a Time in the West” (1968).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동쪽으로 한참을 달려가다 보면 광활한 홍토지(紅土地)가 모습을 드러낸다. 지평선을 꿰뚫을 듯이 날카롭게 솟아있는 초대형 비석 모양의 붉은 사암 기둥들은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한다. ‘역마차’(1939) ‘수색자’(1956) ‘옛날 옛적 서부에서’(1968) 등 서부 영화의 단골 배경으로 익숙한 모뉴먼트 밸리(Monument Valley)다.



Ironically, this beloved American land is the home of the Native American tribes — especially the Navajo Nation — killed by white Americans. The Navajo Nation is the largest American Indian territory covering 71,000 square kilometers (27,413 square miles). The population of the Navajo Nation varies by data, from 90,000 to 200,000, but it is one of the largest Native American tribes in the United States. Navajo rugs are widely regarded as the most celebrated artwork of North American tribes.

미국인의 ‘마음의 고향’인 이곳은 역설적이게도 존 웨인과 같은 백인의 총에 무수히 쓰러졌던 북미 원주민, 그중에서도 나바호족(族)의 터전이다. 7만1000㎢에 이르는 미국 최대 원주민 보호구역 ‘나바호 자치국’(Navajo Nation)이 이 신령스러운 공간을 품고 있다. 나바호족 인구는 자료에 따라 9만~20만명까지 들쭉날쭉하지만, 미국 내 원주민 부족 중에서가장 많은 편에 속한다. 이들이 만들어 나바호 러그(Rug)로 불리는 직물 깔개는 북미 원주민의 예술품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는다.

The Navajo once garnered international attention as they served as code talkers during World War II. To avoid communication hacking by Japanese forces, the U.S. forces created codes using the Navajo language, and the Navajo soldiers served as code talkers.

이 부족은 한때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2차 대전 때의 ‘코드토커’(code talkers) 활동 때문이다. 당시 일본군의 ‘무선통신 해킹’을 방지하기 위해 미군은 나바호족 고유 언어로 암호를 만들었고, 나바호 용사들이 이를 활용해 암호통신병으로 활약했다.

Tanks were called “turtles” in the Navajo language, bombers were “pregnant birds” and machine guns were “sewing machines.” After the Navajo codes were used, Japanese forces could not decode U.S. military communications. In 2002, John Woo made a movie titled “Windtalkers” on the subject.

탱크는 나바호족 언어의 ‘거북이’에 해당하는 말로 불렀고, 폭격기는 ‘알을 밴 새’로, 기관총은 ‘재봉틀’로지칭했다. 나바호족이 등장한 이후 일본군은 미군 통신을 예전처럼 쉽게 해독할 수 없었다. 우위썬(吳宇森) 감독이 이 내용을 소재로 영화 ‘윈드토커’(2002)를 만든 이후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졌다.



The Navajo Nation has relations to Korea too. More than 800 Navajo soldiers, including the last original code talker Chester Nez (1921-2014), fought in the Korean War and shed their sacred blood for Koreans.

나바호족은 우리와도 인연이 깊다. ‘마지막 암호통신병’ 체스터 네즈(1921~2014)를 비롯해 800여명의 나바호족이 6·25 전쟁에 참전했고, 한국인을 위해 고귀한 피를 흘렸다.

The 70th Anniversary of the Korean War Commemoration Committee, a joint civilian-government group, has decided to send 10,000 face masks and hand sanitizers to the Navajo veterans who joined in the Korean War. It is a small gift, but the timing is right. A recent report shows that the Navajo Nation is the area with the highest per capita Covid-19 infection rate in the United States. Those receiving the assistance would welcome it as rain at the right timing. I hope the sincere appreciation for their service can be conveyed.

민관 합동 조직인 6·25전쟁 70주년 사업추진위원회가 나바호족 참전 용사들에게 마스크 1만장과 손 소독제 등 방역물품을 지원하기로 했다. 소박한 보은이지만 시점이 좋다. 나바호 자치국이 미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1인당 감염률 최상위권 지역이라는 조사 결과가 발표된 직후라서다. 지원받는 입장에서는 두보(杜甫)가 읊은 ‘때를 알고 내리는좋은 비’처럼 반가운 지원일 것이다. 우리 국민의 진심 어린 감사의 마음이 넉넉하게 전달되리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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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요커가 읽어주는 3분뉴스 E.309 A reinvention of karaoke bars

2020.05.20 19 0
KOREA JOONGANG DAILY

노래방

In April 1991, a booth with a strange device was installed at the Royal Electronic Entertainment Center in the Dong-A University neighborhood of Hadan-dong, Busan. The device was a modified karaoke machine. If you inserted a coin and chose a song, the machine played the instrumental version of the song. The user could sing while reading the lyrics on the monitor. It was the first karaoke machine in Korea.

1991년 4월, 부산 하단동 동아대 앞 로얄전자오락실에 낯선 장비를 갖춘 부스가 설치됐다. 장비는 가라오케 기계를 개조한 것이었다. 동전을 넣고, 노래를 고르면 연주가 나왔다. 모니터의 가사를 보며 노래를 불렀다. 한국 최초의 노래방 기계다.



After a month, a business named Hawaii Beach Noraebang opened in Minrak-dong near Gwangalli Beach, Busan, with multiple booths. Hawaii Beach Noraebang was the beginning of noraebang, or karaoke bars, whose only purpose is singing. In 2005, the number of noraebang peaked at 37,000 in Korea. As of April, 32,000 karaoke bars are in business across the country.

한 달 뒤 부산 광안리해수욕장 인근 민락동에 이런 부스를 여러 개 갖춘 하와이비치노래연습장이라는 업소가 문을 열었다. 앞서 1979년 부산 남포동에는 가라오케 기계를 갖춘 술집들이 있었다. 하지만 노래 자체가 목적인 노래방은 이때 시작됐다. 2005년 3만7000여개로 정점을 찍은 전국 노래방 수는 지난달 기준 3만2000여개다.

Daisuke Inoue was a performer at a bar in Kobe, Japan. One day, a patron asked him to accompany him on a business trip and play music for him. As he could not join, Inoue recorded the accompaniment on a tape. Getting the idea from the experience, he created the first karaoke machine by modifying a car stereo and amplifier in 1971. The machine that used an eight-track cartridge tape was named “8 juke.” Such machines are now known as “karaoke,” meaning “empty orchestra” in Japanese.

이노우에 다이스케(井上大祐⋅80)는 일본 고베의 한 술집 악사였다. 손님이 그에게 회사 여행에 동행해 반주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그는 반주 음악을 테이프에 녹음해줬다. 그는 여기서 착안해 1971년, 카 스테레오와 앰프를 개조해세계 최초의 가라오케 기계를 만들었다. 8트랙 카트리지 테이프를 사용한 이 기계를 '에이트주크'(8JUKE)로 이름 붙였다. 이런 기계를 통칭해 '가라오케'(カラオケ)라 불렀다. '비었다'는 뜻의 일본어 '가라'(空·から)와 '오케스트라'(orchestra)의 앞 두 글자를 합성했다.



Over the long holiday in early May, clubs in Itaewon-dong, central Seoul, became the sources of a cluster of Covid-19 infections. A primary patient who visited a club there went to a noraebang in Gwanak District, southern Seoul. A person who was there at the time was infected. The secondary patient met a co-worker at a bar in Hongdae, western Seoul, and transferred the infection to him. The co-worker’s daughter has also contracted the virus. The first infected person did not wear a face mask and spread droplets in the noraebang, which became a key site for the spread of Covid-19. In 2004, Inoue received the Ig Nobel Prize for peace, a parody prize of the Nobel Prize. He was chosen for attaining peaceful coexistence by “providing an entirely new way for people to learn to tolerate each other.”

이달 초 황금연휴 기간, 서울 이태원 클럽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재확산의 발원지였다. 4차 감염 사례까지 나왔다. 클럽을 방문했던 1차 감염자가 서울 관악구의 노래방을 찾았다. 비슷한 시각 같은 곳에 있던 사람이 2차 감염됐다. 2차감염자를 서울 홍대 주점에서 만난 직장 동료가 3차 감염됐다. 이어 3차 감염자 딸이 4차 감염됐다. 마스크도 쓰지 않은 감염자가 비말을 날렸던 좁고 폐쇄된 노래방은 코로나19 재확산의 중요 경유지가 됐다. 이노우에는 2004년 '패러디 노벨상'으로 불리는 이그(Ig)노벨상 평화상을 받았다. 선정 이유는 '인간이 타인에 대한 인내심을 갖는 완전히 새로운 길을 제시함으로써 평화 공존을 이룩한 공로'였다.



Regardless of the skill level, it takes tolerance to listen to other people singing. If you display the patience a bit more, you can get over the inconvenience of social distancing. Let’s save clubbing and noraebang singing for now for the days when we can all sing and dance more cheerfully.

(잘하든 못하든) 남의 노래를 듣는 건 인내심이 필요한 일이긴 하다. 그런 인내심을 좀 더 발휘한다면 지금의 '거리 두기'에 따른 불편함도 이겨낼 수 있다. 클럽을, 노래방을, 잠시 아껴두자. 모두 함께, 더 신나고 즐겁게 노래하고 춤출 수 있는 날들을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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