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100년 전 그날

3·1절 100주년을 맞았다. 서울 파고다공원에서 학생 1000여 명이 모여 “독립 만세”로 시작해 수원 제암리, 제주 조천리, 바다 건너 미국 언론에까지 들불처럼 번져나가는 ‘그날의 함성’을 디지털로 구성했다.

2019.02.27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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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100년 전 그날

무단통치를 앞세운 일본의 폭압이 극에 달했던 1919년. 파고다공원(서울 종로) 앞에 1000여 명의 학생이 모였다. 경성학교 출신 정재용이 팔각정에 올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자, 학생들은 일제히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곧 백성들이 만세에 합세해 수만 명의 만세 소리가 성안을 가득 메웠다.

[사진 국가기록원]

“조선이 독립한 나라임과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

파고다공원에서 만세 운동이 벌어졌을 때, 민족대표 33인은 서울 종로구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만해 한용운이 만세 삼창을 끝으로 선언을 마치자 일본 경찰이 이들을 체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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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간 전국서 1542회 집회
들불처럼 번진 “대한 독립 만세”

민족지도자, 학생을 중심으로 시작된 “대한 독립 만세”의 외침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모든 백성에게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4월 30일까지 전국에서 만세 시위는 1542회 열렸고, 200만 명 이상이 참여했다. 이 가운데 7500명이 죽고 4만6000명이 옥고를 치렀다.

박은식, 『대한독립운동지혈사』

기생도, 가마꾼도, 장돌뱅이도
전국 방방곳곳에서 만세 운동


1919년 3월 29일, 경기도 수원 종로거리에서는 김향화가 이끈 30여 명의 기생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대로를 행진했다(『한일병합사』).
3월 26일 밤 9시경 뚝도리(현 성수동 일대) 곳곳에서 노동자, 마차꾼 등 1500여 명이 만세 운동에 참여했다(『성동역사문화연구회』). 3월 28일과 4월 3일에는 창원에서 1·2차 삼진의거가 있었다. 비무장 시위대와 일본 헌병대의 유혈 충돌로 사상자가 발생했다. 3월 21일, 22일 제주도 조천리 김시학의 아들 김장환은 주민과 서당 학생 600여 명을 모아 만세 운동을 했다. (『한민족독립운동사』)

[사진 중앙포토]

3월 1일 만세 운동에 참여했던 유관순은 휴교령이 내려지자 고향으로 돌아간다. 이후 청년·주민3000여 명과 함께 4월 1일 아우내장터(병천시장)에서 만세 운동을 벌였다. 일본군에 체포돼 고초를 겪다가 이듬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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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들의 무덤, 서대문 형무소

수많은 독립투사들이 옥고를 치른 ‘서대문형무소’. 1908년 문을 연 뒤 조국 독립을 위해 일제에 항거한 애국지사들이 이곳에서 고문과 사형을 당했다. 유관순 열사도 이곳 지하 감옥에 갇혀있다 순국했다.

이 영상의 노래 '대한이 살았다'는 당시 여옥사에서 수감자들이 불렀다고 전해지는 노랫말에 새롭게 멜로디를 붙여 만든 곡이다.

[영상 KB국민은행]

대구 계명학교, 부산 일신여고,
광주 수피아여고…‘수많은 유관순들’

1919년 3월 10일 광주 장날. 수피아여학교·숭실학교 학생 등 1000여 명이 만세 시위를 벌였다. 수피아여고 학생이었던 윤형숙 열사는 이 자리에서 일본 기마부대에 의해 태극기를 든 왼손이 잘리고 오른쪽 눈을 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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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세게 번져가는 만세 불길…양민 학살하는 일제

1919년 4월 15일, 경기도 수원군(현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에서 장날을 틈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일본 육군은 주민들을 교회당 안으로 몰아넣은 후 문을 모두 잠그고 집중 사격을 퍼부었다. 한 부인이 어린 아기를 창밖으로 내놓으며 아기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일본 군경은 아기마저 찔러죽이고, 교회에는 불을 질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세계에 알려진 3·1운동

캐나다의 프랭크 스코필드(왼쪽) 박사가 제암리 현장을 방문한 뒤 작성한 '제암리 대학살' 보고서를 통해 3·1 운동이 세계에 알려진다. 선교사 윌리엄 린튼은 한국에서 목격한 3·1 운동의 실상을 미국 애틀랜타신문에 ‘한국인의 비폭력 항거를 일본군 기병대는 말발굽으로 짓밟고 총검으로 찔렀다’는 내용으로 기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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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3·1 운동 전까지만 해도 일본은 조선의 멸망을 의심치 않았다. 무자비한 진압에도 만세 운동의 불길이 꺼지지 않고 타오르자, 일제는 기존의 강압적 통치 방식을 회유 방식으로 바꾼다. 이른바 ‘문화통치’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조선인을 이간하고 분열시키며 운동가 색출을 위해 ‘고등경찰제’를 도입하는 등 식민 통치를 강화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대전에서 열린 ‘1919년 3월 16일 인동장터 만세운동’ 재연 행사 모습. [프리랜서 김성태]

‘독립’에 대한 열망 확인…국제적 관심 이끌어

3·1 운동이 전국으로 확산하는 모습을 보며, 조선인들은 ‘독립’에 대한 한결 같은 열망을 확인했다. 또 당시 조선에 머물고 있던 해외 선교사와 지식인들이 비폭력적으로 항거하는 조선인과 이를 잔인하게 진압하는 일본군을 알리자, 국제 여론도 일본에 등을 돌리고 ‘조선의 독립’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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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부터 2018년까지 매달 선정하고있는 '이달의 독립운동가' 293명의 사진으로 만든 태극기 모습.

[국가보훈처]

















기획·글=박형수·이은지·김정석 기자
구성=김나현 기자, 김소연, 이다영 인턴기자
서비스기획=박미희 과장, 나규봉 대리
서비스개발=이명학 대리
사진=국가기록원 등

[사진 중앙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