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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금융사의 봉 … 여든 중반에게 장기상품 팔기도

지난해 대전저축은행과 부산저축은행 영업정지 사태 때에도 노인층이 입은 타격은 컸다. 금융위원회가 두 저축은행을 부실금융기관으로 결정해 ‘6개월 영업정치’ 조치를 내린 지난해 2월 17일, 소식을 듣고 대전 중구 선화동 대전저축은행 영업점을 찾은 노인 예금자들이 공고문을 유심히 읽고 있다. [중앙포토]
# 안모(74·서울 청담동)씨는 2008년 초 만기가 된 HSBC은행의 6개월짜리 고금리 정기예금을 찾으러 갔다가 파생상품인 주가연계펀드(ELF)에 가입했다. 그는 “직원이 권해 가입했는데 얼마 안 돼 수익률 마이너스 30~40%가 찍힌 서류가 날아와 한동안 마음고생을 했다”며 “고금리 정기예금은 미끼였나 싶다”고 허탈해했다. 그는 “지금도 이게 무슨 상품인지 잘 모른다”며 “사기당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 위계철(73·서울 보라매동)씨는 2007년 예금을 하러 국민은행에 갔다가 은행 직원 추천으로 중국펀드에 가입했다. 위씨는 “내가 VIP 고객이니 특별관리를 해준다며 은행 직원이 자기 마음대로 중국펀드에 가입했다”며 “손실이 크게 났는데 담당직원은 다른 지점으로 가버려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결국 3년 만에 원금의 40%를 손해 보고 펀드를 해지해야 했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미국 투자은행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는 많은 투자자에게 생채기를 남겼다. 특히 노인층에 더 심각한 ‘트라우마(정신적 충격)’를 남겼다. ‘은행은 안전하다’는 생각에 창구 직원 권유대로 펀드나 주가연계 상품에 투자했다가 큰 손해를 봤기 때문이다. 금융회사에 대한 신뢰를 잃은 노인들은 대부분 “이젠 예·적금 말고는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입을 모은다. 저금리 추세 탓에 안정적 노후를 위해선 적절한 수익을 내는 현명한 투자가 필요한데도 위기 때 받은 충격에 아예 발목이 잡혀버린 셈이다.


 은행 등 판매사가 고객에게 설명을 제대로 하지 않고 금융상품을 파는 소위 ‘불완전 판매’가 문제가 되자 금융감독 당국은 2009년 초 ‘적합성의 원칙’을 도입했다. 금융상품을 권유할 때 투자상품의 위험을 설명하고 고객의 투자 성향에 맞는 상품만 팔아야 한다는 게 주요 내용이다. 금융투자협회의 표준투자권유준칙은 만 65세 이상에게는 파생상품 판매를 제한적으로 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노인을 ‘봉’ 취급하는 금융회사의 관행은 별로 바뀌지 않았다. 반영희 금융감독원 금융서비스개선국장은 “원칙만 있고 손해배상책임 규정이 없다 보니 실효성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실제로 본지가 10대 증권사에 확인할 결과 한국투자증권을 제외하고 고령자에 대한 파생상품 판매 가이드라인을 둔 곳은 없었다.

 복지관에서 노후 재테크 강의를 하는 신계수(재무설계사) 호서대 경영학과 외래교수는 “젊은 층은 월급 등 벌이가 있는데다 손해를 봐도 나중에 만회할 기회가 있지만 노인은 원금을 회복할 시간이 없다”며 “한 번만 투자 실패를 해도 헤어나오지 못한다”고 말했다. 고령층 금융투자자를 더욱 보호해야 하는 이유 중 하나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보호는커녕 손쉬운 돈벌이의 대상이 되기 일쑤다.


 신한은행 지점장 출신인 전정열 해피실버 금융교실 강사는 “특정 상품에 대한 판매 캠페인이 진행되면 창구 직원들이 실적에 쫓겨 무리하게 고객과 맞지 않는 상품을 팔기도 한다”며 “80대 중반 노인에게 10년짜리 상품을 판 경우도 봤다”고 덧붙였다. 한국은행 출신의 한 증권사 고위 임원은 올 초에 “지난해 은행 창구 직원 권유로 가입한 상품이 만기가 다 됐으니 대신 찾아달라”는 아내의 부탁을 받고 깜짝 놀랐다. 아내는 평소 금융상품이라고는 은행 예·적금만 드는데 가입한 상품이 주가연계상품인 ELF였기 때문이다.

 송옥란(86·여·목동)씨도 비슷한 경우다. 올 4월 만기가 돌아온 적금을 찾으러 하나은행에 갔더니 은행 직원이 “편하게 쓸 수 있다”며 신용카드 발급을 권했다. 송씨는 평생 한 번도 신용카드를 써본 적이 없다. 월급여 등 정기적인 현금 수입이 없는 이들에게 신용카드는 자칫하면 ‘빚만 키우는’ 카드가 될 수 있다. 그런데도 은행 직원은 본인 할당을 채우려고 할머니의 무지를 이용한 것이다.

 젊은이에 비해 고령층은 상대적으로 금융지식과 정보에 어둡다. 학력이나 전직(前職)이 좋아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채완기 ING생명 재무설계사는 “노인들이 금융상품 내용을 알고 가입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며 “피해를 본 후에야 ‘그런 상품인 줄 알았으면 가입 안 했을 것’이라고 후회한다”고 말했다. 황우경 한국거래소 분쟁조정팀장은 “고령 투자자들은 투자로 손실을 볼 수 있다는 것조차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예컨대 주가연계증권(ELS) 등 투자상품을 확정금리 상품이라고 오해하기 때문에 나중에 손실이 나면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상호신용금고가 저축은행으로 이름이 바뀐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은행과 저축은행을 구분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저축은행 후순위채 피해자인 배덕순(64·여)씨가 딱 그렇다. 배씨는 “‘금고’라고 이름 붙었을 때는 거래 안 했다”며 “‘은행’이라니까 다 같은 은행인 줄 알고 거래한 것”이라고 말했다. 배씨는 “거래하던 동양증권에서 우량 저축은행의 좋은 상품이 있으니 들라고 해 저축은행에 가서 후순위채권을 샀다”며 “적금이라고 설명하니 들었지, 난 지금도 후순위채권이 뭔지 모른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선 금융회사 직원들의 선의에만 맡기지 말고 금융회사 시스템 차원에서 노인 고객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다. 미국 메릴린치에서 프라이빗뱅커(PB) 생활을 했던 이석재 얼라이언스번스틴자산운용 대표는 “미국의 주요 금융회사도 고령자를 위한 별도의 가이드라인은 없다”며 “그러나 고객의 과거 투자 행태 등을 통해 고객의 투자 성향을 파악하고 이 정보를 회사 시스템에 입력, 고객과 맞지 않는 상품은 아예 판매가 안 되도록 하고 있다”고 말했다. 상담직원이 고위험 상품을 팔려고 하면 전산상에 ‘투자할 수 없는 고객’이라는 표시가 팝업으로 뜬다는 것이다. 신계수 교수는 “고령층을 위한 금융 서비스 인프라 구축과 함께 고령층을 위한 금융교육이라는 두 가지 노력을 같이 해야 한다”고 말했다.

◆ 특별취재팀=안혜리·김수연·위문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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