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잿빛 식민지에 ‘황금광 시대’ 연 삼성금광 신화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최창학. 자신이 사냥한 호랑이 등 위에 앉아 있다. [사진 최창학 선생의 외손녀 양준심씨]
『동광』 1931년 9월호는 될뻔기(記)-나는 소년시대에 어떤 야심을 가졌었나?라는 재미있는 기사를 싣고 있다. 연전(延專: 현 연세대학교) 교수 이춘호(李春昊: 해방 후 서울대 총장 역임)는 미국에 유학해 공학을 배우다가 광산 실습 도중 광벽(<7926>壁)이 무너져 2명이 즉사하는 것을 보고 방향을 수리학(數理學)으로 전환했다고 회고했다. 광업학자가 될 뻔했다는 이야기다. 이에 대해 동광지 기자가 “광업가(鑛業家)가 되셨으면 제2의 최창학(崔昌學)이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었을 것을 아까운 일입니다”라고 덧붙이고 있다. 대학교수보다 광업가를 더 높이 쳐줄 만큼 1930년대 식민지 한국에는 금광 열풍이 일었고, 그 대표주자가 광산재벌 최창학이었다.

조선의 광산왕, 황금귀(黃金鬼) 등으로 불린 최창학은 식민지 한국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만큼 여러 면에서 기존 부호들과는 달랐다. 언론인 류광렬이 삼천리 1931년 2월호에서 ‘민영휘는 세도바람에 치부한 권세가, 김성수는 호농(豪農)의 후예로 누(累)백만의 재산을 세습한 행운아’로 사뭇 박하게 평가하면서도 최창학에 대해서는 “자타가 다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적빈여세(赤貧如洗: 물로 씻은 듯이 가난함)한 가정에서 태어나 갖은 고초와 신산(辛酸)을 고루고루 맛보다가 뜻밖의 호박이 궁글러서 하루아침에 졸부가 된 말하자면 제3계급에 속하는 극히 미천한 불운아”라고 우호적으로 평가한 것이 이를 말해 준다.

1929년 500만원대 거부로 평가 받아
천도교에서 발행하던 개벽의 뒤를 이은 별건곤은 1932년 11월호에서 “벼락부자, 벼락부자 하지만 근래 조선사람으로 이 최창학 군처럼 벼락부자가 된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는데, 그야말로 돈도 벌고 명성도 얻은 행운아였다.

최창학(오른쪽 첫째)이 북경 북해공원에서 사위 양효손(오른쪽 둘째·양기탁의 외아들)과 서 있다.
최창학에 대해 세론이 나쁘지 않았던 것은 그가 자수성가한 측면도 있지만 일제 때 많은 부자가 민영휘처럼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은 귀족들과 그 후예인 데 대한 반감도 강했다.

오수산은 별건곤 1932년 11월호에서 “민영휘가 조선의 갑부니 이항구(李恒九)가 현금으로 조선에서 제일이니 하는 말도 벌써 옛적 말”이라면서 “(1932년) 현재 현금으로 약 일천만원을 가진 사람은 전날 한말(韓末) 당시 탁지대신(度支大臣)으로 있던 고영희(高泳喜)의 장남 고희경(高羲敬)이다”라고 평가하고 있다.

조선 제일의 부자 민영휘는 망국 후 자작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매국적(賣國賊)이었고, 한때 조선에서 현금이 제일이라고 평가받았던 이항구는 이완용의 차남으로서 1924년 남작 작위를 받은 친일파였다.

고영희는 1907년 제3차 한일협약(정미 7조약) 체결에 앞장서 이완용, 송병준 등과 함께 정미7적(丁未七賊)으로 규탄받았던 인물이자 1910년(경술년) 망국 후 경술국적(庚戌國賊)으로 지탄당했던 매국적으로서 자작 작위를 받은 인물이었다. 고영희의 장남이 고희경인데 1916년 고영희가 사망하자 자작 작위를 물려받았다가 1920년에는 백작으로 오히려 승급했던 친일파였다.

오수산은 별건곤에서 “(고영희는) 다년간 이왕전하(李王殿下: 순종)를 모시고 있는 틈을 타서 주식 상장을 해가지고 일시에 벼락부자가 되었는데, 고희경은 동경에 있고 그 돈도 역시 동경 모 은행에 비밀리에 예금을 했다”고 전하고 있다. 식민지 시대 대부분의 부호들이 나라 팔아먹은 매국적들의 후예였기 때문에 적수공권으로 부호가 된 최창학이 상대적으로 호평을 받았던 것이다.

최창학은 1890년 평안북도 귀성(龜城)군의 빈촌에서 태어나 별다른 교육을 받지 못했다. 20대 초반부터 금맥을 찾아 떠돌아다니다가 숱한 실패를 맛보았는데 그 과정에서 금광에 관한 풍부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 1923년 고향인 귀성군 관서면(<8218>西面) 조악동(造岳洞)에서 금맥을 발견하면서 인생역전의 싹이 트였다. 채광(採鑛) 자금이 없었던 그는 삼촌 최첨사(崔僉使)에게 약 2만원을 빌려 채금(採金)을 시작했다고 전해지는데 이것이 식민지 한국을 황금광 시대로 몰아넣었던 삼성금광(三成金鑛)의 탄생이었다.

오수산은 별건곤에서 최창학의 삼성금광에서는 금이 쏟아져 몇 달 만에 수백만원의 거부가 되었다면서 이를 미쓰이(三井會社)에 300만원에 팔아서 일약 600만원의 재산을 소유한 거부가 되었다고 전한다. 그래서 오수산은 “민영휘를 조선의 토지대왕이라 할 것 같으면 최씨는 조선의 황금대왕이라 하겠다”고 평가하고 있다.

최창학의 재산 규모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해 삼천리(1931. 2월)에서 언론인 김을한은 최창학의 재산을 300만원으로 적고 있는 반면 ‘동아일보’는 1929년 ‘최창학의 광산에는 광부 수천 명과 사무원 수십 명이 있었는데 하루에도 수만원씩 황금덩이(黃金塊)를 캐어서 오륙 년 동안에 최창학을 5백만원의 거부로 만들었다’면서 500만원대 부자라고 평가하고 있다.

‘동아일보’는 1930년 말에는 “햄마 한 개로 천만장자가 된 조선의 광산왕”이라며 천만장자라고 더 높이고 있다. ‘동아일보’는 1929년 8월 18일자에서 최창학이 귀성군 관서면의 삼성금광을 8월 15일 일본의 미쓰이광산(三井鑛山)에 넘겼는데 매도가는 탐문하면 150만원이라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동아일보’는 같은 해 9월 6일 삼성금광을 미쓰이광산이 인수한 후 일본 대표 기노시타(木下正道)의 광산 경영방침이 과거와 돌변해서 금광으로 먹고사는 5천여 주민의 생활이 극도로 곤란해지고 조악동을 떠나는 사람이 급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가난을 경험한 최창학은 그나마 관대하게 경영했지만 일본인들이 가혹하게 경영하면서 광부들의 생활기반이 무너지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금광 안 하는 사람이 미친놈 취급 받기도
최창학은 광산 부근에 학교인 삼성의숙(三成義塾)을 설립했는데 이것도 경영 곤란한 상태에 빠져서 최창학이 200원을 기부했으며 만주 좁쌀 100포를 굶주리는 광부 500명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전할 정도로 일본인이 인수하면서 상황이 급하게 악화되었던 것이다.

최창학이 삼성금광을 매도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평북 삭주군(朔州郡)에 새로운 금광을 물색해 두었기 때문이다. 삭주군은 예부터 유명한 금광 소재지로서 황금광 시대에 광업가는 물론 농민들과 목동들까지도 탐광(探鑛)에 열중했다는 곳이다. 삭주군 수풍면 신상동(新上洞) 삼봉산(三峯山)에 일본인 미쓰노(光野佐助)가 허가를 출원한 금광이 있었는데 최창학이 이 권리를 매수했다. 전문가들과 시굴(試掘)해 보니 우량한 금광이라서 허가가 떨어지기만 기다리고 있다고 ‘동아일보’ 1930년 3월 13일자는 보도하고 있다.

그러나 삭주군 광산에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1936년 2월 그가 소유한 삭주군 대정광무소(大正鑛務所)에서 불이 나 20만원의 거대한 재산 손실을 본 것이다. 그간 시련도 적지 않았다. 1924년 7월에는 최창학의 금광을 강도단이 습격했다. 최창학은 얼른 인부들 틈에 숨었는데 때마침 놀러 왔던 일경(日警) 두 명과 총격전이 벌어져 일경 두 명이 사살되었다. 강도단은 최창학을 찾아서 납치하려고 하다가 얼굴을 몰라서 사무소 금고 안에 있던 현금 6000원과 1만원짜리 금괴 1개를 빼앗아 달아난 사건이 발생했다.

이들이 단순한 강도단인지 독립군인지는 분명치 않다. ‘조선중앙일보’ 1933년 4월 15일자는 1932년 7월 ‘조선××단’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해 벽동군을 거쳐 귀성군으로 잠입해 최창학을 납치하려다가 실패했다고 보도하고 있는데, ‘조선××단’이란 ‘조선독립단’이란 뜻일 것이다. ‘동아일보’ 1935년 9월 14일자는 시국을 표방하면서 가짜 권총을 들고 의주군을 횡행하다가 금광왕 최창학을 습격하러 귀성군으로 가는 도중 석하(石下)에서 체포된 의주 출신 문영삼(文永三), 양관일(梁貫一) 등 4명에게 신의주 지방법원 기구치(菊地) 재판장이 검사 구형대로 징역 9~7년을 언도했다고 보도했다.

최창학의 현금을 획득해 독립운동에 쓰려던 사건이 반복해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별건곤 1934년 6월호에 따르면 ‘최창학의 아들 최응범(崔應範)이 명치(明治: 메이지)대학 재학 중에 공산당에 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동경경시청 형사가 서울의 본집까지 와서 체포해 갔다’고 전하고 있다. 그의 아들은 실제로 사상운동에 자금을 댄 사건도 있었다. 모두 황금왕이 된 대가였다.

당시 금광으로 일확천금의 꿈을 이룬 사람은 최창학 외에도 조선일보사를 인수한 방응모(方應謨)를 비롯해 김태원(金台原), 방의석(方義錫), 박용운(朴容雲) 등 여러 사람이 있었다. 삼천리 1934년 8월호는 금광업계의 내부 정보 보도를 인용해 10만원대 금광 매매가 87건에 달한다고 말하면서 “예전에는 금광꾼이라고 하면 미친놈으로 알았으나 지금은 금광 안 하는 사람을 미친놈으로 부르리만치 되었다”면서 “웬만한 양복쟁이로 금광꾼 아닌 사람이 별로 없다”고 말하고 있다. 많은 사람이 잿빛 식민지의 탈출구로 여겼던 일탈된 황금광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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