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저 서늘한 카리스마, 단숨에 혹했다

오페라를 일컬어 ‘뚱뚱한 여자들이 부르는 노래’라고 이름 지은 책이 기억난다. 벨칸토 창법 때문일 것이다. 벨칸토를 직역하면 ‘아름답게 노래한다’쯤이 되겠지만, 실상은 극장의 탄생 때문에 생겨난 용어다. 궁정의 작은 공간을 벗어나 커다란 극장 무대가 생겨나면서 크게 내지르는 발성이 필요했다. 뱃심으로 불러 제쳐야 하는 판에 울림통이 클수록 유리할 수밖에. 예쁜 생김새나 고혹적인 몸매를 따질 겨를이 없었던 것 같다. 결핵에 걸려 창백하게 죽어가는 봉제공 미미나 직업창녀 비올레타가 엄청난 거구의 ‘뚱뚱한 여인’이어야 했던 사정이 그랬다.

하지만 이제 그것도 옛말이 됐다. 안젤라 게오르규를 필두로 얼굴이며 몸매가 아름다운 여가수가 넘쳐난다. 심지어 요즘은 미모를 넘어서 목소리로만 승부하는 정상급 가수가 거의 없는 것 같다. 다 아름답고 다 멋진 몸매를 자랑한다. 조앤 서덜랜드나 메릴린 혼, 크리스트 루트비히, 아그네스 발차 같은, 소위 ‘덜’ 아름다운 외모로 대가수가 될 수 있었던 시절은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그런 세태가 약간 서글프다….

어릴 때 예쁜 소녀에게 반하듯이, 멋진 연예인에게 선망을 느끼듯이 그런 감정으로 단숨에 혹한 성악가가 내게도 있다. 이탈리아의 메조소프라노 체칠리아 바르톨리(큰사진). 처음 그녀의 음반을 접하고 마침내 영상으로 공연 모습까지 보게 되었을 때 정말로 가슴이 두근거렸다. 쏟아질 것 같은 크고 서늘한 눈매며 균형 잡힌 몸맵시, 좀 도도해 보이는 표정에서는 지난날 마리아 칼라스가 안겨주는 서늘한 카리스마까지도 느껴지게 한다. 실제로 1989년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열린 ‘마리아 칼라스 추모 음악제’에서 수십 분간에 걸쳐 청중의 기립박수를 받는 장면은 놀랍기까지 했다. 강한 인상을 남기는 수려한 외모와 엄청난 가창력을 대하면서 문득 성격은 어떨지가 궁금해졌다. 성질 나쁘기로야 역사상 칼라스를 따라갈 인물이 다시 없을 테고 안젤라 게오르규 또한 매니저가 공개적으로 악담을 퍼붓고 달아날 만큼 히스테리와 변덕의 여왕으로 유명하니 말이다.

로시니 히로인스(Rossini Heroines) 음반 표지.
한참 웃었던 다큐멘터리가 있다. 체칠리아의 어머니 실바나 밧조니 역시 성악가인데 그녀가 증언자로 등장하는 영상 다큐멘터리 ‘A Portrait’가 그것이다. 엄마가 딸을 질투했나보다. 자기 목소리가 체칠리아보다 어떤 어떤 점에서 더 낫다는 말을 쓸데없이 자꾸 한다. (참 주책이다!) 체칠리아의 유년 시절 모습, 곤돌라 배 안에서 또는 콘서트장 뒷무대에서 보여지는 그녀는 무척 수줍어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재기발랄하고 때론 경망스럽기까지 하고 끼가 넘쳐 플라멩코 춤을 완벽하게 출 줄 안다’는 증언이 이어지는 것으로 보아 그리 괴벽스럽지는 않은, 사랑스럽고 친근한 보통의 여성일 것으로 짐작된다. 왜 아이들이 좋아하는 연예인의 성격까지 따지고 드는지 이유를 알겠다! 매혹은 약간 질병에 가까운 집착을 키워낸다. 그녀가 나를 향해 노래 부르는 듯한 착각을 느끼곤 했다.

마냥 아름답기만 했던 체칠리아도 정명훈과 함께 음반을 내기 시작하는 9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서는 세월의 흔적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얼굴 윤곽선은 굵어지고 무뎌져 보인다. 그러고 보니 66년생이다. 이젠 오십을 향해가는 나이다. 애초 그녀는 로시니 스페셜리스트였다. 로시니 오페라 아리아를 그녀만큼 소화해 내는 인물이 더 없다고 했다. 바로크 창법을 복원해 부르는 고음악 영역에서도 놀라운 기량을 보였고 민요집 음반도 참 사랑스럽다. 구태여 한 장의 음반을 꼽아보자면 92년 데카에서 발매된 ‘로시니 히로인스’가 어떨까. 절정의 에너지가 느껴진다. 아, 99년작 비발디 앨범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명연이다.

몇 년 전 그녀의 내한공연이 있었다. 당연히 갔어야 했는데 그날 나는 일부러 다른 공연을 갔다. 체칠리아의 아리아 영역과는 대극에 있는, 독일계 가곡을 최고로 소화하는 안네 소피 폰 오토의 성남아트홀 공연을 찾아갔다. 보고 싶은데 보고 싶지 않은 마음을 체칠리아는 알란가. 고교 때 문학서클에 본명이 데레사인 환상의 소녀가 있었다. 우리 까까머리 모두가 그녀 앞에서 숨도 잘 못 쉬며 죽어나가곤 했는데 놀랍게도 그녀가 남학생 몇몇을 자기 집에 초대한 일이 있었다.
나도 영광을 얻었다. 다른 친구들처럼 공들여 선물을 준비하기는 했는데 그날 나는 집 근처 층계에 앉아 혼자 시간을 보냈다. 심란하고 외로웠다. 그런데 그러고 싶었다. 체칠리아의 공연은 대성황이었다고 다음날 기사에 나왔다. 안네 소피 폰 오토의 공연장에 앉아 나는 내내 체칠리아의 20대 로시니 시절을 떠올렸었다. 고등학교 때에서 하나도 자라지 않은 나를 확인하며 머리칼을 자꾸 뜯었다. 체칠리아여, 그날 객석에 부재한 한 사내를 기억해 달라.

도민이 행복한 더 큰 제주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