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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風’ 크게 쓸 줄 모르고 엇박자만 두들겨댔으니…

백두옹이 몸살을 앓았다. 백 세를 넘기고도 건장한 노익장에게는 남다른 양생법이 있었다. 적게 먹고 손을 자주 씻으며 무리하지 않는 거다. 그런데 대선을 앞두고 애가 타면서 몸의 균형이 깨졌다. 다사상비(多思傷脾)라고 생각이 너무 골똘하면 비장을 다치는 법. 그래서 소화가 안 되니 머리가 무거웠다. 환절기 감기기운마저 겹쳤다. 그러다 야권 후보 단일화해 달라며 투신자살한 사건이 터졌다. 애꿎은 호남인이었다. 뉴스를 접한 백두옹은 몸져눕고 말았다. 와병 중에 더 큰 사태가 벌어졌다. 단일화 여론조사 방식을 두고 그악스레 샅바 싸움하던 두 후보 가운데 안철수가 사퇴한 것이다. 통 큰 맏형님은 없었고 착하고 여린 심성의 아우만 있었다.

“어르신, 어서 쾌차하셔야죠. 카랑카랑한 어조로 후보들에게 쓴소리를 하실 때가 어르신답습니다.”
강권 교수가 문병 와서 백두옹의 야윈 다리를 주무른다. 실버타운에서 지내던 90객 딸도 찾아와서 걱정한다.
“몸이 아픈 게 아니라네. 난 마음이 아파. 남북으로 갈린 이 산하, 이 겨레가 안타까워서.”
백두옹의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같이 늙어 꼬부라진 따님이 눈물을 닦아주었다.

“중생이 아파하니 보살도 아프다더니, 우리 아버지 유마거사 같은 말씀하시네. 그만 훌훌 털고 일어나셔서 나 좀 업어줘 봐요.”
학처럼 늙은 따님이 아이마냥 어리광을 부린다.
“너 하나 못 업어줄 거 같으냐?”
침상에 누웠던 백두옹은 끙-, 소리를 내며 상반신을 세운다. 하지만 떨쳐 일어나기에는 기력이 부친다. 그는 물 한 모금을 입에 넣고 천천히 굴려서 넘긴다. 핏기 없는 안색이 애처롭다.

안철수 등장으로 한국정치 한 단계 진화
“강 교수! 저번에 경주 이견대에 갔을 때 말했었지? 이번 대선을 ‘경상도 남북전쟁과 호남의 슬픈 용병들’로 규정한다고.”
“예, 어르신.”
“그 말을 듣고서 이 늙은이가 버럭 화를 냈었지. 지역감정 들먹인다고. 한데 그 말이 남긴 통증이 이제야 찾아왔지 뭔가.”
백두옹은 야윈 가슴을 쓸어내렸다.

“증오의 시대를 매듭짓고 어르신 말씀대로 대통합, 민족통일 시대를 열어야 할 텐데….”
강 교수가 말꼬리를 가무렸다.

“자네가 돕던 안철수 후보가 사퇴해서?”
“여론조사로는 무소속이 절대 못 당해요. 민주당은 그 방면에 도통했거든요. 그걸 잘 아는 안철수가 던져버린 거죠. 화가 치미네요.”
“기억나나? 나는 일찍이 안철수에겐 척목이 없어서 하늘을 날 수 없다고 했네. 척목은 정당체제야. 안철수가 시민의 열망이 결집된 제3세력으로 발 빠르게 체제를 갖추지 못한 게 실책이었어. 처음부터 새누리당은 배제하고 민주당을 파트너로 삼은 것도 어리석었고. 누차 말했지만 정당지지율은 민주당보다 새누리당이 더 높아. 새누리당이 척결 대상이라면 민주당도 마찬가지야. 민주당 문재인 후보와 동인(同人:)괘 짓고,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와는 규(<777D>:
)괘로 맞서야만 ‘안풍(安風)’의 가치가 실현되는 건 아니었다는 말씀이야.”

백두옹은 시나브로 기운을 차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와 동인을 결성할 수는 없었죠 뭐.”
강 교수가 잘라 말했다.

“‘나는 ‘안풍’을 석과불식으로 표현한 바 있네. 미래의 희망을 담은 씨앗으로 말야. 전혀 정치인 같지 않은 안철수의 등장으로 2012년 한국 정치계는 분명히 한 단계 진화했네. 그것만으로도 공헌한 거지만 민주당 프레임에 녹아버린 건 참 아쉽네.”
“새누리당도 ‘안풍’이 민심이었다는 걸 잊어선 안 돼요. 끊임없이 쇄신해야 한다는 겁니다.”

“여부가 있나? 민주당이야말로 ‘안풍’을 사유화하지 말아야 해. 계속 정신 못 차리고 뻔뻔하게 굴면 국민이 응징해. 내가 안철수라면 처음부터 이렇게 출마선언했을 거야. ‘나는 내가 아니다. 국민의 열망이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12월 19일 밤까지 후보로 남겠다. 그러니 나를 도와주려거든 와서 아무런 조건 없이 돕고, 나를 보쌈 해갈 요량이면 썩 물럿거라!’ 그럼 골치 아픈 단일화 협상도 없었을 거고, 이겨도 져도 영웅으로 남았겠지. 원칙을 보여준 대인으로 말야.”

따님과 외손자며느리가 박수를 쳤다.
“안철수가 끝까지 철수 안 하면 어쩌나 했는데 잘 됐어요. 할아버님, 제가 지지하는 문재인 후보가 대통령 될 거예요. 참여정부의 실패 경험을 거울 삼아 큰 정치를 하겠죠.”

백두옹의 외손자며느리는 벌써부터 게임이 끝난 것처럼 흥분해 있었다. 정권교체 열망이 워낙 강해서 문 후보가 박근혜 쓰러뜨리는 건 어렵지 않단다.
“아가, 속단 마라. 대권은 진작 정해졌어. 그걸 누가 어떻게 빼앗아오느냐가 관건이었어. 강 교수와 할 얘기가 있으니 그만들 나가주련?”
백두옹은 따님과 외손자며느리를 물리쳤다. 가히 더불어 말할 만한데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고(失人), 가히 더불어 말할 만하지 못한데 말하면 말을 잃는(失言) 법이다. 지혜로운 이는 사람도 잃지 않고 말도 잃지 않는다.

“어르신, 생전 처음 올리는 말씀인데요. 답답하니까 지금쯤 점을 한번 쳐보심이 어떨까요?”
강 교수가 조심스레 간청했다.

“점칠 때도 됐지. 하지만 오늘은 아닐세. 내 몸과 마음이 아픈데 점이 제대로 되겠는가? 나중에 쳐보세. 그보다 며칠 전, 문재인·안철수 TV토론 보며 느낀 점이네. 둘 다 국민을 고무시키기에는 한참 못 미치더군. 정치라는 게 말잔치인데 날카로운 사실의 언어, 국민을 사로잡는 희망의 언어를 구사하지 못했네.”
“상대가 상처 입을까 봐 배려하다 보니…. 특히 안철수는 마음이 여려서요.”

“새누리당 박 후보와는 역시 결이 다르다는 걸 심어줄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였어. 둘은 그걸 놓쳤다고. 동인을 결성한다면서 뜻은 다른 데 있었기 때문이야.”
“거기까진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겠죠.”

“그러니까 애송이들이지.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가 나왔을 때, 안 후보는 국민적 신뢰를 한 몸에 받을 기회를 놓쳐버리더군. ‘재발방지 약속을 받아야 가능하다’고 안 후보가 말하자, 문 후보는 ‘안 후보 말은 이명박 정부와 다를 바 없다’고 따졌지. 그때 안 후보는 바보처럼 꼬리를 내렸어. ‘안보 문제는 여야가 다를 수 없다. 소중한 우리 국민이 죽었는데 재발 방지 약속 확실히 받아내지 않고 다시 사지로 내몰 수 있느냐? 나는 절대 그렇게 못한다’고 분명히 못 박았으면 KO승 거
뒀을 거야. 야권 후보의 외교 안보관에 미심쩍어하는 판이니까.”

“아, 그게 용 코였군요!”
“안 후보는 이른바 ‘안풍’을 크게 쓸 줄 몰랐네. 대마디 대장단은 놓치고 희미하게 엇박자만 두들겨댔단 말일세.”

천명을 알면 안달할 이유가 없느니
“그래서, 대권은 어디로 갑니까?”
강 교수가 단도직입적으로 파고들었다.
“주역으로 풀기로 했으니 공개적으로 서죽(筮竹)을 갈라봐야겠지. 하지만 오늘은 아니라고 했잖은가. 답답해도 조금만 더 참게.”
백두옹이 마른세수를 하고 목 부위를 주무르고 양쪽 귀를 비볐다. 양생 도인술 가운데 하나였다.

“어르신이라면 점을 안 치셔도 기미로 알 수 있잖습니까?”
“기미보다야 여론조사가 낫겠지. 저기 책상 위 서류봉투 좀 가져오게.”
강 교수는 백두옹에게 봉투를 건넸다.

“펼쳐봐.”
박근혜-지수(地水) 사(師:)괘 6효 동(動).
문재인-천풍(天風) 구괘 2효 동(動).
안철수-중수(重水) 감(坎:)괘 무동(無動).

“전 뭐가 뭔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이게 뭔 뜻인가요?”
“안철수가 사퇴하기 10시간 전쯤에 법통 있는 어느 원로교수가 하도 답답해서 뽑아봤다며 내게 보내온 걸세. 박근혜-개국승가(開國承家)에 소인배는 절대 등용치 말 것. 문재인-의리를 지키면 태평.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주면 불리. 안철수-물 건너자 또 험한 물. 믿음직한 벗들이 있으면 마음은 편하다.”
백두옹이 간략히 점사를 풀었다.

“놀랍네요! 문재인이 마음을 독하게 먹어 제압한 것, 안철수가 물에 빠져버린 상황 모두요.”
“주역의 문법은 귀신 같아.”
“박근혜의 개국승가라면?”

“대권에 성큼 다가간 걸로 해석할 수 있겠지. 놀라운 건 말야. 소인배는 등용하지 말라고 이른 것이네. 여기다 정자(程子)는 절묘한 해석을 붙였어. 싸워 이기느라 불러다 쓴 소인배는 포상금을 줘 내보내야지 등용하면 안 된다고. 자네 그거 아나? 의사가 실수하면 한 사람이 죽고, 풍수가가 실수하면 한 집안이 망하고, 정치가가 실수하면 한 나라 국민이 비극을 겪는다는 말! 인사(人事)가 만사(萬事)야.”
“정권교체가 이렇게 힘든가요?”
강 교수는 한숨을 쉬었다.

“천명을 받아야 가능하다는 게 대권 아닌가? 낙담 말게. 아직은 몰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는 후보에게 하늘이 감응하니까. 하늘은 국민이오, 유권자라네. 이번 대선은 마치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아서 누구라도 삐끗하면 지고 마네. 복지와 경제민주화, 권력분권은 이미 후보들이 합창했어. 미심쩍으면 국민은 가차 없이 지지자를 바꿔버릴 것이네. 문 후보나 박 후보나 지금부터가 중요해.”

백두옹은 언제 아팠냐는 듯 댓잎처럼 빳빳했다. 하지만 강권 교수는 코가 쑥 빠져서 고개를 젖히고 천장만 바라봤다.
“이 사람아, 아직 나와 자네가 직접 괘를 뽑아본 건 아니잖아? 조만간 우리 둘이서 목욕재계하고 엄숙히 서죽을 갈라보세. 그게 더 정확하겠지. 대선 투표일을 한 주쯤 앞두고 말일세. 먼저 이기는 자보다 나중에 이기는 자가 비룡재천이야.”

백두옹이 내민 손을 강 교수가 맞잡는 것으로 약속이 이뤄졌다.
“문재인이 유리한 괘가 나올 수도 있겠죠?”
“얼마든지 그럴 수 있지. 역사 앞에서 정도를 가면 하늘이 돕고말고.”
초조해하는 강권 교수와 달리 백두옹은 담담하기만 했다. 저마다 천명을 알면 안달할 이유가 없다. 자기 앞의 길을 묵묵히 가면 그뿐이다.



김종록 성균관대 한국철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밀리언셀러 『소설 풍수』와 『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바이칼』 등을 썼으며 최근에 『근대를 산책하다』를 펴냈다. 본지 객원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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