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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석에 쓰러진 교황,삶에 짓눌린 아버지...결국은 똑같은 존재”

-한 작가에게 은퇴란 가능한 것인가.
“작가 스스로가 같은 유형의 작업을 반복하고 있다고 느낄 때가 있다. 내가 말한 은퇴의 의미는 기존에 해왔던 유형의 작업을 완전히 정리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니까 작가로서의 삶의 은퇴가 아니다. 몇 년 지나서 또 전혀 새로운 유형의 작업으로 돌아올지 누가 알겠나. 이제 작품 제작은 그만두었지만 나의 창작 에너지가 물질로서의 작품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표현되는 시기라고 말하고 싶다.”

-어려서부터 다양한 일을 했다. 어떻게 작가가 됐나.
“서른 살에 창작 활동을 시작했고 전시회도 갖긴 했지만 처음 몇 년간은 사람들이 나를 아티스트라고 부르는 것이 당혹스러웠다. 물론 지금은 이 타이틀이 나를 정의하는 가장 편리한 용어라는 걸 인정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서 나는 진정한 자유를 느꼈다. 공장 노동자나 간호사 등의 일을 오랫동안 해왔었는데 창작 활동은 나에게 이러한 직업에서의 탈출뿐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마음이 열릴 수 있게 해주었다.”

(왼쪽부터)1 39La nona ora’(1999), 사진: Attilio MaranzanoCourtesy of the Artist & Galerie Perrotin, Hong Kong & Paris2 구겐하임 전시 모습. 사진: David Heald © Solomon R. Guggenheim Foundation
은퇴? 그건 기존 유형의 작업을 정리한다는 뜻
-힘든 유년 시절을 보냈다(카탈란의 아버지는 트럭 운전사였고 청소부였던 어머니는 오랫동안 림프암을 알았다. 카탈란은 고등학교 때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도왔다).
“행복한 시절도 있었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아픈 기억이 내게는 트라우마가 됐다. ‘노동’은 평생 내 삶을 지배했다. 그래서 부지런히 일하지 않으면 죄책감을 느껴야 했다. 어린 시절 문제아는 아니었지만 학교 가는 것은 고문이었다. 불행하게도 나는 내가 누구인지, 어떠한 길로 가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선생을 만나지 못했다.”

3 39Him’(2001), 101x41x53㎝ 사진: Paolo Pellion di Persano Courtesy of the Artist & Galerie Perrotin, Hong Kong & Paris 4 39All’(2007), 30x100x200㎝ each sculpture 사진: Zeno ZottiCourtesy of the Artist & Galerie Perrotin, Hong Kong & Paris
-당신을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작가라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당신의 작품이 마냥 재미있는 것 만은 아니다.
“나는 항상 작품의 빛나는 표면이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가는 것을 좋아했다. 동시에 이 작품들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사람들은 작품의 겉모습에 매료돼 점점 가까이 다가갈수록 비로소 작품이 담고 있는 섬찟한 현실을 목격하고 여러 가지 이슈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 (Him)’가 가장 대표적인 예가 될 것 같다. 사람들은 멀리서 무릎을 꿇고 있는 어린 아이의 뒷모습에 일종의 경건함을 느끼고 다가갔다가 정작 그 앞모습인 히틀러의 얼굴에서 인간의 악마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경악한다. 그렇다고 나의 모든 작품이 어두운 것은 아니다.”

-가장 화제가 되었던 ‘9번째 시간(La Nona Ora, 1999년작,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운석에 맞아 쓰러져 있는 모습을 표현한 작품)’은 어떤가.
“교황을 비난하기 위한 작품은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바젤의 미술관에 전시를 하러 가서 영감을 받고 제작한 이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교황은 서 있는 조각이었다. 그런데 전시를 하루 앞두고 작품이 마음에 들지 않아 파괴하기로 했고, 그 과정에서 조각이 바닥에 누워 있는 형상이 됐다. 아무튼 이 작품은 내게 어떤 종교적이거나 정신적인 것과 연결된 것이 아니다. 내 개인적인 감상으로는 삶의 무게와 부담을 지고 살아가는 ‘아버지’라는 존재를 대변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몇 년 동안 이 작품을 좋아하지 못했다. 마치 아이가 태어난 것이 기쁘긴 하지만 그 아이로 인해 삶이 버거워지는 것을 못 견디는 것처럼 말이다.”

-당신은 당신의 방식으로 우리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관찰과 비판을 담아내는데, 때로는 매우 정치적이다. 당신의 작품을 통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내 스스로를 어떤 메시지를 가지고 작업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먼저 우리 스스로가 잘해야 하는 의무가 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바꿀 수 있다면 주변인에게 모범이 될 수 있고, 더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주고, 나아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 위대한 리더들의 정책이나 역량도 중요하다고 믿지만 개인들이 만드는 하루 하루의 변화, 가족과 직장에서의 변화도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정말 그렇게 믿는다!”

-구겐하임 전시(2011년 11월 4일~2012년 1월 22일)는 작품 설치 방식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전시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왔나(‘All’이라는 제목의 회고전에서 그는 둥근 나선형 구조의 미술관 실내 가운데 빈 공간에 그동안 창작해 온 모든 작품을 한꺼번에 천장에서부터 1층까지 매달았다).
“진정한 도전은 바로 구겐하임 미술관의 건축에서 나왔다. 이 건물의 구조 자체가 매우 파워풀했다. 건물과 진지한 대화를 이뤄내지 못한다면 이 건물이 모든 것을 죽여버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미술관 어디에 서 있건 사람을 압도하는 가운데 빈 공간이 가장 적합한 전시 장소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을 전시 큐레이터인 낸시 스펙터에게 이야기하면서 모든 것이 명확해졌고, 모든 작품을 하나의 설치물처럼 전시했다. 마치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가족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이는 것처럼.”

-결과에 만족했나.
“그렇다. 그것은 나에게나 미술관에나 매우 위험한 도전이었지만 결국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졌다. 모두들 결과에 놀랄 정도로 만족했다. 그래서 전시가 끝날 때 많이 슬펐다.”

김·오징어·불고기·비빔밥 좋아하고 인삼차 즐겨
-이 전시 후의 마우리지오 카탈란은?
“구겐하임 전시는 나에게는 나의 경력에게 가장 멋진 방법으로 이별을 고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재회 후의 헤어짐이었고, 마치 화려한 불꽃놀이로 대미를 장식하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까만 어둠이 찾아오고 사람들은 모두 다른 전시를 위해 떠난다. 나는 이렇게 끝낼 수 있어서 매우 기뻤다.”

-이 질문을 좋아할지 모르겠지만, 당신 작품은 경매에서 몇 백만 달러에 팔린다. 물론 위탁자가 혜택을 받긴 하지만.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나는 백만장자도 아니고, 또 돈은 쫓는 것에도 관심이 없다. 나는 스무 살 때나 지금이나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우리 집에는 여전히 작은 테이블과 의자, 작은 부엌이 있다. 나는 돈이 더 나은 삶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돈에 대해 가지는 마음은 마치 현란한 잡지에 현혹되는 것과 같다. 세상 사람 모두가 모두 잡지에 나오는 럭셔리를 원한다면 그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내 작품으로 백만장자가 된 사람들이 그 돈을 좋은 곳에 쓰길 소망해 본다.”(웃음)

-한국을 몇 번 방문한 것으로 아는데 가까운 미래에 또다시 한국을 방문할 계획이 있나.
“난 일단 가까운 미래에 남북한이 통일되는 것을 원한다(웃음). 한국을 처음 방문한 것이 제1회 광주 비엔날레였다. 나는 밥, 김, 오징어, 생선, 불고기, 그리고 비빔밥을 아주 좋아한다. 뉴욕에서 파티가 새벽에 끝나면 늘 불고기를 먹으러 간다. 그리고 난 이탈리아 사람이지만 커피는 안 마시고, 한국에서 사온 인삼차는 하루에도 몇 번을 마신다. 한국 남동쪽 연안의 한 마을에 수석을 수집하는 사람들을 따라 갔었던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가까운 미래에 다시 한국을 방문하고 싶다.”

도민이 행복한 더 큰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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