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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석천의 시시각각] ‘대권’의 사용을 금하라

권석천
논설위원
소설가 구보씨가 2012년 11월 서울 종로 거리를 걷고 있다. 끽다점(喫茶店), 아니 커피 체인점에 들어간 그는 가판대에서 산 신문을 읽다 미간을 찌푸린다. “참말 이상한 일일세.” 그는 외투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인터넷을 들여다본다. “어떻게 이런 일이….”



 구보씨의 눈길을 멈추게 한 건 ‘대권’이란 두 글자였다. 대권 주자, 대권 후보, 대권 행보, 대권 구도, 대권 레이스. 구보씨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점에서 법전을 뒤적인다. 1987년 만들어졌다는 헌법 어디에도 대권은 없다. 구보씨는 신문사로 전화를 건다.



 “나, 구보요. 일본제국주의나 쓰던 대권이란 말이 아직까지 쓰이다니…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소.”



 1930년대 소설의 주인공, 구보씨의 물음에서 보듯 일제강점기에 대권은 일본 국왕을 의미했다. 1889년 제정된 메이지(明治) 헌법 전문에 ‘국가통치의 대권은 짐(朕)이 조종(祖宗)에게서 승계하여’라는 대목이 들어 있었다.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대권의 뜻은 명확해진다.



 “천황폐하 칙어(勅語). 만세일계(萬世一系)의 황위(皇位)를 계승하야 제국 통치의 대권을 총람(總攬)….”(1926년 12월) “신민(臣民)의 권리의무에 대한 헌법의 보장이 대권의 시행을 방해치 안흠(않음)은 물론….”(1938년 1월)



 1945년 8월 미국에 항복할 때도 “천황폐하의 대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양해”를 전제 조건으로 제시했던 일본은 이후 평화헌법에서 대권을 삭제했다. 문제의 단어엔 주권이 국민이 아니라 한 명의 통치자에게 있다는 전근대적 논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일본조차 폐기한 이 단어가 21세기 한국에 시퍼렇게 살아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구보씨는 그것이 궁금했던 것이다.



 구보씨의 항의 전화를 받은 뒤 나는 중앙일보 기사 DB(1965년~ )를 검색해 봤다. 대권이란 말이 광범위하게 유통되기 시작한 건 뜻밖에도 87년 대선 이후였다. 대통령 자리가 각축의 대상이 되면서 대권이 최고의 권력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리 잡은 것이다.



 대권은 과연 용어만의 문제일까. 정치권과 언론계, 나아가 우리 사회의 의식 수준을 반영하는 건 아닐까. 대통령이 되면 법의 울타리를 넘어 어마어마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다고들 여긴다. 수퍼울트라 갑(甲)의 이미지다. 그 뒤를 검찰 권력, 국세청 권력, 공정위 권력이 따른다. 신문사·방송사도 언론 권력으로 행세해 왔던 게 사실이다.



 권력(權力)이란 말이 온당한지부터 보자. 권력은 개인이나 집단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이다. 이 단어는 헌법 1조에 단 한 번 등장한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반면에 권리가 미치는 범위 내지 한계를 뜻하는 권한(權限)은 헌법에 열한 번 되풀이된다. 권한 행사, 대통령 권한 대행, 정부의 권한, 행정 각부 간의 권한….



 총구에선 권력이 나오지만 투표함에선 권한이 나올 뿐이다. 민주공화국이라면 대통령이라도 공식적으론 권한이라고 해야 맞다. 그럼에도 우리는 권력을 인격화하고 우상으로 받들며 그 앞에 대(大)라는 수식어까지 붙여주고 있다.



 대권의 감칠맛에 중독된 한국의 대통령들은 권좌에 앉아 자기 뜻대로 세상을 바꾸려다 실패를 반복했다. ‘실세’ 완장을 찬 측근들만 단물을 빨았다. 미국 대통령을 보라. 의회에서 법안 한 건을 통과시키기 위해, 의원들의 협력을 끌어내기 위해 전화기를 손에서 놓지 않는다. 그 옆을 지키는 건 측근이 아니라 참모다. 그래서 권력엔 부패가 따르지만 권한엔 책임이 따른다. 이것이 권력과 권한의 차이다.



 유력 후보들이 다짐하듯 이번 대선을 계기로 제왕적 대통령이 사라지길 기대한다. 대통령 한 사람의 각오나 노력만으론 어려운 일이다. 대권이란 말부터, 뿌리 깊은 시대착오부터 걷어내야 한다. 구보씨는 묻고 있다.



 “대권을 말하는 자, 또 하나의 천황을 기다리는 게 아니오? 나라를 당신들 바라는 쪽으로 밀어붙이고 미운 놈들, 싫은 놈들 혼내줄 만세일계의 천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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