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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멈추시게 멀미 나는 삶의 쳇바퀴

텅 빈 검은 무대, 덩그러니 서 있는 문, 초라한 침대와 서랍장, 한 구석의 낡은 빨간 상자.

벽도 없이 사각의 경계를 만들어내는 이 간소한 무대장치들은 작은 소극장마저 휑해 보일 정도로 무대 가운데에 놓여 있다. 게다가 이 방의 또 하나 출구인 창문은 무대와 객석 사이 허공에 떠 있다. 비록 낡고 허름할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안식처일 이 방은 밖으로부터 지켜야 할 벽은 없고, 객석과 대화해야 할 전면은 (비록 격자뿐일지라도) 창이 가로막고 있다. 제대로 보호받지도 못하면서 갇혀 있는 곳. 극단 학전의 세 번째 청소년극 ‘더 복서’는 이 휑하고 쓸쓸한 곳에서 시작된다.

아니나 다를까. 검버섯 가득한 백발 노인이 휠체어를 굴리며 무대 가장자리를 돌아 덩그러니 서 있는 문을 열고 작은 방으로 들어선다. 휠체어에서 일어나 방안을 가만가만 오가는 동안 무대 위에는 침묵뿐이다. 침묵은 아직 솜털 보송보송한 17세 소년 ‘셔틀’이 등장해도 마찬가지다. 어깨에는 철제 사다리를 메고 손에는 페인트 통과 도구 일속을 들고 낑낑거리며 등장한 셔틀은 욕지거리를 해대면서 ‘말’들을 쏟아내지만 이어폰 밖으로 흘러나올 만큼 시끄러운 음악이 소년의 귀에 꽂혀 있다. 세상의 끄트머리 같은 작은 방, 노인과 소년은 각자의 방식으로 침묵 속에 있다.

이들의 의아한 만남이 예고하듯이 ‘더 복서’는 노인과 소년이 티격태격 우정을 쌓아가는 이야기다. 생각해 보면 노인과 소년은 썩 잘 어울린다. 생의 한가운데를 두고 이 편과 저 편에 나누어 서 있는 둘은, 생의 한가운데를 막 지나온 이의 회한과 그 앞에 선 이의 불안과 동경으로 서로 어긋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훌륭한 짝이 된다. 하여 할머니·할아버지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든, 노인과 어린아이의 우정이든 이 둘이 짝이 되어 만들어 가는 많은 이야기는 멀미나게 돌아가는 삶의 쳇바퀴에 지친 우리에게 한걸음 물러나 생의 긴 시간을 되돌아 볼 자리를 마련해 준다.

노인과 소년, 두 외톨이의 치유기
하지만 ‘더 복서’는 이즈음의 대세라 할 따뜻하고 아름다운 ‘힐링’으로 직진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둘의 자리가 아프기 때문이다. 노인은 왕년에 ‘붉은 사자’로 명성을 날리던 세계챔피언이었지만 ‘차마 못할 짓 많이 했지’ 하는 삶의 회한에 빠져 이곳에서마저 외톨이로 살고 있다. 툭하면 내뱉는 욕지거리가 왠지 어색한 셔틀은 ‘짱’의 절도죄를 대신 뒤집어쓰고 그 벌로 사회봉사명령을 치르고 있다. 소년이 항상 쥐고 있는 스마트폰은 음악으로 귀를 막고, 보낼 수 없는 문자를 입력하면서 세상과의 부대낌을 애써 잊는 유일한 피난처다. 노인의 회한에는 베트남전 등 현대사의 부침이 새겨 있고, 소년의 외로움과 두려움의 배면에는 미래에 대한 불안을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전가한 채 경쟁으로만 내모는 우리 사회의 속수무책이 놓여 있다.

학전은 ‘지하철 1호선’의 수많은 전설로 기억되지만, 사실 이들의 주력 레퍼토리는 어린이청소년극이다. 어린이청소년극을 자체 제작하고 레퍼토리로 운영하고 있는 극장은 아직 민간과 공공을 통틀어 학전이 유일하다. 또한 학전의 어린이청소년극은 최근 두터워지고 있는 어린이청소년극 전문집단들과도 다른데, 다른 집단들이 이미지 움직임 상상력을 강조하는 것과 달리 이들은 드라마에 천착한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의 갈등을 직시하는 것이야말로 연극의 소명이라는 고집스러움이랄까.

‘더 복서’에서도 이러한 고집은 여전하다. 직접 번안과 연출을 맡은 김민기는 이번에도 역시 독일 희곡을 집어들었지만 이야기를 지금 이곳으로 옮겨오기 위해 재창작에 가까운 세공을 거듭했다. 드디어 두 외톨이가 작고 낡은 방을 탈출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예의 보이지 않는 사각의 경계가 무너질 때 그것은 해방의 판타지라기보다는 절실함으로 다가온다. 음악감독을 맡은 정재일은 피아노 선율로 이 외로운 영혼들을 시종 감싸고 마지막 탈출에 이르러서 대사와 나란히 전개되는 랩으로 이들의 절실함을 흥겹게 부조한다.

도민이 행복한 더 큰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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