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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지식] 아흔둘, 은빛 머리의 엄마는 여자였습니다

올해 아흔두 살을 맞은 박성보 할머니의 초상 사진. 예순여덟의 딸 한설희씨가 찍었다. 한씨는 이 사진으로 2011년 다큐멘터리 신진작가에게 주는 ‘온빛 사진상’을 받았다. 책에는 63컷의 사진과 한씨가 직접 쓴 에세이가 실렸다. 절제된 문장이 인상적이다. [사진 북노마드]

엄마 사라지지마
한설희 글ㆍ사진
북노마드, 252쪽
2만4000원


엄마는 외딴 섬에 삽니다. 서울 이문동의 세 평 남짓한 작은 방이 엄마가 딛고 있는 세계의 전부입니다. 아흔두 해를 살았습니다. 말 많은 4남매를 홀로 키우느라 부대낀 삶이었습니다. 몸도 마음도 마모됐지요. 엄마는 외도로 집을 나간 아버지를 한평생 기다렸습니다. 2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에 말없이 창 밖만 바라보시더군요. 오랜 기다림의 끝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장례식장을 나오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혹시 엄마도 아버지처럼 갑자기 사라지지 않을까. 엄마를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가는 길을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2010년 10월 27일, 카메라로 엄마와 처음 눈을 맞췄습니다. 젊은 시절 잠깐 익혔던 사진을 4년 전부터 다시 배우는 중이었습니다. 프레임 안에 들어온 엄마는 점점 쇠약해져 갔습니다. 하루 종일 잠만 자는 날도 있었지요. 어쩌다 몸을 일으키면 앙상한 팔과 다리가 날카롭게 렌즈에 부딪쳤습니다. “늙은이를 찍어 뭣하냐.” 철컥거리는 셔터 소리에 엄마는 손사래를 쳤습니다.

 엄마를 기록하는 작업은 계속됐습니다. 경기도 용인 집에서 일주일에 한 번은 이문동에 들렀습니다. 셋째 남동생 내외가 일을 나가면 엄마는 검은 방에 홀로 남습니다. 딸이 차려준 밥상 앞에서 어렵게 숟가락을 뜨고, 쪼그려 앉아 양치질을 하고, 성경을 읽고, 교복 입은 아들의 옛날 사진을 바라봅니다. 딸은 그 작은 세계를 놓치지 않으려 셔터를 눌렀습니다.

 하루는 경대 위에 못 보던 화장품 세트를 발견했습니다. “며늘애한테 부탁했어.” 며칠 전 엄마 사진이 실린 잡지를 보여드렸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처음엔 카메라 앞에서 성질을 내던 양반이 우아한 손짓을 해 보이고, 입매에도 힘을 줍니다. 구십이 넘어도 예뻐 보이고 싶은 그는, 여자였습니다.

 올 초에는 엄마 사진을 모아 전시를 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찾았습니다. 한 중년 여성은 주저앉아 울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엄마를 생각했던 것이겠지요. 바깥 출입이 어려운 엄마는 전시회에 오지 못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찍을 수 있는 사진이 줄어듭니다. 엄마는 대부분의 시간을 누워있습니다. 곰살맞은 구석이란 찾아볼 수 없는 맏딸이었습니다. 예순여덟의 나이든 딸이 엄마 곁에 가만히 누워봅니다. 늙은 모녀는 여전히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구구절절이 설명하지 않아도 압니다. 곁에 있는 것으로 그만인 것을요.

 엄마의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느냐는 질문을 받습니다.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준비 되는 건 없습니다. 예감을 할 뿐이지요. 사진 속에서 엄마는 무릎을 모으고 조용히 앉아 이렇게 말하는 것 같습니다. ‘내 삶은 빛이 들지 않는 자리에 있는 것 같았지만, 돌아보니 제법 찬란했다고. 언젠가 다른 곳에서 다시 태어나도 네 엄마로 살고 싶다고.(…) 그러니 나의 늙음을 더는 딱한 눈으로 바라보지 말라고.’(195쪽)

 엄마가 하늘로 가시고 나서도 한동안은 엄마를 찍게 될 것 같습니다.


※이 기사는 저자(사진) 인터뷰를 토대로 독자에게 쓰는 편지로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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