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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홍의 소프트파워] 늑대가 되고 싶다

정진홍
논설위원
# 아는 이로부터 고은의 작은 시편 『순간의 꽃』을 선물 받았다. 첫 장을 열자 이런 구절이 눈에 들어와 가슴에 박혔다. “해가 진다/ 내 소원 하나/ 살찐 보름달 아래 늑대 되리”. 이 구절을 읽다가 문득 요즘 최고 흥행의 영화 ‘늑대소년’이 떠올랐다. 지난달 31일 개봉한 후 보름 만에 누적관객수 400만 명을 돌파한 파죽지세의 흥행몰이 영화다. 실제로 극장에 가보면 관객들이 맨 앞좌석부터 꽉 들어차 스크린 속의 늑대소년 송중기에게 넋을 잃고 상대역인 앳된 소녀 박보영에게 감탄사를 연발한다. 하지만 아이 손에 이끌려 얼떨결에 함께 보게 된 나 같은 중년에겐 이 영화가 뭔가 2% 안 와 닿는 점도 없지 않다. 특히 마지막에 소녀는 늙어 백발의 할머니가 되었는데 늑대소년은 여전히 젊디 젊은 그대로의 모습인 대목에선 솔직히 뜨악했다. 물론 그 젊은 송중기 보겠다고 극장에 몰려온 이들에게 늙은 늑대인간 송중기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것이겠지만!

 # 늑대는 야생동물 중 유난히 일부일처제를 고집한다. 씨족 위주로 5~10마리 정도로 구성된 무리는 끈끈한 유대와 놀라운 사회성을 갖는다. 탁월한 통솔력을 지닌 무리의 리더는 끝까지 가족을 돌본다. 늑대는 얕은 수 쓰거나 잔머리 굴리지 않는다. 오로지 살기 위해 정직하게 거친 들판을 내지른다. 인간은 재미로도 사냥을 하지만 늑대는 단지 재미를 위해 다른 동물을 죽이는 일은 하지 않는다. 동화에 나오듯 ‘아기 돼지 삼형제’의 집을 입김으로 부수고 날려버리는 아주 고약한 존재는 진짜 늑대의 모습이기보다 오히려 탐욕스러운 인간에 더 가깝다. 진짜 늑대는 필요 이상으로 먹고, 필요 이상으로 가지려 하고, 필요 이상의 즐거움을 탐하지 않는다.

 #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며 활발한 활동을 펼치는 엘렌 그리모는 ‘늑대를 키우는 피아니스트’로 유명하다. 그녀는 멸종 위기에 놓인 늑대를 보존하기 위해 늑대보호센터를 만들고 야생으로 다시 방사하기 전까지의 늑대들을 돌본다. 얼마 전 소백산에 방사된 토종 여우가 민가 아궁이 속에서 죽은 채 발견된 적이 있다. 인간이 쳐놓은 울타리 안에 갇혀 살다가 야생으로 돌아간 여우는 방사 후 일주일이 채 안 돼 싸늘한 시체로 변해 있었다. 직접적인 사인은 아궁이의 재가 여우의 기도를 막아 호흡곤란에 빠진 것으로 얘기됐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들은 남는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본래 야생동물일지라도 야성을 회복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는 점이다.

 # 옥스퍼드대 철학박사 출신이지만 정작 자신을 가르치고 깨닫게 한 것은 ‘늑대’였다고 고백하는 철학교수가 있다. 언뜻 괴이하게 들리지만 자기 안의 야성을 회복하길 희구하며 늑대와 11년을 함께 산 철학자 마크 롤랜즈의 이 한마디가 내 안의 야성을 들깨운다. “수다쟁이 영장류 대신 내 안의 과묵한 늑대의 소리를 들어야 한다!” 다시 고은의 작은 시편을 들추다가 이런 대목에 눈길이 멈췄다. “고양이도 퇴화된 맹수이다/ 개도 퇴화된 맹수이다/ 나도 퇴화된 맹수이다// 원시에서 너무 멀리 와버렸다/ 우리들의 오늘/ 잔꾀만 남아”. 이 대목을 읽고서 나도 모르게 외쳤다. “그래, 야성을 잃었다. 아니 잊었다. 그런 것이 있었던가 싶게 까맣게 잊었다. 나와 우리는 너무나 온순하고 당연하게 순치돼 버렸다. 하지만 다시 맹수가 되고 싶다. 다시 늑대가 되고 싶다. 상실한 야성을 되찾고 싶다. 이렇게 사그라지듯 아궁이 속에서 죽어갈 순 없지 않은가!”

 # 그 옛날 칭기즈칸에게 세계정복의 거친 열정을 일깨웠던 그 불굴의 정신력과 강인한 생명력을 지녔던 초원의 늑대가 되고 싶다. 이리저리 휘몰려 다니는 잡견이 아니라 고고한 늑대가 되고 싶다. 목자가 오기만을 기다리며 이리 가라면 이리 가고 저리 가라면 저리 가는 길들여진 양이 아니라 홀로 자기만의 길을 찾아가는, 결코 길들여질 수 없는 초원의 늑대가 되고 싶다. 정말이지 거친 들판을 내지르는 늑대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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