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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재현 칼럼] 예술인복지법은 자선법이 아니다

노재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집에서 인터넷TV(IPTV)를 이용하기 시작한 지 벌써 2년이 넘었다. 쉬는 날 볼 만한 프로그램을 찾다가 마땅한 게 없으면 별도로 마련된 영화 코너에 들어간다. 지금 극장에서 상영 중인 최신 영화부터 고풍스러운 옛날 영화까지 꽤 많은 작품이 담겨 있어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잡으면 된다. 최신 것일수록 비싸고, 오래된 것들은 무료거나 1000원 미만 가격이다. 며칠 전 감상한 곽지균 감독의 2000년도 작품 ‘청춘’은 무료였다.

 공짜라니. 적이 미안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곽지균(1954~2010) 감독의 영화였기 때문이다. ‘겨울나그네’ ‘젊은 날의 초상’ 등으로 유명한 곽 감독은 재작년 5월 대전시 자기 방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경찰은 자살로 추정했다. 고인의 노트북에는 ‘일이 없어 괴롭고 힘들다. 마음이 공허하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영상미가 무척 인상적인 영화 ‘청춘’에서는 등장인물 중 두 명이 스스로 생을 접는다. 대종상을 세 번이나 받은 실력파 감독이 왜 작품 속 인물의 운명을 따라가야 했나.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는 주변의 증언이 있었다. 그러나 만약 일정 자격을 갖춘 예술가들에게 4대 보험 혜택이 주어졌다면 곽 감독의 처지도 혹시 달라지지 않았을까. ‘일이 없어 힘들다’고 절망한 감독이 남긴 영화를 맨입으로 감상하려니 죄스러운 느낌을 영 떨치기 힘들었다.

 내일 시행되는 ‘예술인복지법’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취약계층 아닌 특정 직업군을 위해 마련된 법률이다. 곽 감독 사건이나 작년 1월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가 안양시 월셋방에서 지병과 생활고에 시달리다 숨진 일이 법안 통과에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최고은법’으로 불린다. 그러나 시행을 코앞에 둔 지금도 법안을 둘러싼 논란은 남아 있다.

 하나는 법안의 실효성 시비다. 입법 과정에서 4대 보험 전면 혜택은 물 건너가고 산재보험 길만 터놓았다. 그나마 산재보험도 100% 본인부담이다. 예술인을 여객자동차 운송사업자, 퀵서비스사업자, 50명 미만 근로자를 고용한 사업주 등과 똑같이 중소기업 사업주로 취급해 자기 돈으로 산재보험에 들라고 했다. 우리나라 문화예술인의 62.8%가 월 수입 100만원 이하인 점을 감안하면 무리한 조건이다. 노웅래(민주통합당) 의원은 “예술인의 낮은 소득 수준과 예술인복지법 취지를 감안할 때 고용노동부의 ‘영세사업장 사회보험료 지원사업’에 준해 산재보험료를 지원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노 의원은 “확정된 법안에 복지재단 운영재원 확보 방안이 빠진 것도 큰 문제”라고 말했다.

 현장 예술인들 사이에선 의견이 다양하다. “법안을 아예 폐기하자”는 주장까지 있다. 법안이 ‘예술인’과 ‘예술활동’을 제대로 짚고 있느냐는 근본적인 문제 제기도 여전하다. 예를 들어 예술활동 실적을 증명하는 기준으로 문학 분야는 최근 5년 동안 ‘5편 이상의 작품이나 비평을 문예지에 발표한 자’와 ‘1권 이상의 작품집이나 비평집을 출간한 자’를 꼽고 있다. 이에 대해 한 시인은 “작품의 질, 문예지 수준이 천차만별인데 과연 제대로 판별할 수 있겠느냐”며 “오히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부작용만 낳을 것 같다”고 우려했다. 영화 연출의 경우 ‘최근 3년 동안 영화상영관 등에서 상영된 영화에서 1회 이상 연출을 담당한 자’로 돼 있다. 국제영화제 수상 경력이 있는 한 감독은 “영화는 기획·시나리오 등 준비에만 2년가량 걸리고 이후 제작 단계에서도 투자를 받지 못해 ‘엎어지는’ 경우가 허다하다”며 “한 번 엎어지면 아무 실적도 없는 연출자가 돼버리는 셈 아닌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논란에도 불구하고 나는 ‘첫술에 배부르랴’는 입장이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법률이던가. 실효성 문제는 치밀한 운용 과정을 통해 최소화할 수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제도가 자리 잡혀 갈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법안이 날개를 펴는 내년도 관련 예산이 당초안(355억원)에서 왕창 깎여 겨우 70억원만 배정된 점이다. 이러려면 무엇하러 법안을 통과시켰는지 의아하게 만드는 삭감 규모다.

 만년 적자이던 우리나라의 문화서비스 수지가 올해 사상 처음 흑자를 기록할 전망이다. 3분기까지 3730만 달러(약 400억원) 흑자인데, 연말까지 이 기조가 유지될 것이란다. 한류 붐에 속을 끓이던 일본은 정부(총무성)가 직접 나서서 NHK와 민방들을 집합시켜 ‘방송콘텐트 유통 촉진 방책 검토회’를 출범시켰다. 이런 변화가 그냥 생긴 게 아니다. 저변에 문화예술인들의 창의력과 노고가 깔려 있다. 예술인복지법을 무슨 자선제도라도 되는 양 취급해선 안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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