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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동네 유래] 서초구 서초동

서초(瑞草)지역은 원래 과천군 동면 또는 과천군 상북면(上北面)이었다. 1913년 일제 강점기 때 군·면을 통폐합한답시고 다시 시흥군 신동면(新東面)으로 했다가 1962년 11월, 서울에 편입해 오늘에 이른다. 서초동하면 오늘날은 법조타운을 떠올리지만 옛날에는 사또가 머물렀던 자리라하여 ‘사도감(司都甘)’ 마을, 사도감 들, 사도감이 고개(관고개), 사도감 다리 그리고 사도감 개울이라는 땅이름으로 불려진 마을이다.

 또 오늘날은 도시화에 밀려 어디가 어딘 줄 가늠하기조차 어렵지만 옛 상문중·고등학교 자리는 ‘서낭당고개’라 하여 조선조에 유명한 청백리 상진(尙震)의 묘소가 자리한 곳이다.

 상진(1493~1564)은 조선조 중종(11년) 때 등과, 명종 때까지 조정의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다. 특히 그는 재임기간 동안 지방 관리의 부패 제거에 힘썼고 농촌 진흥책을 제시하기도 했다.

 1533년 대사간이 됐고 이어 부제학, 좌부승지를 역임하면서 언론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 뒤 형조참판을 지내고 경기도 관찰사, 형조판서, 대사헌, 한성부판윤, 공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치면서 청백리로서 그의 실력을 한껏 과시했다. 말년에는 우의정, 영의정, 좌의정이 돼 국정을 총괄했으며 특히 그의 재임 중에 실시한 ‘부민고소법(部民告訴法)’은 오늘을 살아가는 이곳 법조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그가 재임하는 동안 황해도 평산(平山)을 근거지로 소요를 일으켰던 임걱정(林巨正)의 난을 평정, 좌의정 이준경(李俊庚)과 더불어 사림을 등용하는 데 힘써 명재상으로 역사에 기록되고 있다.

 부민고소법을 실시했던 상진이 잠든 땅에 우리나라 법조타운이 들어선 것도 결코 우연만은 아닌 것 같다. 법조타운의 원조는 원래 종로네거리였다. 지금은 SC은행 본점이 자리하고 있지만 근대 재판소의 모태라고 할 수 있는 의금부(義禁府)가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두 손을 번쩍 들어 위로 뻗어도 닿지 않을 돌담으로 둘러져 있었고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좌우 남간(南間), 서간(西間)이라 불리는 옥사(獄舍) 두 채와 호두각(虎頭閣)이라는 법정이 있었다.

 재판이 있는 날이면 솟을대문 앞에 두 개의 커다른 등(燈)이 나걸려 재판이 있음을 시민에게 알렸다. 포졸들에게 에워싸인 피고인석에는 돗자리가 깔려 있어 붉은 포승에 X자형으로 묶인 죄인을 무릎 꿇였다. 양쪽에 솜타래를 드리운 모자를 쓰고 푸른 관복에 보석(?)이 띠를 두른 포도대장이 호두각 정면 호두의자에 앉아 심문을 하고 그 가운데 도사(都事)가 쭈그리고 앉아 심문 내용을 기록했다. 그 뒷뜰에는 연못이 있었는데 재판에 들 적에 판관(判官)은 반드시 이 못의 물로 목욕 재계를 함으로써 사심(邪心)을 씻는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지금 그 자리엔 옛 의금부 터를 알리는 표석이 그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젠 서초동 법조타운에 고등검찰청, 대검찰청, 가정법원, 지방법원, 고등법원, 대법원이 가히 밀림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눈길을 끄는 것이 하나 있다. 대검찰청 입구에 서 있는 한쪽 눈의 조형물! 총을 쏠 때는 목표물을 정확히 겨냥하기 위해 한 쪽 눈을 감을지 모르지만 사물을 정확히 판단하기 위해선 두 눈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어찌 되었건 요즘 검찰을 바라 보는 시각이 곱질 않다.

 서초동의 본래 땅이름은 ‘서릿불’이었다. 이 지역에 서리가 빨리 또는 많이 내렸던지 서릿불이란 지명이 생겼고 이것을 한자로 옮기면 상초리(霜草里)가 되고 상초가 다시 서초(瑞草)가 된 것이다. 그 서릿불에 찬 서릿발 같은 서슬이 번득이는 법조타운이 들어섰으니 서리 상(霜)은 곧 법이 엄할 상으로 훈독되기 때문이다. 상전(霜典)하면 곧 법전(法典)을 뜻하고 상대(霜臺)하면 법조(法曹)를 뜻하니 어찌 이곳 서릿불(瑞草)과 무관하다 하랴.

 이홍환 서초구 지명위원(한국 땅이름학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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