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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현실과 상상은 하나다

김기택
시인
“처음으로 오징어를 씹어 봤는데, 뭐라고 표현할 수 없는 자극이 계속 내 안에서 일어났고 지금도 일어나는 중입니다. 한국에 와서 많은 자극을 받고 있습니다.” 미국 시인 요한 고란슨의 말에 객석에서 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외국 작가 열 명과 우리 작가 열 명이 닷새 동안 작품 낭독도 하고 수다도 나누는 서울작가축제가 열리는 자리였다. 오징어 냄새를 혐오하는 외국인이 많은데 그는 오히려 왕성한 호기심으로 낯설고 새로운 냄새가 자극하는 세계를 탐험하며 즐기고 있었다. 삶과 죽음이 뿜어내는 원시적인 냄새가 얼마나 신기하고 재미있었을까? 그 자극을 받아 나온 시가 읽고 싶어졌다.

 한국문학번역원이 네 번째로 여는 올해 행사에는 장 필립 투생, 필립 베송 등 잘 알려진 작가들도 있었지만, 입양인 출신 미국 시인 제니퍼 권 답스, 중국계 미국 시인 페이 치앙, 필리핀계 영국 시인 아이비 알바레즈 등 다양한 삶을 살아온 작가도 많아 흥미로웠다. 그래서인지 현실과 상상이라는 주제로 수다를 나누는 현장은 청중으로 가득 찼고 큰 활기도 느껴졌다.

 제니퍼 권 답스는 시에서 ‘mother’ 대신 ‘omma’(엄마)를 가끔 쓰는데, 이 말에는 끊임없이 상상력을 자극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진은영은 어린 시절에 고아가 되고 싶다는 상상을 종종 했는데, 제니퍼 권 답스의 시를 읽어보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엄마를 상상하고 있었다며 놀라워했다. 페이 치앙은 뉴욕에서 문학행사에 참가하려 하는데 ‘너희는 미국 작가가 아니다. 캘리포니아에 가면 너희 같은 유색인종을 위한 행사가 많다’는 말을 들었다며 미국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시인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거의 모든 작가들이 현실과 상상이 다르지 않다는 데 공감한 점이다. 상상은 꿈꾸기이니 비현실적이며 현실과 대척점에 있다는 게 보통의 상식이다. 현실과 상상을 뻔질나게 오가는 작가들의 생각은 다르다. 문학적 상상은 밤에 꾸는 꿈이 아니다. 상상이 꿈이라면 그것은 낮에 꾸는 꿈이며, 진정한 삶과 자유, 관습과 타성과 마비에 가려지거나 질식된 새로운 세계를 찾는 의지력의 꿈이다. 현실 없는 상상은 공허하고 상상 없는 현실은 답답하다.

 독일 작가 야콥 하인이 들려준 ‘예젠 씨, 하차하다’는 회사에서 잘린 실업자가 매일 텔레비전만 보며 지내다가 텔레비전을 창 밖으로 던지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일에서 의외의 즐거움을 발견하는 과정을 코믹하게 그린 소설이다. 우울한 내용인데도 낭독하는 내내 객석에서 웃음소리가 자주 들렸다. 마치 내 이야기를 듣는 느낌이었다. 회사원 시절이 갑자기 몰려와 소설은 어느새 나의 현실이 되어 있었다. 타인의 상상이 나의 현실이 되는 순간이며 괴로움이 즐거움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최근에 나온 내 시집을 읽고 편안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쓰지 않고 왜 폭력이나 살인 같은 끔찍한 얘기를 쓰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내 시는 상상력이 만든 것이지만 그건 나의 일상이 변형된 것이다. 내 시에 무섭고 끔찍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현실이 그만큼 험악하고 나의 내면이 불안하기 때문일 것이다. 불안이나 두려움, 괴로움은 에너지가 강해서 터져나갈 출구가 꼭 필요하다. 활짝 열린 자유로운 세계로 나가는 출구가 상상이다.

 슬프거나 괴로운 시를 쓸 때조차 나는 즐겁다. 내 안에서 나를 괴롭히던 것들이 시 속에서 즐거움과 아름다움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내가 괴로워했던 일들은 내 몸 속에 저장되어 있으면서 나도 모르게 발효되고 숙성된다. 충분히 익으면 언어를 입으려고 내 안에서 태동하는데 그걸 받아 적으면 시가 된다. 그렇게 나온 시에서는 흉하고 악취 나던 경험이 이상한 기쁨과 아름다움으로 바뀌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나는 시가 주는 즐거움을 괴로운 즐거움, 슬픈 즐거움, 외로운 즐거움, 불안한 즐거움이라고 부른다.

 외국 작가들과 닷새 동안 만나면서 서툰 영어로 소통하는 것이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시와 소설이 공용어인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언어가 닿지 않는 광활한 오징어 냄새 속에서는 번역이 필요 없는 감각과 감정과 정서로 소통하니까.

김기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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