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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쟁명:유주열] 돌궐(突厥)과 오스만제국

한국과 터키 수교 55주년
금년이 한 터키 수교 55주년이 되는 해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서울의 국립박물관에서는 “이스탄불의 황제들” 이라는 터키 문명전이 지난 5월부터 4개월간 성황리에 개최되었고 지금은 부산 박물관에서 이동 전시중이다. 터키는 이슬람국가인데도 6.25 참전국으로 우리에게 형제 국처럼 친근감을 준다. 특히 이스탄불은 과거 터키제국의 오랜 수도로 터키문화의 정수가 모여 있는데다 동서양이 만나는 지리상의 교차로로 터키여행의 백미로 여겨진다. 현지에서 틔르크(Turk)라고도 하는 터키인들은 고대 우리 민족들과 이웃해 살던 중앙아시아 초원의 유목민족이었기에 친근감이 더할지도 모른다. 중국의 서부 타클라마칸 분지를 북으로 싸고 있는 산맥이 알타이 산맥이다. 현지어로 알타이는 황금(알) 산(타이)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알타이 산을 중심으로 하는 기마민족이 황금을 선호하는 것도 이러한 것과 일부 관계가 있는지 모른다.

알타이 산의 고향
알타이 산을 기원으로 하는 민족의 언어를 알타이어계로 분류하는데 틔르크 인은 한국인과 마찬가지로 알타이 계 언어를 사용한다. 고대 중국에서는 틔르크를 음역하여 돌궐(突厥)로 기록하고 있다. 틔르크는 “강인하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돌궐민족은 우리 민족과 함께 수천년 전에는 알타이 산록에서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오늘 날 한국과 일본을 이루는 민족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한반도와 일본 열도로 옮겨 갔지만 가장 용맹한 돌궐 민족은 중앙아시아 초원의 맹주로서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알타이 계의 기마민족은 중앙아시아의 초원을 중심으로 제국을 건설하였는데 흉노제국 돌궐제국 그리고 몽골제국이다. 흉노제국은 기원전 5세기부터 1000여 년간 중앙아시아를 석권한 민족으로 기원전 3세기 전성기를 이루었다고 하나 문자를 남기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무렵 중국을 통일한 첫 황제(秦始皇)가 제일 먼저 한 일이 흉노의 세력으로 부터 비옥한 중국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만리장성”을 쌓은 것을 볼 때 그 세력의 막강함을 추측할 수 있다.

東西 돌궐의 흥망성쇠
흉노제국이 秦을 이어 중국을 통일한 漢과 세력 다툼에 패하여 쇠약해지면서 나타난 것이 돌궐제국이다. 돌궐제국의 활동 지역은 카스피 해의 중앙아시아부터 중국의 동북지방에 걸친 방대한 제국이었다. 7세기 후반에는 방대한 영토를 지배하기 위해 東과 西로 나뉘었는데 동돌궐은 왕(王)이라는 의미의 카간(Kagan)에 의해 통치되고 서돌궐은 부왕(副王)이라는 의미의 야부그(Yabgu)에 의해 통치되었다. 중국의 남북조시대를 통일한 수(隋)를 멸망시킨 당(唐)은 북방의 강대국 돌궐제국과 천하 패권을 두고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唐은 돌궐과 싸움에서 번번이 패하여 돌궐 왕 카간이 좋아하는 백마를 조공으로 바쳐 상호 불가침의 백마지맹(白馬之盟)을 맺었다. 그 후 唐태종 이세민은 이정(李靖)(571-649)이라는 병법의 고수이며 전략의 천재를 등용 돌궐제국의 정벌에 나섰다. 이정은 동돌궐에 의해 천시되어 불만이 높은 서돌궐을 회유 이이제이(以夷制夷)수법으로 동돌궐을 멸망시킬 계략을 찾았다. 630년 초 중앙아시아 초원에 찾아 온 가뭄과 한파로 가축이 몰살되고 민심이 어지러운 때를 틈타 이정은 소수 정예의 기병으로 동돌궐의 심장부를 기습하였다. 이정은 도망가는 동돌궐 카간을 생포 돌궐 제국을 일시 굴복시켰다. 당태종이 “정관(貞觀)의 치(治)”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일시적이나마 북방이 안정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정장군은 후에 위국공(衛國公)으로 봉해지고 당태종의 소릉(昭陵)에 배릉(陪陵)되는 영예도 얻었다. 그러나 동돌궐은 그 후 唐 내정의 혼란을 틈타 다시 독립하였으나(682) 결국 내분에 의해 여러 민족으로 분열되면서 8세기 초 멸망하고 만다.

탈라스 전투와 돌궐의 서진(西進)
天山산맥에서 멀지 않은 알타이산맥의 끝자락의 도시 타슈켄트 인근에는 탈라스라는 강이 흐르고 있다.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서돌궐 족의 일부는 실크로드에 진출하려는 唐의 팽창정책에 위협을 느끼고 사라센의 압바스 왕조에 지원을 요청하였다. 唐은 서역을 놓고 아바스왕조와의 전쟁이 불가피하였다. 고구려 유민출신의 고선지(高仙芝)장군이 지휘하는 唐軍은 751년 7월 탈라스 강 유역으로 진군했다. 그는 일찍이 파밀 고원에 원정하여 티베트 세력을 진압한 장군으로 당시 황제인 현종의 신임을 받고 있었다. 고선지 장군의 휘하에는 동돌궐의 일부였던 카루크(Karluks)족이 우군으로 참전하고 있었다. 결과는 고선지 장군의 참패였다. 전투의 마지막에 기회를 보던 카루크족이 唐을 배반하여 사라센 군대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唐의 수많은 군인들이 포로로 잡혔고 그중 唐의 비밀기술인 제지(製紙)기술자들도 다수 포함 되어 있었다. 그들의 제지기술이 이슬람 세계를 크게 변화시켰다. 당시 이슬람 세계에서는 양피지로 코란을 기록하여 부유한 상류층만이 코란을 볼 수 있었다. 탈라스 전투 이후 종이의 보급으로 코란이 대중화됨으로써 이슬람의 세력이 주변국으로 급속 팽창되었다. 唐의 지배하에 흩어져 살던 동돌궐 후예들은 일부 불교를 믿고 중국에 동화되었다가 그 후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굴기한 몽골제국에 흡수되었다. 사라센 제국의 영역에 살던 서돌궐 후예들은 천산산맥 북서쪽으로 이동하여 카스피 해 및 아랄 해 부근에서 유목민 생활을 영위하였다.

셀주크제국(Seljuq Empire)
10세기 초 카스피 해 북부의 초원에 살던 서돌궐의 일부인 셀주크(Seljuqs)부족은 볼가 강을 건너 흑해 연안과 페르시아(이란)북부로 이동 다신교적 샤마니즘에서 이슬람교(수니파)로 개종하였다. 차츰 페르시아 문화에 동화되면서 용맹하고 강인한 천성으로 아바스 왕조의 용병으로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 후 동쪽의 비잔틴 제국과 협력 페르시아(사산조)의 바그다드를 점령하여 셀주크제국을 건설하고(1040) 아나톨리아반도(소아시아)로 진출을 도모하자 비잔틴 제국은 신흥세력인 셀주크제국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셀주크는 비잔틴 제국의 쇠약함을 기회로 아나톨리아 반도에 진출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지중해 연안의 기독교 성지를 점령하였다. 셀주크 세력의 진출은 그 후 100년간 성지 탈환을 위한 십자군 원정의 빌미가 된다.

청년 “오스만 베이”와 꿈 이야기
1258년 징기스칸이 세운 몽골제국이 페르시아를 점령 이 지역의 셀주크제국을 멸망시킨다. 그해 몽골의 세력이 미치지 않은 아나톨리아의 동북부 지방에 오스만 베이(1258-1326)라는 인물이 태어난다. 그는 아나톨리아에 흩어진 셀주크 틔르크 계의 유민을 흡수 통일하여 대제국을 세우고 스스로 황제(오스만1세)가 된다. 그의 나이 41세인 1299년도였다.오스만1세의 젊은 시절의 꿈 이야기가 유명하다. 오스만은 자신의 멘토이며 마을 촌장(쉐이크)인 에데바리의 딸을 흠모하고 있었으나 신분상 결혼으로 이루어 질 수 없는 사이였다. 어느 날 밤 오스만은 이상한 꿈을 꾸었다. 밤이 되자 둥근 달이 휘영청 떠오르는 데 자세히 보니 촌장의 가슴에서 떠오르고 있었다. 떠오른 둥근 달이 나중에는 자기 가슴으로 지는 것이 아닌가. 더욱 이상한 것은 달이 자기 가슴으로 들어오자마자 큰 나무가 쑥쑥 자라면서 하늘을 뒤 덮었다. 그리고 나무의 뿌리는 네 갈래로 갈라지면서 강물을 이루고 있는데 삽시간에 4개의 강이 형성되었다. 페르시아의 티그리스 강, 유프라테스 강, 에집트의 나일 강 그리고 비잔틴제국의 도나우 강이었다. 그리고 하늘을 뒤덮은 나무의 잎들은 모두 콘스탄티노플을 향하고 있었다. 매우 이상한 꿈을 꾼 오스만은 촌장에게 꿈 이야기를 하자 촌장은 크게 놀라 세계를 제패할 꿈이라고 예언하면서 자신을 딸과 결혼하게 하고 오스만을 도와 제국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오스만제국(Ottoman Empire)의 황제들
오스만이 세운 나라는 그의 꿈처럼 150년 후인 1453년 당시 21세였던 황제 술탄 메헤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 비잔틴제국을 멸망시키고 북아프리카 중근동과 동유럽을 석권한 대제국을 이룬다. 북으로는 우크라이나로부터 남으로는 아라비아 반도의 예멘까지 확대되어 흑해와 에게 해 페르시아 만이 오스만 제국의 내해가 된다. 비잔틴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이스탄불)이 수도가 되었다.서울의 국립박물관에서 전시된 “이스탄불의 황제”들의 유물 중에 가장 인상이 깊었던 것은 술탄 쉴레이만1세의 다야몬드와 황금장식의 반월형 긴 칼이었다. 권력의 상징인 술탄의 칼에는 “이 위대한 칼은 모든 인류의 술탄인 쉴레이만을 지킬 것이다” 라고 새겨져 있었다. 오스만제국이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을 아우르는 3개 대륙에서 620년간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은 이슬람의 정신적 유대에도 있지만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성장한 틔르크(돌궐)의 강인한 군사적 힘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동서 교역을 통한 경제적 이익과 강력한 군사적 기반으로 화려했던 오스만제국도 서서히 쇠퇴하였다. 피터 오톨이 주연으로 나오는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영화에서 순백의 아랍인의 전통의상을 펄럭이면서 백마를 타고 아랍 베두인의 게릴라를 지휘하여 당시 오스만제국의 군수용 기차를 파괴하는 장면이 있다. 일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제국과 동맹하여 영국과 대항하지만 아라비아 반도에서 영국의 정보장교 로렌스가 지휘하는 게릴라전에서 패배하듯 오스만제국은 세계대전에서 패전 연합국에 의해 해체되는 운명에 놓인다.

틔르크(터키)공화국
오스만제국이 패전하자 그리스인들은 승전국의 지원을 받아 아나톨리아 반도에 상륙 옛 알렉산더 대왕이 개척한 그리스 고토를 수복코저 하였다. 아나톨리아마져 빼앗긴다면 틔르크 민족은 중앙아시아 고향으로 돌아 가야하는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틔르크의 아버지(아타 틔르크)로 불리어지는 청년 장교 케말 파샤를 중심으로 청년 틔르크당 대원들이 분연히 일어나 그리스의 침공을 막아 낸다. 케말 파사는 무능한 왕정을 폐지하고 연합국과 로잔조약을 맺어 앙카라를 수도로 하여 틔르크 공화국을 건국한다. 황금 산이라는 의미의 알타이 산에서 발원한 틔르크 민족은 동진과 남진에 실패하였지만 서진은 성공한 셈이다. 민족의 이름 그대로 강인성을 발휘하여 세계 최강의 로마제국의 영토를 차지하여 셀주크제국과 오스만제국을 건설했던 틔르크족이 마지막 남은 영토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새롭게 국민국가를 탄생시킨 것이다. 1923년 10월의 일이었다. 최근 터키에서는 “대정복 1453" 이라는 영화가 만들어져 화제가 되고 있다. 술탄 메헤메트 2세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는 스펙타클 드라마이다. 터키공화국은 한국 인도네시아 멕시코와 함께 세계경제를 리드할 차세대 4마리의 龍(MIKT)으로 자리 매김하면서 경제가 발전하자 과거 오스만제국의 영광을 찾아 국민들에게 틔르크 인으로서 프라이드를 심어주고 있다.

유주열 전 베이징 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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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