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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 속 그 이야기 <32> 서울 정동길

정동길은 정겹다. 덕수궁 돌담을 따라 부드럽게 나 있는 길을 걷다 보면 마음이 평온해진다. 복잡한 도시 한가운데 이런 소소한 산책로가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특히 이맘때면 누렇게 물든 은행나무 잎이 정동 바닥에 쿠션처럼 깔려 걷기에 참 좋다. 한데 19세기 말에서 20세기로 넘어올 무렵 이 정동길은 근대문화의 창구 역할을 했다. 처음으로 자전거가 등장했고 근대적 교육기관이 들어섰다. 최초의 개신교회가 문을 연 것도, 최초의 신문사와 방송국이 생겨난 것도 다 이 정동길에서다. 이 가을 친숙하고 정겹기만 했던 정동길을 낯설게 여행하는 법을 배웠다. 문화유산국민신탁(ntch.kr)이 진행하는 탐방 프로그램 ‘다 같이 돌자 정동한바퀴’가 이야기해 주는 정동길은 단순히 분위기 좋은 가로수 길이 아니었다. 우리네 근대 역사와 문화가 속속들이 박혀 있는 도심 속 보물섬이었다.



단풍 쿠션 깔린 덕수궁 돌담길 … 한쪽 담이 더 짙은 이유는 뭘까요

입동을 하루 앞둔 지난 6일 서울 하늘은 잔뜩 흐렸다. 간간이 비가 내렸고 확연하게 차가워진 바람은 가을의 끝을 알리며 사람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대신 정동의 분위기는 가을비 덕분에 더욱 무르익었다. 촉촉하게 젖은 은행잎이 어우러진 덕수궁 돌담길의 풍경은 한폭의 수채화 같았다.


덕수궁 돌담에 스며든 비운의 역사



정감어린 돌이 모자이크처럼 촘촘히 박혀 있는 덕수궁 돌담은 가을에 가장 아름답다. 단풍과 어우러진 풍광과 발걸음을 뗄 때마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에 완연한 가을을 느끼게 된다.



흔히 중구 정동 덕수궁 일대에 조성된 가로수 길을 ‘정동길’ ‘덕수궁 돌담길’로 부른다. 하지만 공식적인 도로 구분에 따르면 덕수궁 길과 정동길은 엄연히 다르다. 덕수궁 길은 말 그대로 덕수궁의 일정 부분을 따라 가는 길이다. 대한문에서 정동교회 앞 로터리, 여기서 오른쪽으로 덕수궁 돌담을 끼고 미국대사관저 앞을 지나 새문안길에 이르는 구간이다. 정동길은 교회 앞 로터리부터 경향신문사까지 이어지는 길을 말한다.



정동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덕수궁 돌담에도 원조가 있다. 원조 돌담은 대한문 왼편(대한문을 마주보고 섰을 때 방향)으로 서울시립미술관 앞, 로터리 부근까지 둘러선 약 300m뿐이다. 반대편 구세군 중앙회관~영국대사관~대한문으로 이어지는 돌담은 일제가 덕수궁을 분할 매각하면서 원래 있던 담을 헐고 새롭게 쌓아올린 것이다. 유심히 들여다보면 원조 돌담은 좀 더 어두운 빛깔이다. 세월이 더 묻어서일까.



경운궁이라고 불리던 이곳이 덕수궁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1907년이다. 고종이 왕위를 순종에게 내주고는 경운궁에서 말년을 보냈다. 이때 친일파에 휘둘리던 순종은 ‘조용히 덕을 쌓으며 남은 여생을 보내라’는 의미가 담긴 덕수로 궁궐의 이름을 바꾸는 것을 승인했다. 아직까지도 학계와 문화재 관련 인사들이 덕수궁이라는 이름을 경운궁으로 바꿔야 할지 말지를 놓고 치열하게 토론하는 이유다.



덕수궁의 고초는 고종이 죽고 나서부터 본격 시작됐다. 일제는 도시계획을 핑계 삼아 덕수궁을 분할 매각했다. 궁에 있던 건물을 그대로 떼다가 팔고 담을 허물었다. 사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덕수궁은 일제에 의해 망가진 모습이다.



대한문을 바라봤을 때 오른쪽에 있는 돌담이 가장 최근에 만들어졌다. 원래 덕수궁은 지금의 시청 광장까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일제가 태평로(현 세종대로)를 내면서 일차적으로 덕수궁을 축소했고, 1968년 우리 정부가 차로를 확장하면서 지금의 자리로 궁궐 담이 옮겨졌다. 도로 한가운데 외딴섬처럼 있던 대한문은



1970년 지금의 자리에 자리잡게 됐다. 소박하면서도 정갈해 낭만적인 길로만 알았던 덕수궁 돌담길의 이면에는 이런 역사가 숨겨져 있었다.



경기여고 떠난 자리, 텅 빈 선원전 터



1 덕수궁 대한문에는 항상 관광객이 몰린다. 대한문을 지키고 있는 수문장과 함께 사진을 찍기 위해 외국인 관광객이 일렬로 줄을 서기도 한다. 2 아담하게 꾸며 진 정동공원. 높게 솟은 탑이 옛날 러시아 공사관이 있던 자리다.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건물 대부분이 망가졌고 이 탑만 남았다. 3 성공회 서울성당 내에 있는 경운궁(덕수궁의 옛 이름) 양이재. 일제가 덕수궁을 분할 매각할 때 이처럼 건물을 그대로 떼다 판 경우도 많았는데, 양이재도 그때 영국 성공회에 팔렸다. 지금은 주교 집무실로 쓰인다.


단풍과 은행잎을 밟으며 대한문 왼편 돌담을 따라 덕수궁 길을 걸었다. 정동제일교회 앞에서 오른쪽으로 돌담이 꺾어진다. 조금 걷다 보면 언덕길이 나오는데, 이 부근이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이 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태종 이방원은 정릉을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겼고 정릉의 흔적은 정동이라는 이름에만 남았다.



무덤 터였을지도 모르는 이곳에 높다란 담을 두른 철문이 버티고 있는데 바로 이 안에 옛 미국공사관과 주한 미국대사관저가 있다. 1883년에 지어진 미국공사관은 현존하는 미국 재외공관 중 가장 오래됐다. ‘하비브하우스’라 불리는 주한 미국대사관저는 한옥으로, 전 세계 미국 대사관저 중 그 나라의 고유 양식을 따른 유일한 건물이다. 안은 볼 수 없었지만 대사관저에도 단풍이 물들어 가을이 완전히 내려앉은 것을 알 수 있었다.



덕수초등학교 길 건너에는 공터가 있다. 조선 왕들의 초상화를 모신 덕수궁 선원전(璿源殿)이 있던 곳으로 1920년 덕수궁이 축소되면서 사라졌다. 그 위엔 경기여고가 세워졌다. 1986년 미국대사관과 서울시는 을지로에 있는 미 문화원과 이사 예정인 경기여고 부지를 교환한다는 내용의 양해각서를 체결했다. 1988년 경기여고가 강남구 개포동으로 이사를 가면서 빈 공간이 되자 미국은 여기에 대사관 직원들의 숙소를 짓기로 했다.



2001년 말 미국대사관은 중구청에 건축 허가 신청서를 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주거 건물에는 노인정·놀이터가 있어야 하고 주차대수 확보를 해야 한다는 건축법 조항 때문이었다. 대사관은 외교 건물이라고 반발했고, 주택법 개정도 요구했다. 그러던 중에 한 서울시청 공무원의 제보로 이곳이 덕수궁 터였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전국의 40개가 넘는 시민단체가 모여 반대 운동을 펼쳤다. 한·미 간 줄다리기 끝에 공사는 없던 것으로 됐다.



‘선원전 터 지키기’ 시민운동에 참여했던 강임산 문화유산 국민신탁 사무국장은 “가수 서태지도 후원을 했다”며 “주택법과 문화재법이 지켜낸 것도 있지만 사실 그 위에 있는 국민정서법이 있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까지 선원전은 복원되지 않고 빈터로만 남아 있다.



아관파천의 흔적이 남아 있는 정동길



정동길에는 왕복 2차로가, 그 양 옆으로 도보가 좁게 나 있다. 경향신문사로 향하는 길에는 식당과 커피숍이 줄이어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잦다. 평일에는 회사원들이 식사와 산책을 하기 위해 이 길을 많이 찾고 주말에는 데이트를 즐기려 나온 연인들로 가득 찬다.



예원학교 뒤편에는 정동공원이 있다. 공원에서 연결된 계단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하얀 탑에 다다른다. 탑 주변으로는 화단이 꾸며져 있어 언뜻 보면 공원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이곳이 바로 구 러시아공사관이 있던 자리로 조선 말 벌어진 아관파천의 현장이다. 한국전쟁 때 폭격을 맞아 건물은 거의 다 사라지고 3층 높이의 탑만 남았다.



1895년 명성황후가 잔인하게 시해되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은 이듬해 2월 상궁이 타는 가마를 이용해 남몰래 경복궁에서 빠져나왔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해 1년 정도 살다가 1897년에는 공사관과 가까운 경운궁(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공사관 터 옆쪽 덤불 숲에는 덕수궁까지 이어지는 비밀통로의 흔적을 볼 수 있다.



정동 구석구석에 남아 있는 외국 공사관의 흔적은 사실 구한말 서구 열강에 시달렸던 조선 왕조의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구 러시아공사관에서 내려와 향한 곳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여고다. 현재 이화여고 100주년 기념관이 있는 자리에는 손탁호텔이 있었는데, 국내외 귀빈들의 연회장으로 사용된 호텔로 윈스턴 처칠과 종군기자로 활동했던 마크 트웨인도 방문했다고 전해진다. 화려한 사교장이었던 손탁호텔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지금은 표지석이 그 존재를 말해준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내에 있는 101년 된 피아노.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배재중학교에 다닐 때 연습했던 것이다.
이화여고를 지나면 정동제일교회를 만나게 된다. 이문세가 노래한 ‘광화문 연가’에 등장하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이 바로 교회 내 베델예배당이다. 빛 바랜 기둥과 계단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교회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이화학당 학생이었던 유관순 열사가 1919년 바로 이 예배당 지하에 마련된 파이프오르간 송풍실에서 3·1 운동에 필요한 유인물을 작성한 유서 깊은 곳이다.



정동교회 왼편으로 올라오면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이다. 고종이 쓴 ‘배재학당’ 현판,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배재중학시설 연습했던 101년 된 피아노, 김소월 시집 ‘진달래꽃’ 원본 등이 전시돼 있다.



●이용 정보=정동길을 가려면 지하철 2호선 시청역에서 내리면 된다. 문화유산 국민신탁은 매주 토·일요일(12~3월 휴무) 정동 탐방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오후 1시30분 정동극장 앞에서 시작해 약 2시간이 걸린다. 탐방에 참가하려면 사전에 e-메일(nt_heritage@hanmail.net)로 접수시키면 된다. 구 러시아공사관(사적 제253호)에서 시작해 이화여고~정동교회(사적 제256호)~배재학당~서울시립미술관~구세군중앙회관(서울시 기념물 제20호)~덕수궁 선원전 터(사적 제124호)를 지나 예원학교 뒤편에 있는 덕수궁 중명전(사적 제124호)에서 마친다. 02-732-7524.



글=홍지연 기자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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