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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에 채이는 돌도 걸터앉은 난간도 수천년 된 유적이라죠

왕가의 계곡 길목에 서 있는 멤논의 거상
전성기의 룩소르(기원전 1500년께)는 인구가 100만 명이 넘는 대도시였다. 고대 그리스 작가 호메로스(기원전 800~750)의 『일리아드』 『오디세이아』에도 그 화려함이 묘사돼 있다. 시내를 걷다보면 어디까지가 신전이고 어디까지가 주거지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움푹 파인 구덩이를 내려다보면 아직 발굴되지 않은 신전 계단이 드러나 있다. 거리에서 빵을 파는 아이들이 걸터앉아 쉬는 곳도 몇 천 년 전 건축물의 돌기둥이다. 고대 유적의 흔적들이 그야말로 발끝에 차인다. 거대한 야외 박물관이란 표현은 절대 과하지 않다.나일강에 정박한 크루즈에서 내려 거리로 나가니 수염을 기른 마부들이 줄지어 서있다. “카르나크 신전 갑니다.” “박물관 갑니다.” 관광객을 따라다니며 마차 타기를 권한다. 이곳에서 마차는 무법자다. 버스·자동차가 씽씽 달리는 대로에서도 교통신호와 상관없이 달린다. 그러면서도 마부는 여유롭다. 휘파람을 불며 길 가는 사람들과 농담을 주고받는다. 수천 년 유적과 함께 숨쉬고 늙어가는 사람들은 순박하고 여유로웠다.



럭셔리의 어원이 되었다는, 문명 종합세트 룩소르

파르테논보다 수천 년 앞선 카르나크신전



카르나크 신전 안으로 들어서면 저 멀리 하늘로 솟은 두개의 오벨리스크가 보인다. 제3탑문과 제4탑문 사이에 자리잡은 투트모스 1세(작은 것)와 핫셉수트의 오벨리스크다. 오벨리스크에는 태양신에게 바치는 종교적 헌사와 파라오의 생애를 기리는 내용이 새겨져있다.


마차를 타고 10여 분 달리니 뿌연 모래바람 속에 거대한 건물이 보인다. 기원전 1567년께(18왕조)부터 최후의 왕조 프톨레마이오스 시대까지 1000여 년간 증개축을 거듭한 카르나크신전이다. 입구엔 양의 얼굴을 한 스핑크스가 양쪽으로 줄 서 있다. 풍요와 생산의 상징, 아몬신의 모습이다. 안쪽에 들어서면 사진 촬영을 위해 모인 한 무리의 관광객을 만난다. 바로 람세스 2세의 입상 앞이다. 아들 52명을 포함, 100명이 넘는 자손을 남겼다는 람세스 2세는 우리의 광개토왕을 닮은 정복왕이다. 무릎 아래쪽엔 왕비 네페르타리가 파라오 발등 위에 서 있다. 고개를 돌리니 투르모르 1세와 핫셉수트 여왕의 오벨리스크가 우뚝 서있다.



“와우.” 영화 트랜스포머의 무대로 등장한 대열주실에 들어선 한 외국인이 그 크기에 압도당한 듯 소리친다. 높이 23m의 돌기둥 134개가 늘어서 있다. 신전 안 여러 방을 지나 뒤뜰로 가니 허리가 끊긴 채 옆으로 누운 오벨리스크가 반긴다. 그 앞쪽엔 풍뎅이 모양 돌멩이를 올린 석상이 있다. 풍뎅이는 생명의 상징. 이곳에선 ‘스카라베’라고 부른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미라에 이 풍뎅이 반지를 끼워 놓았다. 그러면 언젠가 죽은 영혼이 되살아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석상을 다섯 번 돌면 소원이 이뤄져요.” 가이드가 무슨 비밀처럼 조용히 속삭인다.



풍상에 씻겨간 미남의 얼굴, 멤논의 거상



나일강 서쪽 ‘왕가의 계곡’으로 향하던 버스가 거대한 돌(19.5m) 앞에 멈춰 선다. 멤논의 거상이다. 이 거상은 아멘호테프 3세의 장제전을 지키는 수호자였다.



의자에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서있는 한 쌍의 거인. 이 거상이 멤논이 된 과정이 재미있다. 기원전 27년. 지진 때문에 구멍이 생긴 거상은 아침햇살이 뜰 때면 이상한 소리를 냈다고 한다. 마침 이곳을 지나던 그리스 여행객 중 하나가 아킬레스에게 목숨을 잃은 멤논을 떠올렸다. 멤논은 에티오피아왕으로 트로이전쟁의 영웅이다. “죽은 멤논이 어머니를 부르는 소리 아닐까.” 그의 이야기는 돌고 돌아 전설이 됐고, 실제 로마의 여러 황제와 귀족들이 거상의 목소리를 들으러 이곳을 찾았다고 한다.



2 카르나크 신전 대열주실 한쪽에서 한 소녀가 기둥위로 올라가 뜀뛰기 놀이를 하고 있다. 3 핫셉수트 장제전 3층으로 올라가면 기둥에 등을 대고 서 있는 ‘죽음의 신’ 오시리스 석상이 보인다. 최초의 여성파라오 핫셉수트의 모습을 표현했다고 전한다. 이 장제전은 3층의 테라스식 건물로 독창이고 현대적이란 평가를 받는다. 4 룩소르 전통시장에선 다양한 현지 특산물을 만날 수 있다. 현지 가이드와 함께 이집트 전통 신발가게를 찾았다. 5 카르나크 신전에서 룩소르 신전으로 이어지는 길 양쪽으로 양의 머리와 사자의 몸을 가진 스핑크스가 길게 늘어서 있다. 양은 테베의 수호신 아몬신의 상징.


여성파라오 핫셉수트를 만나다



왕가의 계곡에 들어서니 나지막한 바위산에 폭 안긴 건물이 서 있다. 기원전 1500년에 지어졌다기엔 너무나 현대적이다. 각 층마다 넓은 테라스가 있고 경사로로 연결됐다. 왕위에 오른 어린 아들 뒤에서 섭정하다가 스스로 왕이 된 핫셉수트 여왕의 장제전이다. 장제전은 신을 기리는 신전과 파라오의 장례 행사를 위한 건물이다. 여왕은 여성이 파라오가 되지 못하는 관습을 깨고 왕위에 올랐다. 신권·왕권을 장악한 채 20년간 권력을 휘둘렀던 그녀도 세상의 눈길이 부담스러웠는지 남자 옷을 입고 수염을 붙이고 다녔다고 한다. 1층 한쪽을 차지한 신전 벽엔 색 바랜 그림이 남아 있다. 여왕의 탄생과정과 공적, 당시 이집트와 다른 나라의 교역 모습이 그려져 있다.



혹시 애니메이션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기억할지 모른다. 그림자 동화 ‘프린스 앤드 프린세스’에는 무화과 소년이 나온다. 무대는 고대 이집트. 한 소년이 여왕에게 무화과를 바치자 여왕은 말한다 “맛이 오묘하구나.” 탐욕스러운 관리의 모함에 여왕은 “소년의 목을 치라”고 명령을 내린다. 고귀하지만 오만하고, 우아하지만 잔혹한 그녀. 핫셉수트 장제전을 나오며 그녀의 모습과 만화 속 여왕을 나도 모르게 오버랩시키고 있었다.



빈 무덤 가득한 왕가의 계곡



룩소르 신전 제2 탑문을 지키고 있는 람세스2세 석상.
이집트엔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나는 놈 위엔 도굴범이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고 한다. 특히 이곳에서 도굴범의 활약은 상상을 초월했다. 황금가면으로 유명한 투탕카멘 무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왕릉이 도굴범 손에 훼손됐다. 나무 한 포기 없는 모래 언덕. 사방을 둘러봐도 물 한 모금 구할 수 없는 이 황량한 곳이 60여 명의 파라오가 묻혀 있던 왕가의 계곡이다. 티켓 1장으로 3개의 무덤을 선택해 볼 수 있다. 투탕카멘 무덤 등 이름난 곳은 따로 표를 끊어야 한다. 가파른 계단을 통해 무덤 안으로 들어가니 입구 좌우와 천장이 채색그림으로 가득하다. 파스텔로 그린 수채화를 보는 듯 밝고 아름답다. 경사진 회랑을 지나면 직사각형의 평평한 터가 보인다. 미라가 누워 있던 곳이다. 어느 곳은 실제로 관 모양의 사각 상자가 놓여 있다. 벽엔 죽음의 신 오시리스와 이시스, 파라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곳에 누워 있던 묘 주인공 대부분은 도굴돼 팔려 나가거나 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영원한 삶을 기원했던 파라오의 비극이다.



호텔 윈터팰리스에서 커피 한잔



카르나크신전에서 나일크루즈 숙소로 오는 길목에 빅토리아풍의 호텔이 서 있다. 그 모습이 예사롭지 않아 가이드에 물어보니 1886년 유럽 귀족들을 위해 지은 호텔이라고 한다. 니콜라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이 현직에 있을 때 부인 브루니와 함께 묵어 화제가 됐던 곳이다. 커피숍 ‘로열 바’에 들어갔다. 유럽 저택 거실 모습을 지닌 화려한 방이다. 메뉴판을 들고 온 종업원이 바닥에 깔린 카펫을 가리킨다. “이 카펫은 200년 넘게 사용한 거예요. 아름답죠?” 꽃 무늬가 새겨진 페르시아풍의 색 바랜 카펫이다. 메뉴판을 보니 ‘하워드 카터 커피’가 있다. 가격이 65이집트파운드(약 1만2000원). 메뉴판 다른 커피의 세 배 가격이다. 하워드 카터? 1922년 왕가의 계곡에서 투탕카멘을 발굴해 유명해진 영국 고고학자다. 그가 이 호텔에 장기투숙하며 마셨던 커피란다. 한 모금 마시니 술 냄새가 진하다. 프랑스 코냑과 시나몬 향이 톡 콧등을 친다. 아, 그는 미라 발굴의 힘겨움을 이 독한 커피로 견뎌냈나 보다. 룩소르를 떠날 때 이 호텔에서 맛본 뜨거운 커피가 문득 떠올랐다.



이집트 여행의 백미, 나일강 크루즈



여행을 좋아해 수시로 해외로 드나들던 선배가 “가장 인상 깊었던 여행이 나일강 크루즈였다”며 내게 이집트 여행을 권했다. “배멀미 때문에 자신 없다”는 걱정에 그 선배는 웃었다. 나일강 크루즈를 타보니 그 웃음이 이해됐다. 배는 너무 천천히 움직여 운항 중인지 정박 중인지 분간이 안 될 정도였다. 크루즈는 나일강 남쪽에 위치한 아스완에서 룩소르까지 운행하며 중간중간 유적지에 들른다. 룩소르에서 아스완까지 거꾸로 내려오는 코스도 가능하다. 체류기간(2박3일~7박8일)과 크루즈의 등급에 따라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다(1박에 50~60달러부터 200달러).



크루즈에 올라 방을 배정받았다. 싱글 침대와 TV, 화장실이 딸린 깔끔한 방이다. 창문으로 스쳐 지나가는 다른 크루즈의 모습과 갈대처럼 흔들리는 나일강변 야자수가 보인다. 승무원들은 친절하고, 식당음식은 호텔 뷔페수준. 아스완에서 출발하면 첫 관광지는 필레신전이다. 펠루카라는 이집트 돛단배가 신전으로 안내한다. 죽음의 신 오시리스의 부인 이시스에게 바쳐진 필레신전은 그 모습도 ‘여신급’이었다. 눈부시게 하얀 대리석 돌기둥이 줄지어 서 있고 기둥마다 섬세하게 새겨진 고대 신들의 모습이 가슴을 두드린다.



다시 크루즈로 돌아와 식사를 한 뒤 콤옴보신전으로 향한다. 크루즈에선 밤마다 탑승객을 위한 파티를 연다. 이집트 전통의상이나 이브닝드레스를 차려입고 참석하는 탑승객이 많다. 조용한 걸 원하는 이들은 크루즈 꼭대기로 올라간다. 풀에서 수영을 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밤 풍광에 젖어 사색을 즐긴다. 크루즈는 에드푸신전과 누비아 마을을 순례한 뒤 룩소르에 기착한다.



●여행정보=에티하드항공과 카타르항공 등이 도하, 두바이 등을 경유해 카이로까지 운항한다. 카이로공항에서 룩소르까지 비행기로 1시간, 기차로는 10~12시간 걸린다. 내년 1월 7일부터 대한항공 카이로 직항 노선이 다시 열린다. 비행시간이 12시간으로 줄어든다. 이집트의 햇살은 뜨겁고 그늘은 시원하다. 모자와 선글라스, 긴 팔 셔츠, 넓고 긴 면 소재의 스카프는 필수다. 시장에 가면 쉽게 살 수 있는 다양한 향료와 이슬람 전통차, ‘카르투슈(사진)’도 괜찮은 선물이다. 카르투슈는 왕의 이름을 상형문자로 새긴 타원형 테두리를 말한다. 카르투슈에 딸들의 이름을 새겨 왔다. 은으로 된 펜던트에 9자 정도 새기는 데 140이집트파운드(2만5000원), 시간은 30분 정도 걸린다. 이집트에서만 살 수 있는 특별한 기념품이다. 이집트 관광청(www.myegypt.or.kr) 홈페이지로 가면 더 많은 관광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글=서회란 기자

사진=이집트관광청 한국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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