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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태로운 가족의 출구 없는 절망 고통스러운 3시간20분

막 아침식사를 끝낸 초로의 부부. 포만감을 즐기며 향긋한 시가를 물고 사랑스러운 눈길로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 아직도 부끄럼 타는 소녀처럼 남편의 시선에 얼굴을 감싸며 눈길을 아래로 내리는, 젊음은 지나갔을지라도 여전히 아름다운 아내. 간밤의 짙은 안개를 걷어낸 햇살이 눈부시게 비추고, 무대 한편 식당 쪽에서는 장성한 아들들의 쾌활한 웃음소리가 들려오는 이 부부의 아침은, 비록 어떠한 굽이를 돌아왔을지라도 함께 살아낸 이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평안이어야 하지 않을까. 굳이 그것을 행복이라 부르지 않더라도 삶에는 한 조각의 평안과 안식이 있다는 열망과 믿음은 ‘어깨를 땅에 내리꽂는 고통’이 닥쳐온다 하더라도 그것을 헤쳐갈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니 말이다.

수많은 드라마가 가족들의 이야기를 그리는 것은 바로 그 마지막 열망과 믿음을 가족에 투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진 오닐의 자전적 희곡 ‘밤으로의 긴 여로’는 이 마지막 열망과 믿음이 산산이 부서져 버리는 길고도 긴 여정이다.

고전 해석에 탁월한 구라야마 다미야 연출
지독한 가난 속에서 성장해 비록 부와 명예를 좇아 재능을 탕진했을지라도 이제 삶의 평안을 구할 수 있는 시절에 이르렀건만, 여전히 구빈원에서 죽음을 맞으리라는 두려움을 안고 사는 인색한 아버지. 그토록 사랑했고 그와 결혼하는 것만이 행복이었지만 ‘집’에서 아이를 낳아 기르는 평범한 삶을 원했던 바람과 달리 싸구려 호텔방을 전전하며 아이를 잃고 견딜 수 없는 고통 속에서 모르핀 중독에 빠져들었던 엄마. 채워지지 않는 부모의 사랑이 동생에 대한 악의와 더할 수 없는 사랑으로 분열된 채 스스로를 탕진하는 형. 엄마의 모르핀 중독이 자신의 출생 때문이라는 죄책감과 가족들에 대한 경멸에 절망으로 빠져드는 동생. 이 모든 이야기는 유진 오닐의 가족사 그대로다.

연극의 마지막, 모르핀의 힘을 빌려 남편을 만나기 전, 그러니까 이 모든 고통의 가족 서사가 시작되기 전, 소녀시절로 되돌아가 버린 엄마를 바라보는 가족들의 출구 없는 절망은 오닐 가족의 비극을 그대로 응축한다.

연출을 맡은 구라야마 다미야는 일본신국립극장 예술감독을 7년간 역임한 일본의 대표적 연출가로 ‘고전 명작 희곡의 치밀한 해석과 뛰어난 무대’라는 평가를 첫 한국 무대에서 직접 확인해 주었다.

그는 스타일을 강조하기보다는 캐릭터에 집중해 이 혼돈과 고통의 기나긴 여정에서 사랑에 대한 갈구와 죄책감, 그리고 떨칠 수 없는 증오의 분열을 아프도록 날카롭게 파고든다. 특히 3막에 이르기까지 드라마의 중심에 세워 둔 엄마 메리(예수정 분)는 죄책감과 고통, 연민과 증오의 분열에서 비롯되는 미세한 간극을 적확하게 집어가며 드라마를 이끌어 간다.

가족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다시 모르핀에 손을 댄 메리가 나를 혼자 남겨두지 말라고 매달리면서도 가족들이 모두 떠나버린 휑한 집안에 서서 “그래 사실 내가 원했던 건 혼자가 되는 거였어”라고 말할 때, 이 모순의 무기력한 간극은 비단 그녀의 것만은 아닌 것이다.

위태로운 간극 파고드는 무대디자인
한편 2005년 일본신국립극장에서 공연했던 무대디자인을 재현한 무대 역시 이 위태로운 간극을 파고든다. 높이가 강조된 벽, 위태롭게 매달려 있는 육중한 천장, 무대 정면에서 뻗어 올라가는 계단 등 구조를 강조하는 대신 희곡에 빼곡하게 적어둔 책장 등의 거실 풍경은 무대 안쪽 깊숙이 물려두었다. 역시 높이가 강조된 한 면 전체를 차지하는 거대한 유리창은 시간의 변화에 따라 밖에서 들어오는 빛의 변화를 이 암울한 가족들의 응접실로 끌어들이는데, 옆에서 뻗어나와 무대를 가로지르는 빛은 가족들의 얼굴을 날카롭게 때리면서 가족 비극의 연원을 파고든다.

오닐은 마주하기 두려운 “묵은 슬픔을 눈물로, 피로” 써냄으로써 “깊은 연민과 이해와 용서”를 얻는다. 그건 3시간20분에 이르는 고통에 찬 이야기를 지켜보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이호재, 예수정, 최원석, 서상원 등의 호연에 힘입은 바 크다.
글 김소연 연극평론가, 사진 명동예술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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