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기꺼이 당신 뜻대로

“당신 뜻대로 하겠어요.”
이런 마음이 들었던 적이 있는가? 없다면 불행하게도 당신은 한 번도 사랑이란 감정을 느낀 적이 없다고 고백해야 할 것이다. 사랑이란 감정의 포로가 되는 순간, 황소고집의 사람도 자신의 뜻을 꺾고는 오히려 기쁨을 느끼게 된다. 한마디로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신이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것, 그러니까 평소의 소신이나 가치관, 심지어 종교마저도 기꺼이 내던져 버린다. 그래서 사랑만큼 위대한 감정도 없을 것이다. 의지, 지성, 신념처럼 인간이 자랑스럽게 여기며 쉽게 포기하지 않는 힘도 사랑 앞에서는 구렁이 기어가듯 부드럽게 관철되고 마니까.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스피노자의 통찰이 절실히 필요한 대목이다.

“사랑(amor)이란 외부의 원인에 대한 생각을 수반하는 기쁨이다.”(스피노자의 『에티카』 중에서)
바로 이것이다. 사랑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기쁨의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기쁨은 “인간이 더욱 작은 완전성에서 더욱 큰 완전성으로 이행할 때” 발생하는 감정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니까 무엇인가 결여된 존재가 아니라 더 충만해지는 감정이 바로 기쁨이라는 것이다. 기쁨이란 감정과 사랑이란 감정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척도는, 사랑에는 외부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사랑이란 감정은 특정한 외부 대상을 전제로 하는 기쁨이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보자. 누군가를 만나 과거보다 더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는 기쁨을 느낄 때, 우리는 그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우리는 자신에게 기쁨을 주는 그 사람을 떠날 수도 없거니와 그가 떠나는 것을 방치할 수도 없다. 그가 떠나는 순간, 우리는 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불완전한 존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이제야 알겠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표어가 “당신 뜻대로”인 이유를 말이다. 상대방을 붙잡아 두기 위해 우리는 그가 원하는 것을 가급적 해 주려고 했던 것이다.

하긴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 주는 사람을 어떻게 떠날 수 있다는 말인가. 상대방 입장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해 주는 사람이야말로 기쁨의 대상일 텐데. 펄 벅의 소설 『동풍 서풍(East Wind, West Wind)』의 주인공 궤이란이 동양 여인으로서 자신이 가지고 있던 전통적인 신념과 아울러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전족(纏足)을 버린 이유도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사랑하는 남편이 자신에게 원하는 것은 신여성으로 사는 아내였다. 남편은 서양 의학을 배운 계몽된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서풍을 껴안기 위해 동풍을 버리는 결단이 어떻게 쉬울 수 있을까? 더군다나 궤이란은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어린 시절부터 계속 자기 발을 감싸던 전족을 벗는 순간 말할 수 없는 물리적 고통이 그녀를 괴롭히리라는 사실을.

신기하게도 내외적인 아름다움은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건만, 내 고통은 그의 마음을 움직였어요. 그는 나를 어린아이 달래듯 위로하려고 했어요. 나는 고통에 못 이겨 그가 누구인지, 그의 직업이 뭔지도 잊어버린 채 종종 그에게 매달렸어요. “궤이란, 우리는 이 고통을 함께 견뎌낼 것이오.” 그가 말했어요. “그토록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차마 보기 힘들지만, 이건 단지 우리 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시오. 사악한 구습에 대항한다고 말이오.” “싫어요.” 나는 흐느끼며 말했어요. “나는 오직 당신을 위해 참는 거예요. 당신을 위해 신식 여성이 될 거예요.” 남편은 웃음을 터뜨렸어요. 그러자 그 얼굴도 류 부인에게 이야기를 건넬 때처럼 약간 밝아졌어요. 그것이야말로 바로 내 고통에 대한 보상이었어요. 또 이후로는 이만큼 어려운 일도 없을 것 같았어요.

아! 그러나 궤이란의 사랑에는 어딘지 모르게 서러운 구석이 있다. 그녀는 남편의 사랑을 얻기 위해 그가 원하는 것을 기꺼이 하고 있지만, 남편은 단지 그녀가 신여성이 되기만을 바라고 있다. 남편이 갑자기 궤이란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건, 오로지 그녀가 전족을 풀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이다. 평생 “달라지고 싶다고 꿈꿔 본 적”도 없는 궤이란이 위대한 사랑의 감정에 더 깊이 몸을 담그기로 결심한 반면, 남편의 관심은 여전히 궤이란 그녀가 아니라 의학적으로 왜곡된 그녀의 발을 향하고만 있다.

지금 남편은 아내를 일종의 계몽의 대상으로, 다시 말해 인류애라는 감정에서만 바라보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 지금 남편은 전족으로 상징되는 동풍에 아직도 젖어 있는 아내에게 측은지심을 품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는 신여성 류 부인에게 지어 보였던 똑같은 미소를 궤이란에게도 던질 수 있었던 것이다. 마침내 자신의 뜻대로 궤이란은 미개한 풍속을 버리고 개화의 길을 따랐으니까.

그렇지만 그녀의 남편은 알고 있을까? 진정 불행한 사람은 궤이란보다는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전족을 벗는 순간 궤이란은 자신을 송두리째 바꿀 수밖에 없는 사랑에 몸을 던지고 있지만, 그에게는 자신이 타고 있는 서풍을 버리고 동풍에 몸을 맡길 만큼 강렬한 사랑의 감정이 존재하지 않기에.



대중철학자『. 철학이 필요한 시간』『철학적 시읽기의 괴로움』『상처받지 않을 권리』등 대중에게 다가가는 철학서를 썼다.

도민이 행복한 더 큰 제주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