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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확천금의 꿈’ 안고 만주행… 엘도라도는 없었다

1 만주국 신경(장춘)의 대동광장 정부청사(1934년 1월). 삼천리 1934년 8월 1일호에 소개된 운전기사 정씨는 이곳이 개발되기 전에 인근 땅을 사서 거부가 되었다. 2 일제의 도시개발 이후 대동광장 주위가 변화된 모습. 3 만주국 신경에서 열린 조선 쌀 장려 시식회 장면(1935년 10월). [사진가 권태균]
일제의 위성국(衛星國), 혹은 괴뢰국이었던 만주국의 영토는 130만㎢로 한반도보다 6배나 넓었지만 인구는 3950만 명에 불과했다. 민족별로는 한족(漢族)이 3470만 명이고 만주족이 180만 명, 한인(韓人)이 130만 명이었다. 몽골인이 102만 명이고 일본인은 65만 명에 불과했다. 130만의 한인은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한인 사회는 한인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간도(間島)만이라도 건질 수 없을까를 고민했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만주국 ⑧ 만주에 분 부동산 광풍

동아일보 1933년 11월 1일자는 간도 총영사관의 발표에 따라서 1933년 9월 말 현재 간도 총인구는 57만4000여 명인데 그중 한인은 40만3000명에 이르는 반면 일본인은 2400명으로 0.5%에 불과하다고 보도했다.

만주국 수립 두 달 후 윤화수(尹和洙)는 동광(東光) 1932년 5월 1일호에 ‘간도문제란 무엇인가’라는 논설을 실었다. 윤화수는 간도 용정(龍井)시에 있는 영신(永信)학교 교사로서 이미 1921년에도 간도 용정촌에서 ‘신문화와 간도’라는 강연을 했던 간도지역 전문가였다. 그는 이 글에서 ‘간도의 주인은 누구인가’라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간도는 오로지 조선 사람의 간도라고 주장하는 것이 법리상(法理上) 당연한 귀결이라고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간도에 역사적으로 깊은 인연을 가진 사람도 조선 사람이요, 간도를 개척한 사람도 조선 사람이요, 간도에 사는 사람의 5분의 4가 조선 사람인즉 간도는 사실상 조선 사람의 간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동광 1932년 5월 1일호)”

윤화수는 “간도를 자치령(自治領)으로 하자는 운동과 특수행정구(特殊行政區)로 하자는 운동이 양립하고 있지만 차라리 한 걸음 더 나가서 자유국(自由國) 건설운동을 개시하는 것이 도리어 법리상 또는 사실상 당연한 길”이라고 덧붙이고 있다. 윤화수는 이 글에서 ‘백두산정계비’의 동쪽 국경인 토문강(土門江)의 위치에 대해 “연전에 백두산을 답사할 때 토문이 송화강의 상류인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임을 발견했다”고도 말하고 있지만 일제가 간도를 한인들의 자치국으로 허용할 리는 만무했다. 윤화수가 ‘정치적으로 불만을 가진 사람도 간도로 많이 찾아왔기 때문에’ “한때 간도가 배일(排日)운동의 책원지(策源地)가 되어 있었다”고 인정한 대로 간도는 배일운동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밀무역·금광·부동산으로 만주 경제 들썩
일제의 고민은 따로 있었다. 만주국은 오족협화(五族協和)를 내세워 일본인, 한족, 만주족, 한인, 몽골인의 공동번영을 추구한다고 표방했지만 주도권은 일본인에게 있어야 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대로 일본인의 숫자가 극히 적었다. 그래서 관동군은 1936년 5월 20년간 100만 호, 즉 500만 명의 일본인을 만주로 이주시키겠다는 ‘만주 농업이민 100만 호 이주(移住)계획안’을 만들었다. 1936년 3월 출범한 히로다(廣田弘毅) 내각은 이를 ‘7대 국책사업’의 하나로 채택하고 20억원의 예산까지 배정했다.

그럼에도 일본인의 만주 입식(入植)은 저조해서 식민정책 자체가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반면 한인들은 만주로 몰려들고 있었다. 김경재는 삼천리 1932년 5월 15일호의 ‘동란(動亂)의 간도에서’라는 기행문에서 만주국 수립 직후 간도의 여관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간도에는 어느 여관이나 손님이 만원이다. 살풍경의 전지(戰地)의 위험한 지역에 여관마다 손님이 만원이라면 놀라운 일이다. 그들은 일확천금을 꿈꾸고 총알이 날고 창칼이 교차하는 간도이건만 머리를 싸매고 찾아온 것이다”

일제의 경제 수탈, 대공황, 농촌의 과잉인구 문제 등으로 빈사상태에 빠진 식민지 한인들에게 만주는 일종의 식민지 모순의 배출구이자 엘도라도로 여겨졌다.
동아일보는 1932년 4월 21일자에 “만주에 신국가가 건설되자 안동세관의 관대한 취체를 기화로 각종 밀수출로 일확천금한 갑부가 우후죽순으로 늘어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삼천리 1934년 8월 1일호는 트럭 기사에서 금광 발견을 거쳐 만주 특수(特需)로 거부가 된 운전기사 정씨의 사례를 실어서 독자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1932년 겨울 정씨는 공주에서 짐을 싣고 대전으로 향하다가 내리막길에서 펑크가 났다. 정씨는 “하도 갑갑해서 무심히 손에 쥐었던 자동차 기계를 가지고 땅을 뒤졌는데, 이상한 소리 나는 돌멩이가 묻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호주머니에 감추었는데, 공주의 일본인에게 물어보니 ‘만분대(萬分臺)에 미치는 금석(金石)’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정씨는 이 금광 채굴권을 출원한 지 한 달도 못 돼서 규슈(九州)의 광업(鑛業)회사에 67만원에 팔았다. 정씨는 이 돈을 들고 1933년 만주국 수도 신경(新京:현재 長春)에 도착해 ‘신경 시가지계획도(市街地計劃圖)’를 사서 시가지와 그 부근 땅을 사들였다.

“만주국에 황제가 등극하고 만주국 기초가 점점 잡혀가고 국도(國都) 건설사업이 일취월장함에 땅값은 자꾸 오른다. 어제 십 전짜리가 오늘은 이십 전, 내일은 삼십 전이라 하고, 어떤 것은 산 값보다 삼사 배가 더 오르고, 어떤 것은 열 배가 오른 것도 있어서 그래 육십만원을 던지고 산 땅이 지금 아무리 싸구려로 마구 두드려 팔아도 그 오 배인 삼백만원의 가치는 간다고 한다.(삼천리 1934년 8월 1일호 )”

1934년 5월경 쌀 1석(160㎏) 가격이 22원 30전이었다. 이를 현재 10㎏당 2만5000원 정도로 환산하면 300만원은 400억원 이상 되는 거금이었다. 물론 땅값으로 환산하면 천문학적 액수가 될 것이다. ‘물건을 운반해 주어야 삯전을 받아서 떨고 있는 처자에게 저녁밥 짓게 할 수 있었던 처지’의 정씨는 2년 만에 거부가 된 것이다.

사회주의자였던 김경재도 앞의 글에서 “(한족이 파는) 토지를 사서 조선은행(朝鮮銀行)이나 동척(東拓:동양척식회사)에 저당 잡히면 다시 그만한 돈은 활용할 수 있고 소작료만 가지고도 은행이나 동척의 연부(年賦:빚을 해마다 갚아 가는 것)를 치르고도 남는다”고 분석했을 정도니 만주 부동산 붐이 이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부동산 광풍의 수확은 특수한 소수가 차지하기 마련이고 나머지 만주행은 대부분 가난한 소작농들이었다. 사회주의자 김세용(金世鎔)이 그 처남 이여성(李如星)과 함께 집필한 숫자(數字) 조선연구 제1집(1931)에는 식민지 조선의 온갖 통계표가 기록돼 있는데 1928년 농가 호수 300만 가구 중에 지주가 10만4000 가구, 자작(自作)이 51만 가구, 자작 겸 소작이 89만4000 가구, 소작이 125만 가구로서 자작 겸 소작과 순수 소작 비율이 75%에 달했다.

일제의 농촌 수탈기구였던 동양척식회사의 1927년 한국 내 소유 농지는 6만9203정보(町步:1정보는 3000평)로서 무려 2억7600만여 평에 달했다. 일제에 토지수탈을 당한 결과 대다수 농민들의 처지는 생계 자체가 어려운 정도였다.

관동군, 한인 이주 연간 1만 호로 제한
농민(農民) 1933년 신년호는 ‘갈 곳 없는 소작인’이란 시에서, “이 세상엔 갈 곳 없고 원통한 사람 너무나 많다/ 심고 김매고 거두고 타작까지 하고서/ 헐벗고 굶주리는 무리 너무나 많다”라고 읊고 있다. 바로 이런 소작인들이 만주로, 만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농민(農民) 1933년 신년호에는 ‘이향(離鄕)의 루(淚)’, 즉 ‘고향 떠나는 눈물’이라는 시가 실려 있는데 “아-고향을 떠나 외로이 걸어가는 나의 신세여/ …/ 아-나는 간다. 이 발길 닿는 곳/산 넘고 물 건너 살 길의 성공탑까지”라고 읊고 있듯이 농토 없는 고향을 떠나 만주로 몰려들었다.

반면 중국인들은 만주국 수립 이후 만주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김경재는 동란의 간도에서에 “최근의 간도는 지가(地價)가 하락했다. 간도 용정 부근의 옥토 하루갈이(一日耕:성인 남성이 하루에 경작할 수 있는 땅)가 비싼 것은 400원이었지만 40원까지 폭락했다”고 전하고 있다. 산동(山東), 하남(河南) 등지에서 온 중국인 지주들이 시국은 어지럽고 안녕과 질서는 당분간 보장될 길이 없고 일본군이 출병하니 땅을 팔아가지고 관내(關內)로 돌아가기 때문에 땅값이 폭락했다는 것이다. 관내(關內)란 중국인들이 자민족의 영토로 여겼던 만리장성 동쪽 끝 산해관(山海關) 남쪽을 뜻한다.

중국인 지주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해주던 동북 군벌이 쫓겨 가고 만주국이 들어서자 땅을 헐값에라도 팔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식민지 한인들에게 중국인들이 남기고 간 토지가 새 삶의 터전이 될 것 같지만 이 또한 천만의 말씀이었다. 1936년 관동군의 지시에 따라 1937년 만주국 이민사무처리위원회(移民事務處理委員會)에서 한인들의 만주 이주를 연 1만 호(戶)로 제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인들이 개척할 수 있는 지역도 간도성(間島省)과 동변도(東邊道)의 23개 현으로 제한했다. 일본인 이주민들에게 좋은 농경지를 먼저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식민지 치하의 한국이 그랬던 것처럼 일제 치하의 만주국도 한인들에게 엘도라도가 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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