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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살아남았다, 예술을 하기 위해

모스크바 노보데비치 수도원의 쇼스타코비치 무덤. 손열음씨가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 참가했을 때 직접 촬영한 사진이다. 비석 아래부분에 DSCH 모티브 악보가 새겨져 있다. 이름(D)과 성(SCH)의 첫부분을 연결해 만든 암호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누군가를 만나 음악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가 말이 좀 통한다 싶으면 나도 모르게 묻는 질문이 있었다. “슈베르트가 더 좋아, 슈만이 더 좋아?” 답이 전자라면 음악 자체가 더 좋은 사람, 후자라면 그 시정(詩情)에 더 탐닉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비슷한 맥락의 한 가지가 더 있었다. “그럼 프로코피예프가 더 좋아, 쇼스타코비치가 더 좋아?” 사실 웃기는 거다. 슈베르트와 슈만, 프로코피예프와 쇼스타코비치 네 사람 모두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곡가들이라 나야말로 누구를 더 좋아한다고 말하기 힘들다. “그래도 꼭 한 사람만 남아야 한다면 누굴 택하겠어?” 집요하게 던지는 질문에 프로코피예프라고 답한다면 나는 그 사람이 ‘미’를 더 추구하는 사람, 쇼스타코비치라고 한다면 ‘진’에 더 다가가는 사람이라는 선입견을 가져버리곤 했었다. 하지만 아직도 나의 이 섣불렀던 판단이 완전히 틀렸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동시대에 같은 곳에서 태어나 얼핏 비슷한 음악적 언어를 구사한 것처럼 보이는 두 사람은 실은 삶에서 음악까지 모든 것이 하나부터 열까지 달랐으니까. 어찌됐든 누군가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답하기 괴롭기는 하겠지만 내 대답은 쇼스타코비치다.

[하노버에서 온 음악 편지] 쇼스타코비치를 위한 변명

바흐 시대의 키워드가 종교, 베토벤 시대가 자유, 슈만 시대가 사랑이었다면 쇼스타코비치가 살았던 20세기 초반의 키워드는 이념이었다. 전쟁을 양산한 이데올로기의 소용돌이 속에 예술은 처음으로 제대로 난도질당했다. 레닌이 죽고 스탈린이 소비에트 연방을 막 출범시켰을 당시 청년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제1번’ 등으로 국내외에서 명성을 쌓아가고 있었다.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처음으로 봉착한 난관은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에 대한 당의 비판. 쥐도 새도 모르게 숙청당한 인물이 3000만 명에 육박하던 살얼음판 속, 처남과 장모도 잡혀 들어간 쇼스타코비치는 스트라빈스키나 프로코피예프 같은 선배들처럼 자유를 찾아 망명하는 대신 조국에 남아 정면돌파를 시도한다. (당의) ‘정당한 비평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현실적이고도 창의적인 답변’이라며 1937년 발표한 ‘교향곡 제5번’은 다행히 스탈린과 당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가까스로 숨을 돌린 그의 인생은 히틀러가 레닌그라드를 장장 900일 동안 포위하던 바로 그때 가히 대반전을 맞이한다. 희생자가 100만 명에 달해도 쥐를 잡아먹으면서까지 끝끝내 굴복하지 않던 레닌그라드 시민 중에는 쇼스타코비치도 있었다. 훗날 친구 이삭 글리크만에게 “사람들은 내가 라벨의 ‘볼레로’를 베꼈다고 하지 않을까? 하여간 내 귀엔 전쟁이 딱 이런 식이니까”라고 했다는 교향곡 제7번 ‘레닌그라드’의 1악장은 30분 동안 처음부터 끝까지 크레셴도(점점 세게)의 구성으로 되어 있다. 이 ‘역사적 작곡’으로 결국 타임지 표지(작은 사진)까지 장식한 그는 인민의 승리에 이바지한 영웅으로 ‘스탈린 상’까지 받게 되었다. 그러나 히틀러가 당도하기 전 이미 이 곡의 작곡에 착수했다는 설, 스스로 ‘스탈린이 이미 망쳐 놓은 레닌그라드를 히틀러가 완전히 파괴하려다 실패한 이야기를 적은 것’이라고 일갈했다는 설 등으로 보아 인민의 사기를 고취시켰다는 당대의 평가가 쇼스타코비치 본인에게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희극적 비극에 불과했을지 모른다.

반강제로 인민의 음악가가 된 그의 인생은 나치의 선전용 음악으로 십분 활용된 베토벤의 ‘9번 교향곡’처럼 인민 화합을 꾀하는 대작을 원했던 스탈린에 의해 또 한 번 박살 난다. 마치 하이든의 중기 교향곡처럼 장난스럽게 시작해 갖은 풍자와 해학을 일삼은 ‘교향곡 제9번’을 바치자 지다노프는 ‘타락한 부르주아의 형식주의를 추종한다’며 열띤 비판을 가했다. 결국 스탈린을 찬양하는 인민 영화음악이나 담당하는 신세가 된 쇼스타코비치가 다시금 부활을 꾀한 작품이 오라토리오 ‘숲의 노래’. 독재자를 위대한 정원사로 묘사한 이 작품으로 그는 다시 한 번 스탈린 상을 꿰찼다. 이 지긋지긋한 생존에의 몸부림은 스탈린이 죽고 나서 비로소 종결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1960년, 동독 드레스덴에서 사흘 만에 쓴 ‘현악사중주 제8번’을 흐루쇼프 정권이 파시즘과 전쟁에 희생된 사람들에게 헌정하도록 지시하자 쇼스타코비치는 일평생 그래 왔던 것처럼 당의 요구에 부응한다. 물론 훗날의 그는 “이 곡이 대체 파시즘과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이건 그저 내 이야기일 뿐”이라고 했다지만.

이쯤 되면 이념의 시대를 살다 간 이 예술가의 이념은 무엇이었을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체제를 겁 없이 비판하다가도 목숨을 부지하려 타협하고, 그러다가도 다시 맹렬히 저항한 그가 살기 위해 예술을 했고, 또 예술을 하려고 산 것만은 틀림없다. 중기 작품부터 거의 모든 곡에 등장하는 D(레)-S(미플랫)-C(도)-H(시) 모티브는 그 몸부림 속에 오롯이 남은 자아다. 프로코피예프의 음악이 영원히 깨지 않을 꿈속에 박제된 최후의 낭만이라면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그냥 그 순간 그 참혹한 현장들이었다. 어차피 진실이 실종되어 버린 사회에서 그에게 유일한 진실이란 죽지 않고 사는 것, 그리고 그 삶 너머의 음악뿐이 아니었을까.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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