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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대주의 맞서 이스라엘 건국 토대 닦다

기원 후 70년에 있은 1차 유대-로마전쟁에서 예루살렘은 로마군에 함락됐다.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에 주피터 신전을 건립해 유대인들에게 굴욕을 주었다. 유대인의 반로마 감정은 고조됐다. 132년 시몬 바르 코크바를 영도자로 2차 대로마 항쟁을 벌였다. 134년 로마는 브리타니아 정예군을 투입해 유대인 봉기를 진압했다. 코크바는 자결했고 그를 따르던 유대인 60만 명이 몰살당했다. 로마는 예루살렘을 아일리아 카피톨리나, 유다 지역을 시리아 팔레스타인으로 각각 명칭을 바꿨다. 남은 유대인은 인근 지중해 국가로 흩어졌다. 2000여 년에 걸친 유대인 디아스포라(이산)의 시발점이다.

[박재선의 유대인 이야기] 근대 시온주의 태두 테오도어 헤르츨

유대인들은 세계를 유랑하면서 언젠가는 ‘약속의 땅’에 돌아가 독립 국가를 만든다는 꿈을 키웠다. 유대인의 자결을 위한 민족해방운동인 시온주의다. 18세기 후반 독일 유대인 철학자 모제스 멘델스존이 주창한 ‘하스칼라’(유대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시온주의는 잠시 주춤했다. 하스칼라는 유대인들에게 거주국에서의 동화와 융합을 촉구한 것이어서 시온주의와는 배치되는 사상이다.

그러다 시온주의를 일깨우는 계기가 있었다. 하나는 1895년 프랑스에서 있은 ‘드레퓌스 사건’이다. 유대인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가 간첩 누명을 쓰고 남미 오지로 유배당한 대표적 반유대주의 사건이다. 다른 하나는 19세기 말 제정 러시아의 유대인 탄압인 ‘포그롬’이다.

유대 계율 잘 따르지 않던 세속 유대인
테오도어 헤르츨(사진)은 근대 시온주의의 태두다. 그는 1860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절 부다페스트 근교 페스트에서 태어났다. 18세기 세르비아에서 이주해온 유대인 가계다. 헤르츨은 유대인 소년이면 누구나 하는 성인식(바르 미츠바)도 거치지 않았다. 자유분방한 성격의 헤르츨은 율법과 예식을 잘 따르지 않는 세속적 유대인이었다.

18세 때 가족 모두 빈으로 옮겼다. 헤르츨은 빈 법대에서 법학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율사가 생리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극작가와 신문기자 생활을 했다. 1891~96년 오스트리아 일간지 NFP의 주 파리특파원을 지냈다. 헤르츨은 파리에서 ‘드레퓌스 사건’을 집중 취재했다. 그는 지성인의 나라를 자부하던 프랑스에서도 반유대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데 대해 크게 놀랐다. 거리의 시민들이 “드레퓌스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치는 것을 목격한 그는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헤르츨은 이제 유럽에서 반유대주의가 소멸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는 버려야 함을 인식했다. 그래서 그는 생각을 바꿔 이 시기부터 시온주의 기수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는 유대인이 유럽 각국에 동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유대인의 생존권 확보를 위해선 팔레스타인 땅에 귀환해 유대 국가를 건설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안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근대 시온주의의 교본으로 불리는 유대 국가(Der Judenstaat)를 집필, 출간했다. 유럽 각국 지도자들을 설득해 유대국가 건설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영국 유대인 금융가 로스차일드 남작과 프랑스 유대인 부호 모리스 드 이르쉬 등에게 팔레스타인 지역 토지 매입을 위한 유대 정착기금에 재정 지원을 요청했다. 로스차일드 남작은 1882년부터 팔레스타인 지역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했다.

헤르츨의 노력으로 1896년 스위스 바젤에서 제1차 시온주의 지도자 총회가 열렸고 그는 초대 의장에 선출됐다. 헤르츨은 유럽 각국 유력 인사와 접촉을 계속했다. 영국 식민지장관 조셉 체임벌린(훗날 총리)과 교황 피우 10세 등이다. 교황은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독립국가 창설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유럽의 오랜 골칫거리인 유대인을 한 지역에 모으는 데 대해선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당시 팔레스타인을 통치한 오스만 터키 군주 술탄 압둘라미드 2세도 만나 유럽 유대인의 팔레스타인 이주 허가를 요청했다. 헤르츨은 1898년 예루살렘을 방문해 지리를 살펴보기도 했다. 그런데 영국이 돌연 특이한 제안을 해왔다. 팔레스타인 대신 당시 동부아프리카 영국 식민지 우간다를 유대국가 창설지로 제의했다. 이 안은 1903년 제 6차 시온주의 총회에서 정통파 종교지도자들의 반대로 표결에서 부결되었지만 헤르츨도 잠시 이 우간다 안에 솔깃한 적이 있었다.

건국 45년 전에 심장병으로 사망
인생 후반기를 시온주의에 바쳤던 헤르츨은 1904년 7월 오스트리아 남부 에들라히에서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자신의 사후 유대국가가 수립되면 자신과 가족을 예루살렘으로 이장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유언대로 이스라엘 건국 다음해인 1949년 그와 그의 부모 그리고 아들·딸 모두 예루살렘 헤르츨산 국립묘지에 묻혔다. 이스라엘은 헤르츨을 이스라엘 건국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해 관공서 청사에 그의 초상을 걸어놓고 있다.

이스라엘 건국은 시온주의의 성취다. 그런데 이웃 아랍 진영에선 시온주의의 역사적·인종적 정통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헤르츨과 같은 시온주의 지도자나 이스라엘 건국 초기의 주체 세력은 이 지역과는 역사적·인종적 연고가 없는 동유럽계 아시케나지라는 점에서다. 유대인 디아스포라가 시작된 서기 2세기엔 셈족계 유대인만 있었다. 아시케나지는 7세기 이후 다양한 유럽 민족의 혼혈로 이뤄진 유대교 종교 공동체이므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연고권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스라엘 인구의 절반이 셈족계 세파라디이므로 아랍권의 논리를 반박할 근거는 있다. 그러나 2000여 년간 이 지역에서 살던 아랍인들에겐 시온주의를 내세운 이스라엘 건국과 아랍인의 축출은 황당할 수밖에 없다. 또 3대 유일신교의 공동 성지인 예루살렘의 지위 문제도 커다란 숙제다. 이래저래 중동 문제의 평화적 타결은 요원하기만 하다.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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