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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원이 푸대접한 장제스, 마흔 돼서야 국민당 중앙위원

자신의 모습이 전면에 실린 영국 신문(LONDON NEWS)을 들고 자랑하러 온 장제스에게 차를 대접하는 쑹메이링. 1926년 봄, 쿵샹시의 집 정원. [사진 김명호]
1963년 11월, 장제스는 타이완의 총통부에서 대륙 시절을 회상한 적이 있다. “스물한 살 때 입당했다. 6년이 지나서야 단독으로 총리(국민당이 정한 쑨원의 공식 직함)의 부름을 받았다. 끊임없이 질책과 훈계를 받으며 임무를 수행했지만, 그 어떤 직책도 요구한 적이 없다. 총리도 나를 번듯한 자리에 임명하지 않았다. 40세가 되어서야 중앙위원에 피선됐다.” 쑹메이링과의 중매를 부탁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93>

쑨원의 장제스에 대한 평가는 죽는 날까지 변하지 않았다. 처제 쑹메이링에게 장제스를 신랑감으로 추천한 후에도 변변한 지위나 발언권을 주지 않았다. 생도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황푸군관학교 교장으로 파견한 게 고작이었다. 군권(軍權)을 안겨주는 계기가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 점은 장제스도 마찬가지였다.

후일, 중공 총리 저우언라이는 군관학교 교장 시절의 장제스를 평한 적이 있다. “우리의 상대는 국민당이었지만 구체적으로 말하면 장제스 한 사람이었다. 황푸군관학교에서 장제스를 2년간 모신 적이 있다. 장제스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총명하고 매사에 능했다. 천박한 구석이 한 군데도 없으면서 정치적 수완이 뛰어났다. 재물에도 관심이 없었다. 단, 재물을 탐하지 않는 사업가는 자격이 없다며 경멸했다. 원천이 궁금했다. 알고 보니 독서량이 엄청났다. 자본론과 공산당 선언 등 섭렵하지 않은 사회주의 서적이 거의 없었다. 내로라하는 공산당 이론가들보다 더 해박했다.”

1924년 1월, 광저우에서 국민당 1차 대표자 대회가 열렸다. 회의를 주재한 쑨원은 3년 전 상하이에서 창당한 중공과의 합작을 선언했다.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입당한 청년 공산당원 리리싼과 마오쩌둥이 쑨원의 주목을 받았다. 리리싼은 단도직입적으로 국민당의 언론정책을 비판했고 마오쩌둥은 쑨원의 사상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폈다. 기쁨을 감추지 못한 쑨원은 마오쩌둥을 당장(黨章) 심사위원과 후보 중앙위원에 추천했다.

장제스의 신세는 처량했다. 대표로 파견되기는커녕 대회 입장권도 받지 못했다. 회의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회의 참석자들이 쉬는 시간에 나누는 얘기나 엿듣는 정도였다. 쑨원 사망 4개월 후인 1925년 7월 1일, 중화민국 국민정부가 광저우에 간판을 내걸 때도 형편은 바뀌지 않았다. 중앙당 상무위원이나 국민정부위원은 고사하고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에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후보위원에도 이름이 없었다.

쑹메이링도 냉담했다. “편지 주고받는 사이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는 사람이 편지 보내도 답장이 없었다. 뭐가 그렇게 바쁜지 전화도 받지 않았다. 한밤중에 전화하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응대하기 일쑤였다. “예의가 없어도 정도가 있지 지금이 몇 신지 아느냐. 새벽 2시다. 전쟁터도 아니고 뭐 하는 짓이냐.” 그럴 때마다 “이 짓이 전쟁보다 더 힘들다”며 수화기를 내려놨다. 그러곤 후회했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쑨원을 믿은 게 잘못이었다.

쑨원은 “쑹메이링과의 결혼이 가능하겠느냐”고 물을 때마다 똑 같은 말만 반복했다. “기다려라. 기회가 올 때까지 서두르지 마라.” 그러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 일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장제스는 국가 최고지도자가 된 후에 “무조건 기다리라”는 말을 부하들에게 함부로 하지 않았다. 당장 결론 내리기 힘든 일은 날짜를 정해 주고 약속한 날이 되면 통보해 주곤 했다.

쑨원이 세상을 떠나자 장제스는 승승장구했다. 쑹메이링과의 관계도 조금씩 호전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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