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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 속으로] 도시농부 70만 … 애그리테인먼트 전성시대

뒤로는 한새봉이, 앞으로는 아파트 단지가 둥글게 품고 있어 아늑한 느낌을 주는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의 개구리논. 개구리논은 9~11월 두 달간 ‘2012 광주비엔날레’의 시민 참여 프로그램 전시장으로 바뀌었다. ‘농(農)의 미학’을 주제로 한 전시회에서 아이들이 만든 허수아비와 솟대, 한새봉 개구리논의 사계절을 담은 사진과 예쁜 바람개비, 논둑에 있는 간이화장실 등이 모두 ‘작품’이 됐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줄줄이 늘어선 고층 아파트와 새로 건설 중인 원룸들, 작은 학교와 아파트촌 끝으로 낮은 산자락이 이어지는 광주광역시 북구 일곡동. 여느 지방도시와 다르지 않은 이곳을 특별하게 만든 것은 마을 사람들의 공동경작지인 개구리논이다. 반달 모양의 땅이 겹겹이 붙어 있는 2645의 논을 마을 주민 80여 가구가 함께 일군다. 황소가 누워 있는 것 같다고 해서 한새봉(황쇠봉)이라고 불리는 산이 논을 둥글게 품고 있다. 논밭이던 일곡동 땅이 개발 바람을 타고 아파트와 원룸으로 우후죽순 바뀌어 갔지만 한새봉과 그 안의 개구리논만큼은 그대로였다.

아파트 80가구 주민들 개구리논 공동 경작 … “작년 1200kg 수확했어요”



 추수를 며칠 앞둔 23일. 개구리논에는 올여름 두 번의 태풍과 지난 토요일의 폭우를 이겨낸 벼들이 고개를 숙인 채 서 있었다. 누렇게 익은 벼들 사이에는 주민들이 만든 허수아비 부부가 논을 찾는 이들을 반겼고 아이들이 만든 색색의 바람개비들은 가을바람을 타고 쉴 새 없이 돌고 있었다.



 일곡동 주민들이 개구리논 공동 경작을 시작한 것은 2008년. 처음엔 30가구가 모여 재미로 시작한 논농사가 4년 만에 80가구가 참여하는 사업으로 확대됐다. 함께 농사짓는 사람들의 모임을 지칭하는 ‘한새봉두레’도 만들었다. 농약을 쓰지 않는 친환경 농법을 고집했고 손으로 씨를 뿌리고 김을 매는 ‘손농사’로 지난해 1200㎏의 쌀을 거뒀다. 한새봉두레는 어느덧 주중엔 직장 생활을, 주말엔 농사일을 하는 광주 일곡동 ‘도시농부’들의 터전이 됐다.



주5일제 정착, 안전한 먹거리 수요도 한몫



탈곡기에 벼를 갖다대자 낟알이 후드득 떨어진다.
 주5일제가 정착돼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자연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도시 지역의 공간을 활용해 작물을 재배하고 텃밭을 가꾸는 도시농업이 활성화되고 있다. 농림수산식품부에 따르면 지난해 도시농업에 참여하는 국내 인구는 70만 명에 달한다. 도심에 사는 사람들이 직접 작물을 기르고 수확하는 즐거움을 찾기 시작하면서 주말농장은 물론 건물 옥상이나 아파트 베란다의 자투리땅에도 먹거리를 심는 도시농부들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유치원을 비롯한 초·중·고등학교들도 학교 내 부지에 텃밭을 조성하고 있다. 가히 도시농부들의 전성시대라 할 만하다. 경쟁에 지친 이들이 마음의 휴식을 얻고 여가 차원에서 농업에 빠져든다는 뜻에서 농업(agriculture)과 오락(entertainment)을 결합한 ‘애그리테인먼트’라는 말도 등장했다.



 한새봉두레의 농사도 ‘재미있는 것’을 찾다가 시작됐다. 한새봉 일대에 서식하는 생물종과 개체수를 세고 기록하는 주부모임인 ‘한새봉 숲사랑이’ 회원 중 한 명이 “농사지으면 재밌을 것 같은데”라고 얘기를 꺼낸 게 공동경작의 시발점이었다. 50여 년간 한새봉 아래 논에서 농사를 짓던 노현채 할아버지가 병으로 쓰러져 논을 돌볼 수 없게 됐다는 소식을 들은 회원들이 할아버지를 찾았고, 2008년부터 그 땅을 대신 일궜다. ‘개구리가 뛰어노는 건강한 논이 돼라’는 의미로 이름도 개구리논이라고 붙였다. 아이들에게 숲과 논밭, 자연에 대해 설명하는 개구리교실도 함께 열기로 했다. 엄마들이 개구리교실 선생님으로, 농사에 잔뼈가 굵은 박복규(81) 할아버지가 개구리논의 총책임자로 결정됐다.



 한해 두해 지나면서 회원이 급속도로 늘었다. 농사에 목마른 사람이 생각보다 많았다는 얘기다. 3년째 농사를 지어온 한새봉두레 이영석(39)씨 가족도 그중 하나다. 10여 년간 문구 도매업을 해오며 평생을 도시에서만 살던 이씨에겐 농촌 생활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아이들도 자연에서 뛰놀게 해주고 싶었다. 때마침 한새봉두레의 모집 공고를 보고 문을 두드린 이씨 가족은 개구리논을 만나면서 열혈 도시농부로 돌변했다.



탱글탱글 살이 오른 벼에 앉아 있는 메뚜기
 개구리논에서 5분 거리인 청솔아파트에 사는 이씨의 하루는 논에서 시작돼 논에서 마무리된다. 새벽 5~6시부터 한새봉을 산책한 뒤 논에 들어가 눈에 띄는 잡초를 솎아내다 보면 어느새 동이 튼다. 퇴근 후에도 지친 몸을 이끌고 논을 찾는다. 아들 주원(9)이는 이미 논에서 신나게 놀고 있다. 친구인 현중(10)이와 상윤(10)이도 자전거를 논두렁에 팽개치고 여기저기 뛰어다닌다. 이씨도 바지를 걷은 채 주원이와 함께 논에 발을 담그고 벌레를 잡으며 논다. “하루가 다르게 부쩍 크는 벼와 아들을 번갈아 보면 긴장이 풀리고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느낌”이라는 이씨는 삶에 지칠 때마다 논에 안기곤 한다.



 농촌 생활을 해본 적 없는 부인 박나영(38)씨도 개구리논에 푹 빠졌다. 처음엔 논을 좋아하는 아이 손에 이끌려 따라다니던 박씨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더 열심히 논을 찾는다. 처음엔 ‘왜 이런 힘든 일을 할까’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뜨거운 햇볕 아래에서 땀 흘리며 일하고 나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논에 대한 공부도 많이 해 지금은 한새봉에 견학 오는 아이들을 안내하는 ‘숲생태 지도사’로 활동하고 있다. 개구리논에서 3년간 농사지으며 열혈농부가 된 이들 가족은 내년 초 전남 벌교로 귀농한다. “이사 가서 농사지으며 살 거야”라는 말을 듣고 가장 좋아한 사람은 다름 아닌 주원이였다. 짚과 함께 섞어 퇴비를 만든다며 정성스레 오줌을 모으던 주원이에게 귀농은 부모가 가져다준 뜻깊은 선물이었다.



농업의 교육효과도 솔솔



농약을 치지 않다 보니 배추의 절반은 벌레 몫이다.
 안전한 먹거리에 대한 고민으로 논일을 시작한 한새봉두레 박선화(46) 회장도 열혈 도시농부다. 생활협동조합에서 10여 년간 활동가로 일해온 박 회장은 항상 안전하고 정직한 먹거리를 고민해 왔다. 박 회장은 “평소 수입 농산물의 안전성 문제와 농약이나 살충제·방부제 등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며 “가장 좋은 건 내 손으로 직접 재배하는 것이라고 판단해 시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함께 농사일을 시작한 원년멤버 김애란(46)씨는 “농약 때문에 큰 꿩이 죽어 있는 것을 보고 너무 안타까웠다”며 “짐승도, 사람도 편히 먹을 수 있는 먹거리를 만들어 내자는 생각으로 참여했다”고 말했다.



 박 회장은 일곡동 터줏대감이다. 15년 전 일곡동에 처음 아파트가 생길 때 분양받은 뒤 지금까지 살고 있다. 마을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그는 터잡은 아파트단지에서 농사를 짓고 싶었다. 개구리논을 만나 꿈을 이룬 박 회장은 화학비료 없이도 논농사가 잘되겠느냐는 걱정, 농약은 초보에게 필수라는 충고를 뒤로하고 무농약 농사를 고집했다.



 무농약 농사가 해를 거듭하자 한새봉의 생태에도 변화가 생겼다. 3년차가 되자 무농약 지표생물인 민무늬조개벌레가 등장한 것이다. 지난해 겨울에는 논 둠벙(웅덩이)에 원앙도 찾아들었다. 개구리논 위 텃밭인 꿈틀이 농장은 음식물 찌꺼기에 흙과 지렁이를 넣어 만든 분변토로 작물을 키웠다. 천연비료를 사용하는 셈이다. 박 회장은 “음식물 쓰레기도 줄이고 농작물도 건강하게 키울 수 있어 일석이조”라며 “분변토만으로 텃밭 농사를 지어 병충해에도 강하다”고 자랑했다. 농약을 사용하지 않아 생태계도 지키고 일곡동 아파트단지에도 숨통을 틔워주고 있다는 게 박 회장과 한새봉두레 회원들의 자부심이다. 가끔씩 고라니가 나타나 다 익은 벼나 콩을 따먹지만 그 또한 더부살이라고 믿는다. 덕분에 개구리논은 2010년 한국내셔널트러스트의 ‘잘 가꾼 자연·문화유산’에 선정됐다.



 회원이 늘어나고 입소문이 퍼지면서 엄마들에게도 새 일거리가 생겼다. 개구리논의 단골손님인 인근 초·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찾아올 때마다 한새봉과 논밭의 생태계를 알려주고 농사에 대해서도 설명하는 ‘숲생태 지도사’ 역할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날도 인근 고등학교 특수반 아이들이 논을 찾아 추수 체험학습을 했다. 한새봉두레 주부회원들이 선생님이 돼 직접 벼를 베고 탈곡기에서 낟알을 떨어내며 키질을 한 뒤 절구에 쌀을 빻는 일을 도왔다. 빈 볏단으로 새끼를 꼬아 줄넘기도 하고 한새봉을 뛰어다니며 술래잡기를 하는 아이들 입에서는 연신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지능이 부족하고 주의가 산만한 아이들에게도 논은 안전하고 편안한 놀이터였다. 박 회장 등 10여 명의 주부는 인근 중학교에서 주말교사로도 활동 중이다. 북구 일신중학교에 농업강사로 초빙됐을 때는 꿈틀이 농장에서 만든 분변토를 섞어 학교 텃밭도 만들었다.



 자라면서 흙을 밟을 일이 없고 동식물을 마주할 기회가 없던 아이들에게도 개구리논은 최고의 선생님이다. 유난히 곤충을 좋아하는 지승(12)이는 몇 시간씩 논에 쭈그리고 앉아 물자라·게아재비·밀잠자리·수채·도롱뇽 등을 관찰하는 논생물 모니터링에 참여했다. 지승이가 6개월간 조사한 것들을 모아 만든 보고서는 광주광역시교육청 자연과학 분야 최고상을 받았다. 학교에선 과학영재반에 뽑혔다. ADHD 증후군 때문에 잡초를 뽑다가 호미를 집어던질 정도로 공격적이던 한 아이는 2년 만에 남을 배려하고 잘 어울리는 어엿한 신사가 됐다. 농사를 지으며 인내를 배우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연습을 한 덕분이다.



 80가정이 참여하는 한새봉두레는 한 가정당 1년에 6만원을 내면 회원이 될 수 있다. 회원은 4~5월에 거름 뿌리기, 6월 모내기, 7~8월 김매기, 10월 벼베기에 모두 참여할 수 있다. 10월에는 수확한 쌀을 나눈다. 남은 볏짚을 꼬아 줄넘기도 하고 막걸리 먹는 운동회도 함께한다. 지난해는 1200㎏을 수확해 가정마다 5kg씩 나눴다. 남은 쌀은 40kg씩 나눠 지역아동센터나 도움이 필요한 곳에 전달했다. 개구리논 바로 위 텃밭에서 재배하는 고구마와 상추 등은 회원들이 올 때마다 쪄서 내놓고 새참으로 나눠 먹는다. 올해 개구리논 추수일은 다음 달 3일이다.



광주광역시=채윤경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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