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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무제한 쏟아붓는데 … 경기는 왜 안 살아날까

23일 스페인 팜플로나 지역의 현금인출기 앞에서 한 노숙자가 종이 박스를 깔아놓고 잠을 자고 있다. 국가부채 압박으로 재정위기에 빠진 스페인은 구제금융 신청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다. [AP 팜플로나=연합뉴스]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함께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로 꼽히는 밀턴 프리드먼(1912~2006)이 최근 세계적인 양적 완화(QE) 정책을 지켜봤다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아마도 그는 1960년대 자신의 전성기 때처럼 “연방준비제도(Fed·연준)를 로봇으로 갈아치우라”고 했을 것이다. 경기를 살리려면 재정지출을 늘려야 한다고 주장한 케인스와 달리 프리드먼은 통화량 자체를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다만 화폐 유통 속도가 장기적으로 일정하다고 봤기 때문에 통화량을 급격히 조절하면 부작용이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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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연준은 언제나 변덕스럽게 통화량을 조절했다. 그 여파로 경기는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일정한 범위에서 통화량을 늘리도록 로봇에 연준을 맡기면 통화정책의 효과를 살릴 수 있을 것”이라는 게 프리드먼의 주장이었다. 그는 ‘바보의 샤워(fool in shower)’ 비유를 통해 그의 주장을 설명했다. 바보는 샤워할 때 차가운 물이 나오자 갑자기 뜨거운 물로 샤워꼭지를 돌린다. 서서히 꼭지를 틀면 알맞은 온도의 물이 나올 텐데 급하게 꼭지를 돌려 냉·온탕을 반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미 오래 전 프리드먼이 연준 통화정책의 한계를 간파했듯 최근 연준의 통화정책은 도통 약발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연준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시작되자 기준금리를 제로(0~0.25%) 수준으로 낮추고 3차에 걸쳐 양적 완화를 실시했다. 시중에 돈이 넘칠 만큼 넉넉하게 공급해 기업이 투자에 나서고 소비가 살아나게 하는 정책이다. 그 덕분인지 실업률이 지난달 7.8%로 하락했고 주택경기도 회복 조짐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경제가 정상을 되찾기까지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너무 멀다.



 왜 아무리 돈을 풀어도 경기가 살아나지 않는 것일까. 이런 의문은 최근 일본에서 공감을 얻고 있는 대차대조표 불황(balance sheet depression)을 통해 풀어볼 수 있다. 대차대조표를 보면 자산항목(왼쪽)과 부채항목(오른쪽)이 마주보고 균형을 이룬다. 따라서 경제 주체들은 보유 중인 자산의 가치가 쪼그라들면 여기에 대응하는 부채의 상환에 몰두하게 마련이다. 투자나 소비를 하지 않고 빚 갚기에만 치중하면 불황이 올 수밖에 없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진앙인 미국 주택 가격은 위기 직전과 비교해 아직 평균 30% 떨어져 있다. 경기 침체로 소득이 줄어드는 가운데 자산까지 줄어들면서 가계는 부채를 서둘러 축소하지 않으면 파산할지 모른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다.



 대차대조표 불황은 가장 먼저 금융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던 아일랜드에서도 생생히 확인된다. 아일랜드에선 집값이 최고점 대비 50% 이하로 떨어졌다. 5만 유로의 현금과 25만 유로의 주택담보대출로 30만 유로의 집을 샀다면 이미 깡통주택이다. 반 토막 난 집을 처분해도 남는 것은 10만 유로의 빚뿐이다. 아일랜드는 은행의 불량채권 증가와 경기침체 악화를 막기 위해 깡통주택 소유자들의 채무를 일부 탕감해 주는 개인파산법 도입을 추진 중이다. 부채를 줄여야 침체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다른 나라들의 사정도 근본적으론 다르지 않다. 주택 가격이 바닥을 기는 데다 미국·유로존(유로화 사용 17개국)·중국·일본 등 주요 경제권이 침체 국면에 빠져 있기 때문에 대차대조표 불황은 전 세계에 걸친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디레버리징(deleveraging, 부채 축소)’에 몰두하는 것은 기업도 마찬가지다. 기업 경영의 우선순위도 이윤 극대화보다 부채 최소화를 통한 생존에 쏠려 있다. 경기침체의 소나기가 내릴 동안에는 새로운 투자를 하기보다 빚을 줄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런 상황에선 제로금리도 투자의 유인이 별로 되지 못한다.



 결국 중앙은행이 아무리 시중에 돈을 풀고 금리를 내려도 소비가 줄고 투자가 위축되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일본 노무라(野村)종합연구소의 경제분석가 리처드 쿠는 이미 2009년 『대침체의 교훈』에서 이 같은 대차대조표 불황의 메커니즘을 예고했다. 버블 경제 붕괴 이후 ‘잃어버린 20년’을 겪은 일본 경제의 본질을 대차대조표 불황으로 해석하고, 미국과 유럽도 상당 기간 비슷한 상황에 처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대차대조표 불황은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의 배경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 준다. 유동성 함정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아무리 돈을 풀어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프리드먼의 고장 난 로봇처럼 통화정책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유동성 함정은 이미 일본에서 실증적으로 확인됐다. 일본은 1990년을 정점으로 거품경제가 붕괴되자 금리를 제로 수준으로 낮춰 경기 회복에 나섰다. 그래도 침체가 지속되자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시장에서 직접 돈을 투입하는 양적 완화의 카드를 빼 들었다. 돈이 흘러 넘쳐 넘실거릴 정도로 시중에 무제한 쏟아부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일본 경제가 활력을 찾은 적은 거의 없다. ‘잃어버린 10년’은 어느새 ‘잃어버린 20년’이 됐다.



 쿠의 예상처럼 이런 현상이 미국과 유럽에서도 상당 기간 이어질까. 그럴 확률이 상당히 커 보인다. 세계 경제가 경기 침체에서 빠르게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은 유동성 부족 때문이 아니라 줄어든 자산과 무거워진 부채 부담에 따른 수요 부족의 문제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리처드 쿠는 “가계와 기업이 손상된 대차대조표를 어느 정도 복구해 이제는 다시 돈을 빌려도 되겠다는 상황이 될 때 경기 회복도 시작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국이 통화량 공급에 적극 나서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로선 자국 통화가치를 절하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글로벌 수요가 둔화된 상황에서 생존하려면 조금이라도 자국의 통화 가치를 떨어뜨려 수출 경쟁력을 높여야 하기 때문이다. 연준은 3차 QE를 단행해 매달 400억 달러의 주택저당증권(MBS)을 매입하기로 했다. 유럽중앙은행(ECB)은 재정위기에 몰린 스페인과 이탈리아 국채를 사실상 무제한 매입하기로 했다. 이는 통화전쟁을 방불케 하고 있다.



 일본은행은 연준과 ECB의 양적 완화 공세에 맞서 즉각 10조 엔 규모의 추가 양적 완화에 나섰다. 유동성 함정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추가 양적 완화에 나선 것은 쓰나미처럼 몰려올 달러화 가치 하락에 대한 방어책이다. 일본 기업들은 엔화 환율이 80엔 아래의 엔고(高) 상태에서는 가격 경쟁력이 크게 떨어져 글로벌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한다.



 30일 열리는 일본은행 금융정책회의에서는 또다시 추가 양적 완화가 논의된다. 지난 4~9월 무역수지가 사상 최대 규모의 적자를 기록하자 더 강력한 경기부양책이 필요해서다. 이미 제로금리(0~0.1%)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에 금리를 더 낮출 여지는 없다. 추가로 채권을 사들여 시중에 돈을 푸는 추가 양적 완화 카드가 거론되는 이유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계 경제는 좀처럼 2008년 이전의 체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프리드먼이 바보의 샤워 비유에서 시사한 것처럼 통화 조절의 효과는 일반적으로 6개월~2년의 시차를 두고 나타난다고 하지만 현재 여건으로는 그런 상황을 기대하기 어렵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세계 경제 전망 보고서에서 내년 성장률을 3.6%로 내다봤다. 올해 전망치(3.3%)보다 높지만 회복 궤도에 올라섰다고 보기는 어렵다. 유로존은 1%를 밑도는 수준의 성장을 기록할 것으로 전망됐다.



 전통적 통화정책이 효과를 잃으면서 긴축에 대한 정책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200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는 “경제위기 디레버리징 과정에서 각국이 공격적이고 즉각적인 통화정책을 펼쳤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게 입증됐다”며 “비전통적 통화정책인 양적 완화와 확장적 재정정책의 병행이 해답”이라고 강조했다. 최근 주요 경제권에서 앞다퉈 양적 완화에 나서고 있지만 불황 때는 케인스의 지론인 재정정책도 동시에 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 또한 근본 해결책은 아니다. 일본에선 그동안 과도한 재정확대 정책의 여파로 재정절벽(fiscal cliff, 재정지출 축소에 따른 경제 충격) 우려가 나오고 있을 정도다. 국가부채가 1000조 엔에 육박하자 추가 국채 발행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글로벌 경기가 살아나기 위해선 미국 가계와 기업의 대차대조표가 정상을 되찾아야 할 것이란 진단이 나온다. 유럽의 회복이 요원한 상황에서 그나마 비빌 언덕은 미국뿐이다. 중국이 내수 확대를 추진 중이지만 아직 세계 경제를 먹여 살리기에는 역부족이다. 미약하나마 최근 꿈틀거리는 미국의 주택시장이 미국 가계와 기업의 대차대조표를 선순환 흐름으로 돌려놓을 수 있을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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