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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양서 남쪽 가는 길목 ‘말’에게 ‘죽’ 먹이는 집 많았다

지하철 3호선 양재역 부근을 강남 일대에선 양재동, 역삼동이란 동명보다는 말죽거리(馬粥巨里)라고 하면 알아듣는 사람이 많다. 현재도 양재역 부근에는 ‘말죽거리’라고 쓴 표석이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 말죽거리는 현재 양재역 남쪽의 헌릉로변 양재2동 주민센터 근처다. 양재천을 끼고 있고, 서쪽으로는 우면산 줄기가 있는 곳이다.



[우리 동네 유래] 양재동 말죽거리

  그렇다면 말죽거리라는 이름은 어떻게 하여 붙여졌을까?



  조선시대에는 서울에서 충청도, 경상도로 가려면 한남동 한강나루터에서 한강을 건너야 했다. 말죽거리는 이 대로의 첫 길목이었다. 남쪽으로 떠나는 사람들은 압구정 정자 등에서 전송하는 벗들과 마지막 주연을 나누고 헤어져서 저녁나절에 찾아든 첫 숙소가 말죽거리 주막이었다. 이와 반대로 지방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사람들도 한강을 건너기 전에 마지막으로 휴식하는 곳이었다.



  조선 초부터 말죽거리에는 공무로 여행하는 관원들에게 마필과 숙식을 제공하는 양재역(良才驛)이 있었다. 근처에는 주막도 적지 않았다. 이 역에는 역마(驛馬)가 늘 준비돼 있어서 공무로 먼 길을 달려와 지친 말을 바꿔 주었다. 말을 돌보는 역졸(驛卒)들이 있어 말을 먹여 보살피고 보호해 주었다.



  양재역은 서울 이남 경기도 전체 역(驛)을 통할하는 곳으로 종6품의 찰방(察訪)이 배치돼 있던 큰 역이었다. 찰방 아래에는 역장(驛長), 역리(驛吏), 역졸이 있어서 각종 정보를 수집해 직접 중앙에 보고했다.



  이 양재역 근처 마을을 ‘역말[驛村]’이라고 했다. 이 마을에선 말에게 죽을 먹이는 집이 많아서 길손들은 이곳을 주로 말죽거리라고 불렀다. 즉 말죽거리라는 지명은 말 그대로 ‘말에게 죽을 먹이는 거리’라고 해서 불린 이름이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이괄의 난’ 때 인조가 피난을 가는 길에 이곳에 이르러 말 위에서 팥죽을 들고 갔기 때문에 말죽거리라는 이름이 유래했다고 한다. 조선 후기 인조 2년(1624)에 평안병사 이괄(李适)은 반정에 따른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켜 남쪽으로 내려왔다. 반군이 질풍처럼 개성을 지나 벽제관에 이르자 인조는 공주(公州)로 황망히 피난하게 됐다.



  이때 인조는 한강나루에서 배를 간신히 구해 한강을 건너 신사동 새말나루터에 도착했다. 말죽거리에 이르자 인조는 목이 몹시 말랐다. 이곳에 사는 유생 김이(金怡) 등 예닐곱 명이 급히 팥죽을 쒀 인조에게 바치자 인조는 말 위에서 이 죽을 모두 들고 과천을 거쳐 공주까지 갔다고 한다.



  이곳의 말죽거리는 정미사화(丁未士禍)가 일어난 것과 연관이 있다. 조선 초 명종이 12세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그의 모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함으로써 국정을 좌우하게 됐다. 명종 2년(1547) 9월 부제학 정언각이 어느 날 그의 딸을 전라도에 전송하기 위해 양재역까지 갔다. 벽을 보니 붉은 글씨로 ‘위에 여왕이 집정하고 간신 이기 등이 권력을 농락해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그대로 보고만 있을 것인가’라고 씌어 있지 않은가. 그는 크게 놀라 이를 왕에게 보고했다.



  이 때 이기, 정명순 등이 “이것은 2년 전 을사사화(1545)의 뿌리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라고 주장해 중종의 6남 봉성군(鳳城君) 등을 처형하고 이언적(李彦迪) 등 선비 20여 명을 유배시켰다. 이로써 많은 사람들이 다시 화를 입었으므로 이를 정미사화라고 하고 일명 ‘양재역벽서의 옥’이라고 부른다.



박경룡 (문학박사, 서울역사문화포럼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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