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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고된 삶을 바꿀 수는 없지만

김기택
시인
제주민요 자장가 ‘웡이자랑’을 우연히 라디오에서 듣고는 자꾸 귀에 맴돌아서 음반을 사다 놓고 종종 듣는다. 서양 자장가에 익숙해진 탓인지 처음 들었을 때는 아기 재우는 노래 같지 않게 낯설었다. 투박한 목소리에다 느린 가락 사이에 화난 듯한 격렬하고 빠르게 몰아치는 곡조가 있어서 정말 이것이 자장가인가 싶을 정도였다. 요즘 유행하는 빠른 랩이 옛 자장가에 있는 것도 흥미로웠다. 노래의 원형이 일상 언어였다는 당연한 사실에 새삼스럽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전에 들었던 자장가들은 다 아름답고 평화롭고 조용했다. 아기를 재우는 데 엄마의 사랑스러운 목소리보다 좋은 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웡이자랑’은 아기가 자다가 확 깨어날 것 같은 퉁명스럽고 빠른 말과 곡조가 있어서 어서 잠들라고 위협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여러 번 들으면서 이것이 우리 어머니들이 실제로 부른 자연스러운 자장가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반면에 서양 자장가는 무대에서 불러야 어울릴 것 같다.



 옛 어머니들은 집안일과 생계를 위한 노동에 시달렸을 테니, 아기 보는 일이 여간 성가시고 힘들지 않았을 것이다. 빨리 재워야 일을 할 텐데, 아기가 엄마 좋으라고 바로 잠들어 주는 것도 아니고 엄마가 대신 잘 수도 없으니 짜증이 났을 것이다. 이런 상상을 하며 노래를 들으면 슬며시 웃음이 나온다. 노래가 힘든 일을 덜어주는 보약이라는 건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웡이자랑’은 삶의 진액이 담긴 생생한 목소리를 아름답게 가공하지 않아 오히려 신선하다.



 제주에서 나고 자란 작가 현기영의 『지상의 숟가락 하나』를 보니, 작가의 어머니도 아기를 구덕에 눕히고 흔들면서 이 자장가를 불렀단다. 구덕은 제주도에서 바구니로 만든 요람이다. 아기가 잠투정을 하면 “어머니는 구덕을 거칠게 흔들었는데 거기에 맞춰 부르는 자장가도 꾸중조”였으며 “그렇게 아기구덕이 풍랑 만난 쪽배처럼 한바탕 몹시 흔들리고 나면, 울던 아기는 기분 좋은 멀미와 함께 차츰 얌전해지고 거기에 따라 어머니의 노랫소리도 나직이 가라앉는다”고 했다. “저녁밥도 지어사 할 건디 바쁜 줄 모르는 요 아기야/ 어서 자라 철이 없는 요 아기야”라는 노랫말에는 아기 재우느라 애태우는 어머니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누가 듣기 좋은 말을 한답시고 저런 학 같은 시인하고 살면 사는 게 다 시가 아니겠냐고 이 말 듣고 속이 불편해진 마누라가 그 자리에서 내색은 못하고 집에 돌아와 혼자 구시렁거리는데 학 좋아하네 지가 살아봤냐고 학은 무슨 학 닭이다 닭 닭 중에서도 오골계(烏骨鷄)!” 정희성 시인의 ‘시인본색’은 시인과 사는 아내의 구시렁거리는 소리에서 인간의 가장 본능적이고 원시적인 목소리를 끌어올린다. 세상살이의 밑바닥 비밀을 다 들여다본 사람의 걸쭉한 진액이 그 말에 들어 있다. 그런데 왜 이 슬픈 말속에서 통쾌한 웃음과 즐거움이 들릴까? 남의 눈치 보느라 못했던 이야기를 대신 해준 것 같은 쾌감 때문일까?



 ‘강남스타일’로 온 국민뿐만 아니라 외국인의 어깨와 엉덩이까지 들썩이게 하고 백인 문화의 장벽까지 단숨에 깨뜨린 싸이의 노래를 보면 대중가요도 참 많이 바뀌었다는 걸 실감한다. “욕 들어 쳐먹어도 싸군/ 대마 떼다 빵 가도 싸군/ 훈련소만 두 번 가고 싸군/ 맞아도 싸군/ 죽어도 싸군/ 새됐으 외치다 엽기가수 용 됐으/ 챔피언 외치다가 국민가수 다 됐으.” ‘싸군’이라는 노래에는 대마초를 피워 물의를 일으키고 군대를 두 번이나 가는 등 곤욕을 치르다 재기에 성공한 굴곡 많은 싸이의 인생 역정이 빠르고 힘찬 리듬에 담겨 있다. ‘싸이’(군)이라는 이름에 ‘그래도 싸다’는 자조적인 의미를 넣어 운을 맞춘 것도 재미있다. 이 노래는 거친 일상어를 가공하지 않고 마음껏 소리 질러 듣는 이들을 무장해제시킬 뿐 아니라 삶의 스트레스를 유쾌한 웃음으로 바꾸고 있다.



 신라 시대의 처용도 부인을 범한 역신에게 주먹을 쓰는 대신 노래를 불러 굴복시키지 않았는가. 삶이 힘들다고 원하는 대로 바꿀 수는 없다. 그러나 노래와 해학으로 만들면 큰 웃음이 된다. 삶의 괴로움도 때로는 힘이 된다.



김기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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