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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과 실학, 대립관계인가

조선 왕조의 통치 이데올로기였던 성리학(주자학)은 실학과 어떤 관계인가. 조선시대 사상사는 초·중기의 성리학과 후기의 실학으로 나눠보는 게 그간의 일반적 시각이었다. 주로 극복·단절의 관계로 간주했던 것이다.



오늘 ‘퇴계학과 실학’ 학술대회
식민사관 맞서 실학 부각시켜
“퇴계 → 성호 → 다산으로 계승”

 이런 가운데 성리학과 실학의 계승·발전 관계에 주목한 학술대회가 열린다. 한국국학진흥원(원장 김병일)과 경기실학박물관(관장 김시업)이 공동 주최하는 ‘퇴계학과 근기실학(서울·경기 인근의 실학파), 그 계승과 극복의 전망’이다. 8일 오전 10시30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다.





 ◆실학의 등장=조선 성리학의 최고봉으로는 퇴계(退溪) 이황(1501∼70)이 손꼽힌다. 실학의 선구자는 성호(星湖) 이익(1681∼1763)이 대표적으로 거론된다.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은 실학을 집대성했다. 성리학과 실학에 대한 기존의 관점은 ‘퇴계 vs 성호·다산’이란 대립을 전제로 한다.



 실제 퇴계와 성호·다산 사이에는 차이가 존재한다. 서로 다른 시대가 배경이다. 그들 사이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두 차례의 국난이 존재했다. 심각하게 피폐한 민심과 민생을 다독이고 국가 리더십을 재구축하는 일이 시급했다. 이때 국가 리모델링 이론을 제시한 이들을 실학파라 부른다.



 이렇게 조선 사상사를 ‘성리학 vs 실학’의 대립으로 파악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부터다.



 조선엔 독창성이 없다는 일제의 식민사관에 맞서기 위해 위당(爲堂) 정인보(1893∼?) 등 국학자들이 실학을 부각시켰다. 공허한 이론 싸움에 치우친 성리학을 비판하면서 새로운 나라를 만들려고 했던 실학의 움직임이 있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일종의 자부심이었다. 청나라에서 들어온 서구 과학문명은 물론 기독교까지 수용하자고 주장하면서 근대적 국가를 지향했던 것으로 파악했다.



 ◆실학의 재해석=이렇게 등장한 실학과 성리학의 관계를 제대로 규명하는 것은 우리 학계의 오랜 과제였다. 일각에서는 실학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주장이 나오기까지 했다. 그런 점에서 8일의 학술대회는 실학에 대한 기존의 대립 일방적 관점을 재해석하는 첫 공식 석상이 될 듯하다.



 ‘퇴계→성호→다산’의 계승을 보여주는 자료도 적지 않다.



 우선 성호의 『이자수어(李子粹語)』다. ‘이자’는 퇴계를 가리킨다. ‘자’는 공자·맹자 등 위대한 스승에게 부치는 존칭이다. 다산은 성호의 학맥을 잇는다. 다산은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을 썼다. ‘도산’은 퇴계가 가르친 서원이다. ‘사숙’은 존경하는 사람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을 수는 없으나 그의 도(道)나 학문을 본으로 삼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실학의 뿌리가 조선 성리학의 종장인 퇴계로 올라간다고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김형찬(고려대·한국철학) 교수는 “퇴계는 성리학의 창시자인 주자를 비판하지 않는데, 성호·다산의 시대에 오면 주자를 비판하면서 훌륭한 학자의 한 명으로 평가하는 차이를 보이지만, 동시에 도덕적 이상사회를 현실에 구현하려 했던 퇴계의 근본 정신은 성호·다산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금장태(서울대·종교학) 명예교수는 “성리학과 실학의 관계에 대해 비판·극복만이 아니라, 계승·발전이란 양면적 시야를 확보하는 것은 한국사상사 이해를 한 차원 더 깊게 하는 중요한 과제”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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