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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수교 20년 - 사대주의 산맥을 넘어 ③ 소현세자

중국 시민들이 선양시 선허구 차오양제에 있는 소년아동도서관을 이용하고 있다. 지금은 자취가 사라졌으나 이곳은 1637년부터 8년간 소현세자가 거주하던 세자관으로 조선판 주중 대사관 역할을 했다. 이후 도교 사원으로 사용되던 이 터에 1921년 일본이 세운 건물과 함께 ‘만주철도주식회사(滿鐵)’라는 선명한 간판이 아직도 남아 있어 역사의 흔적을 보여준다.


고려가 팍스 몽골리카의 지배 아래에서 힘겹게 사대와 자주의 길을 오고간 자취는 고려 충선왕과 익재 이제현을 통해 알아봤다. 그 뒤로 다시 300여 년이 흘렀을 때 한반도는 역시 비슷한 운명에 놓여 있었다.

청나라 볼모 8년 … 조선의 국익을 위해 발로 뛴 외교관이었다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벌이던 광해군을 몰아내고 반정(反正)에 성공한 인조는 만주 지역에서 흥기하던 여진족의 청나라와 충돌한다. 1627년 정묘호란을 맞았고, 1636년에는 병자호란을 겪는다.



 전쟁의 광풍이 휩쓴 한반도 전역은 가족과 친지를 잃어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의 호곡 소리로 들끓는다. 그런 당시의 국운이 상징하듯 역사의 무대에 거대한 슬픔 덩어리로 등장하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昭顯世子)다.



 그에게서 오늘날의 한반도에 사는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비애(悲哀)다. 남들보다 멀리 내다봤으나 현실의 땅에서 기승을 부렸던 세속적인 권력에 꺾이고, 마침내 8년 동안의 인질 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고국에서 ‘귀와 콧구멍 등 모든 혈(穴)에서 피를 뿜고 피부가 새카맣게 변한’ 상태로 죽음을 맞이했던 것. 그를 독살한 사람은 다름 아닌 부친 인조였다는 게 정설이다.



소년아동도서관 입구의 현판. 선양의 동관학교에 다니던 저우언라이(당시 12살) 전 중국 총리의 “(나는) 중화민족의 굴기를 위해 책을 읽는다(爲中華之堀起而讀書)”는 글귀가 씌어 있다.
 그 스토리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를 다시 거론하는 일은 덧없다. 중국과의 수교 20주년을 맞아 ‘한반도의 강대국 외교와 사대(事大)’라는 주제에 착안한 본지 취재팀은 우선 그가 인질로 살았던 중국 선양(瀋陽)을 찾아가 보기로 했다.



 고려 충선왕이 세운 연경의 만권당이 700년 전 고려의 국운을 부지코자 했던 고려의 주중(駐中) 대사관이었다면, 소현세자가 전쟁에서 패해 받아야 하는 멸시와 냉대를 이겨내며 새로 일어서는 청나라와 관계를 트고 유지하려 했던 선양의 거소(居所)는 조선판 주중 대사관이었을 테다.



 취재팀의 안내서는 『조선의 지식인들과 함께 문명의 연행길을 가다』(김태준·이승수·김일환 저, 푸른역사)다. 한국학 전공의 세 저자가 직접 조선의 중국 사절 루트를 답사한 기록이다. 저자들이 노력을 기울여 찾아낸 소현세자의 옛 선양 거소는 지금의 선양시 선허(瀋河)구 차오양제(朝陽街) 131호 ‘소년아동도서관’이었다.



 제법 유서가 깊은 건물이었다. 비록 380여 년 전의 소현세자가 남긴 자취는 오간 데 없으나, 이 건물은 1921년 만주 경략을 노리며 들어온 일본의 ‘만주철도 주식회사(滿鐵)’가 원래 그곳에 있던 도교 사원을 헐어버린 뒤 세웠다고 한다.



 이 건물이 만주철도의 옛 사무소였다는 점은 정문 옆에 있는 팻말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전 이곳이 굴욕의 인고(忍苦)를 감내하면서 휘청거리는 조선의 운명을 부여잡기 위해 소현세자가 노력을 기울인 곳이라는 표지는 찾아볼 수 없었다. 취재팀의 심사는 착잡하기만 했다.



선양 북능공원에 있는 청 태종 홍타이지의 동상.
 1637년 인질로 잡혀와 8년을 머물렀다는 소현세자는 사실상 외교 사령탑이었다. 청나라와 전쟁 끝에 붙잡혀 온 수많은 인질의 석방 및 귀환, 즉 속환(贖還)의 문제를 청나라 조정 대신들과 끊임없이 협의했다. 아울러 산해관 너머의 명나라를 치기 위해 군비와 식량 조달을 요구하는 청나라의 압력에 시달리며 협상에 임해야 했다.



 소현세자의 외교적 노력과 일상의 행동을 담은 방대한 기록 『심양장계(瀋陽狀啓)』와 『심양일기(瀋陽日記)』에는 그런 사정이 잘 드러나 있다. 두 책을 통해 드러나는 소현세자의 면모는 매우 적극적인 외교관이었다. 병자호란을 주도한 청 태종 홍타이지와 자주 식사를 했으며, 청 권력가 도르콘, 병자호란의 선봉장 용골대(龍骨大) 등과도 자주 만나며 외교 협상에 임했다.



 급기야 청나라 조정은 이런 소현세자를 신임하기 시작했으며 우정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소현세자가 귀국한 해는 1644년. 볼모로 끌려간 지 8년 만이다. 그는 청 태종의 사망에 이어 등극한 순치(順治)제 때 명나라를 멸망시킨 청나라 조정을 따라 베이징(北京)으로 간다.



 이곳에서 8개월간 체류하던 소현세자는 독일 출신의 신부 아담 샬(중국명 湯若望)과 조우한다. 명나라에서 활동하던 아담 샬은 나중에 청나라에서 천문(天文)을 주관하는 흠천감(欽天監)을 맡은 인물이다. 그는 아담 샬과의 교우를 통해 서양의 천문·자연과학·종교에 관한 지식을 축적한다.



 소현은 인질 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죽는다. 그 뒤로 다시 그의 부인인 강빈(姜嬪)이 죽고, 4년 뒤인 1648년에는 제주도로 귀양 간 아들 석철(石鐵)도 죽는다. 그 석철이 제주도로 귀양 갔을 때 병자호란의 청나라 선봉장 용골대는 조선을 방문해 “석철을 내가 키우겠다”고 제안했다.



 인조실록(仁祖實錄)에서 석철의 죽음을 적은 사관(史官)은 “그에 앞서 용골대가 (조선에) 와서 석철을 데려다 기르겠다고 말했을 때 사람들은 ‘석철이 (제 몸을) 보전할 수 없겠다’고 했는데 이에 죽었구나”라고 적었다.



 조선을 침략한 군대의 선봉장이 소현의 아들을 입양코자 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소현과 청나라 조정의 사이가 어땠는지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그런 용골대의 언급에 결국 그 아들마저 죽이고 마는 조선 조정의 협량(狹量)함도 차갑고 옹졸하게 느껴진다.



 아담 샬과의 조우, 그리고 천주상(天主像)을 비롯해 서양 종교에 관한 정보와 문물을 품에 안고 돌아온 소현의 자세에서는 열린 지식인의 시선이 한껏 느껴진다. 청나라와의 적극적인 교섭에서는 국제적인 흐름을 읽는 면모도 드러난다.



 병자호란은 우리에게 그 경과가 잘 알려져 있다. 청나라와 “끝까지 싸우겠다”고 주장했던 이들이 주전파(主戰派), 그 반대가 주화파(主和派)였다. 김상헌(金尙憲)과 최명길(崔鳴吉)은 두 진영의 대표였다. 취재팀이 안내서로 삼았던 『…문명의 연행길을 가다』 저자들은 흥미로운 대목 하나를 소개하고 있다.



 김상헌과 최명길이 모두 인질로 끌려와 갇혔던 곳은 남관(南館)이라는 곳이다. 이곳에서 벽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시를 주고받았다. 서로 격려하는 내용이었지만 정치적 입장은 달랐다. 주고받았던 시문에서 김상헌이 내세운 논리의 핵심은 ‘경(經)’, 최명길이 대응한 논리의 축은 ‘권(權)’이었다.



 ‘경’은 명분과 원칙, ‘권’은 수단이나 방편이었다. 곧 망할지도 모를 명나라와의 의리를 앞세우는 논리와 국익을 위해 부상하는 청나라와의 관계를 조율하자는 현실적이면서 실용적인 논리가 마치 교차점을 찾지 못한 두 가닥의 철로처럼 나란히 뻗고 있다.



 취재팀은 선양의 곳곳을 둘러봤다. 청 시조 누르하치와 병자호란을 주도했던 홍타이지의 능역(陵域)과 그들이 집정했던 고궁(故宮) 등이다. 청나라 고궁 서문이 유독 관심을 끌었다. 이 서문의 바깥쪽 어딘가에서 청나라와의 화의(和議)를 거부했던 홍익한·윤집·오달제 등 삼학사(三學士)가 참수형을 당했다. 그 서문 밖은 아주 평범한 선양의 시가지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이들은 충절(忠節)과 애국의 표상으로 지금까지 전해진다. 이들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비석은 한때 부러진 채 모습을 다시 드러내기도 했고, 한국의 독립기념관 측은 이를 복제해 기념비로 세웠다.



 김상헌과 삼학사의 충절이 진짜 충절이었는지, 사세(事勢) 읽기에 실패해 국가를 존망의 위기로 이끌어간 시대착오적 명분론이었는지는 제대로 따져 볼 일이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관계는 철저한 이해관계가 지배한다. 섣부른 명분을 따지는 일은 어리석다. 380여 년 전의 명분론은 명의 멸망, 청의 부상으로 당시에 이미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기에 우리는 조선조 존망이 걸렸던 병자호란 직후의 시공(時空)에서 국제정치의 흐름을 타며 조선이라는 나라를 보전코자 했던 ‘조선판 주중 대사관’, 소현세자의 선양 거소에 기념 팻말이라도 달아야 옳다.



 덧붙일 말이 하나 있다. 인조는 소현이 죽은 뒤 그에게 내릴 시호를 고르라고 신하들에게 명령한다. 신하들이 올린 세 시호 중에 인조가 택한 게 ‘소현’이다. “덕을 밝혀 공로가 있었음을 소(昭)라 하고, 행실이 중외(中外·나라 안팎)에 드러난 것을 현(顯)이라 한다”는 뜻이었다.



 그 시호로만 본다면 그 아비 인조와 조정 대신들은 소현이 기울인 노력과 품은 재능을 알았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그를 죽이거나, 최소한 죽게 내버려 둔 셈이니 조선조가 그로부터 전체적인 내리막길 주행을 벌여 200여 년 뒤 패망의 길로 들어선 것은 어쩌면 역사의 필연적 귀결일지 모른다.



특별취재팀=유광종·허귀식·박소영·예영준·민경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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