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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성폭행…전과10범, 어머니 사망 소식에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버스로 향하는 임정민씨 부부의 모습.[사진= 안성식 기자 ]
23년 6개월…. 교도소 철창 속에서도 시간은 흘렀습니다. 그러나 20여년의 시간은 저의 죄를 씻어내기에 충분했을까요.



저는 범죄 경력자입니다. 무려 전과 10범이지요. 대부분의 삶을 교도소에서 보냈습니다. 평생을 바쳐 용서를 구해도 모자랄 만큼 참 많은 죄를 지었습니다. 선뜻 이름을 말하기에도 부끄러운 인생. 그저 쉰 네살 먹은 임 씨라고만 밝혀둘게요.



저는 고등학교 3학년 때 처음 교도소에 갔습니다. 졸업을 한 달 앞두고 패싸움을 벌여 잡혀 들어간 소년원이 저의 첫 감옥행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렇습니다. 처음 소년원에 갔을 때 저는 반성하기보다는 힘 좀 쓸 줄 아는 제 자신이 뿌듯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소년원에서 나오자마자 곳곳에서 폭력을 휘두르고 다녔습니다. 강도, 폭력, 성폭행…. 범죄를 저지르고 잡혀가기를 밥먹 듯 했습니다. 짐승 같은 삶이었죠. 심지어 경찰을 때려 두 번이나 철창 신세를 진 적도 있었지요.



2004년 4월, 저는 열 번째로 교도소에 들어갔습니다. 그곳에선 전과가 많으면 오히려 대우를 받습니다. ‘얼마나 정신 못 차리고 살아왔느냐’가 유일하게 대접받는 공간인 셈이죠. 영웅심리에 취해 교도소에서 사고도 쳤습니다. 간식으로 나오는 요구르트에 영양제 한 알을 넣어 발효시키면 막걸리와 비슷한 음료가 됩니다. 동료들과 ‘막걸리’를 만들어먹다 적발됐고 누가 신고 했느냐를 놓고 수감자들끼리 싸우다 1평 남짓 독방에서 생활하기도 했습니다.



출소를 4개월 앞둔 어느 겨울 날이었습니다. 교도관 한 분이 저를 따로 불렀습니다. “자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연락이 왔네.”수갑을 찬 채 저는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차가운 독방에서 얼마나 애통하게 울고 또 울었던지…. 어머니는 짐승보다 못한 제 뒷바라지를 하시느라 평생을 고생하신 분이었습니다. 사촌 형이 그런 어머니의 유언을 전해주었습니다. “부디 장가가서 사랍답게 열심히 살거라.”



심장이 찢기는 기분이었습니다. 방탕하게 살아온 지난 세월이 한꺼번에 몰려왔고, 가슴 속에서 감당할 수 없는 후회가 몰려왔습니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겠다.’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야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제가 원망스러웠지만, 저 세상에 계신 어머니께 뒤늦은 효도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09년 4월 형기를 마치고 춘천에 있는 법무보호복지공단 강원지부로 찾아갔습니다. 교도소 복역자들에게 일자리와 숙식 등을 지원해주는 곳이지요. 그곳에서 건물 공사ㆍ도로 포장 등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 덕분인지 공단에서 범죄예방위원으로 계시던 에어컨 설치업체 사장님을 소개시켜주셨습니다. 군부대ㆍ학교 등 현장을 따라다니며 일을 배웠습니다. 지금까지 함께 일하고 있는 이 고마운 사장님은 “환갑 때까진 무조건 책임져주겠다”고 약속도 해주셨습니다. 이렇게 주변분들의 도움으로 공단 생활이 가능한 2년을 꽉 채우면서 목돈 2000만원도 모았습니다.



마음 다잡고 생활하다보니 좋은 일이 계속 생겼습니다. 2010년 여름 친구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짐승처럼 떠돌며 살아온 제게 ‘똑바로 살아갸겠다’는 책임감을 느끼게 해준 사람이었습니다. 제 과거를 모두 털어놓고 함께 살자고 고백했습니다. 공단의 도움으로 합동 결혼식도 올렸고 춘천에 방 두 개짜리 전세집도 얻었습니다. ‘우리 어머니께 신혼집을 보여드렸다면 정말 좋아하셨을 텐데….’신혼집에 들어온 첫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어 코끝이 찡해졌습니다.



아내는 제게 늘 ‘아기 같다’고 놀립니다. 아직 사회생활에 서툴고 단순한 성격인 제게 딱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달 전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공사 현장에서 에어컨을 설치하던 저는 다른 공사 인부와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예전 같으면 주먹이 바로 날아갔을 겁니다. 하지만 그 순간 아내와 돌아가신 어머니, 공단 직원분들, 사장님이 떠오르더군요. 상대방이 쓰고 있던 안전모로 머리를 맞아 7바늘을 꿰매는 상처까지 났습니다. 그래도 참았습니다. 참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번 추석에 저희 부부는 서울 근교에 있는 처가댁으로 장모님을 뵈러 갑니다. 장모님 생신 때 잠깐 찾아 뵌 후 제대로 인사드리러 가기는 이번이 처음입니다. 사실 아직까지 제게 추석은 ‘교도소 특식으로 송편 나오는 날’ 일 뿐입니다. 마음이 더 울적해지는 날이었죠. 하지만 이제 아내와 나란히 선물 하나씩 들고 터미널에서 표를 살 겁니다.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맬 겁니다. 예쁜 아내도 창 밖을 보고 있겠죠. 이 모든 것이 신기합니다.



평생을 속죄하며 살겠습니다. 열심히 사는 것이 저로 인해 피해를 본 분들에게 용서를 구하는 방법이라고 믿습니다. 즐거운 추석 되시길 바랍니다.



이가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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