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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 인색한 니체조차 ‘독일어 마술사’로 칭송

시는 인간의 정서와 사상을 간결한 운율적 언어로 표현한 창작 문학의 주요한 분야다. 인간의 감성을 무한대로 표현하는 시는 독자에게 깊은 감동을 주기도 한다. 프랑스의 사상가이며 문인인 볼테르(본명: 프랑수아 아루에)는 시를 “위대하고 다감한 영혼의 음악”이라고 정의했다. 시는 서정시·서사시·극시 등 세 종류가 있고, 다시 정형시와 자유시로 나뉜다. 19세기 이후엔 서정시가 주류를 이룬다. 수많은 서정시인 중 유독 인간의 복잡한 감정과 이상 그리고 앞서 나가는 사상을 그린 대시인이 있었다. 독일 태생의 유대인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사진)다.

열두 살 땐 나폴레옹 숭배자
하이네는 1797년 독일 프로이센 지역 도시인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났다. 부모 모두 유대인이다. 1811년 12세의 하이네는 나폴레옹이 뒤셀도르프에 진주하는 모습을 보고 나폴레옹의 숭배자가 됐다. 이후 은행원이 되기 위해 함부르크에서 소규모 은행을 경영하던 숙부 살로몬의 집에서 기거하며 견습생으로 일했다. 사춘기 소년 하이네는 작은아버지 집에서 살면서 사촌인 아말리에에게 연정을 품는다. 이 시기부터 그는 낭만적 서정시를 쓰게 된다. 이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를 계기로 하이네는 환희와 비탄을 오가는 감정을 알게 됐고, 이는 그의 초기 시풍인 연정시에 많이 나타나 있다.

이후 숙부의 도움으로 본 대학에서 법학 강의를 듣다 1820년 괴팅겐대학으로 옮겨 법학 박사학위를 받고 법관 시험에도 합격한다. 베를린대학에서 독일 관념론의 대가인 철학교수 게오르크 헤겔의 강의를 듣고 감명을 받기도 했다. 변호사를 지망했던 그는 이 무렵 개신교로 개종했다. 그러나 개종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하이네에 대한 세간의 시선은 싸늘했다. 그는 결국 변호사가 되길 포기하고 문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1825년부터 5년간 유럽 각지를 여행했다.
하이네는 1820년부터 시를 쓰기 시작했으나 그가 시인으로 명성을 얻게 된 계기는 1827년 33개 시를 모은 시집 노래의 책을 펴낸 이후다. 이 책에 나오는 민요시 ‘로렐라이’는 불후의 명작이 됐다. 초기엔 꿈과 낭만 그리고 자연에 대한 기쁨을 담은 민요풍 4행시를 주로 썼다.

당시 독일은 ‘빈체제’의 반동 복고주의와 함께 프로이센 주도의 통일운동이 시작된 시기였으므로 자유인 하이네는 이 체제에 대해 극심한 반감을 보였다. 그러다 1932년 한 독일 일간지의 파리 주재원으로 가게 돼 그의 후반기 인생 25년을 파리에서 살게 된다. 파리에 도착한 하이네는 인간 해방과 예술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프랑스 자유주의 진보사상에 흠뻑 빠지게 된다. 프랑스 사회주의자들과 자주 어울렸다. 그는 특히 프랑스 사회주의 원조인 앙리 드 루브루아(일명: 생시몽 백작)와 독일 사민주의 혁명가 페르디난트 라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다만 과격한 혁명이론의 공산주의는 배격했다. 그는 이제 시인인 동시에 혁명적 언론인이 됐다. 파리 체류 중 겨울 이야기 아타트롤 로만체로 루테치아 등의 시집을 남겼다. 1844년 어머니를 만나러 잠시 함부르크에 가면서 마지막 독일 여행을 했다.

1848년 하이네는 척추 결핵으로 병상에 눕게 됐다. 매독 후유증으로 알려졌다. 이로부터 8년 동안 투병하다 1856년 병상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의 유해는 문화·예술인 묘지 중 하나인 파리 몽마르트르 묘지에 안장됐다.

자유주의자 하이네는 평생 유대인-독일인-유럽인이란 정체성의 혼돈 속에서 방황했지만 자신의 조국인 독일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다. 1835년 독일연방의회는 하이네와 같이 기존 체제와 윤리에 저항하는 작가의 창작 활동을 금지했다. 그러나 하이네는 망명지 프랑스에서 계속 독일어로 글을 쓰면서 예술 활동의 자유와 대중의 해방을 주창했다. 그의 시 ‘슐레지엔의 직조공’에서 반동체제하에서 고초를 겪는 독일인에 대해 각별한 연대감을 표시했다. 또한 하이네는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에서도 정신적 혼란을 겪었다. 1851년 시집 로만체로의 제3부인 ‘히브리 선율’에서 그는 맹신을 강요하는 유일신 신앙에 대한 회의를 드러냈다. 그의 시풍도 초기엔 낭만주의적 서정시가 주류였다면 파리 망명 시절엔 저항의식을 드러낸 혁명가적 기질을 보인 작품이 많았다.

반유대주의자 바그너도 하이네 작품 인용
하이네의 시는 많은 음악가에게 감명을 주었다. 로베르트 슈만은 노래의 책에 나오는 시를 바탕으로 가곡을 작곡했다. 유대인 작곡가 펠릭스 멘델스존은 하이네의 시를 인용해 ‘노래의 날개 위에’란 가곡을 만들었다. 프랑스 문인 테오필 고티에와 유대인 작곡가 아돌프 아당은 하이네의 시에 등장하는 빌리라는 처녀귀신에게서 영감을 받아 낭만주의 발레 ‘지젤’을 만들었다. 철두철미한 반(反)유대주의자였던 리하르트 바그너마저도 그의 오페라 ‘탄호이저’와 ‘방랑하는 네덜란드인’에 하이네의 작품을 인용했다.

1935년 독일 나치의 등장과 함께 하이네 시집은 분서(焚書) 대상이 되는 등 한때 수난을 당했다. 하지만 그는 괴테와 함께 독일인이 가장 사랑하는 문인으로 자리 잡았다. 심지어 남을 칭찬하는 데 매우 인색했던 독일 실존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도 하이네만은 ‘독일어의 마술사’라고 치켜세웠다. 1988년 뒤셀도르프대학은 하인리히 하이네 대학으로 개명됐다.

낭만적 자유인의 영혼과 압제로부터의 저항의식을 한 몸에 지녔던 하이네의 시는 세계의 많은 독자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다. 문·사·철·시·서·화를 멀리하며 날로 물신주의에 빠져가는 오늘날 우리 세태에는 하이네 작품의 몇 마디가 천박해진 영혼을 잠시나마 일깨우는 도구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전 외교부 대사 jayson-p@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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