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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이 의심스럽고 지킬 걸 못 지킨다면…

동인(同人:) 괘. 위는 하늘(), 아래는 불()을 뜻하는 괘상이 나왔다.
하늘은 위에 있다. 아래의 불이 타올라서 위 하늘과 함께하고자 한다. 득중, 곧 중심자리를 얻은 두 번째 음효(--)와 다섯 번째 양효(ㅡ)가 주체가 되어 서로 응한다. 그래서 한 뜻을 지닌 동인이 된다. 사상·취미·목적 따위가 같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 발행하는 잡지를 동인지(同人誌)라고 하는데 그 이름의 출전이 주역이다.

김종록의 ‘주역으로 푸는 대선 소설’⑪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좇고


“얘야, 네 여고 동창생끼리 만든 모임 이름이 뭐라 했지?”
백두옹이 외손자며느리에게 괘상과 풀이가 적힌 종이를 건네며 묻는다.
“금란회(金蘭會)요.”

외손자며느리가 글귀를 살피며 대답했다.

“그랬지. 어렵지 않은 한자이니 읽어보렴.”
“이인동심(二人同心)이면 기리단금(其利斷金)이며 동심지언(同心之言)은 기취여란(其臭如蘭)이라. 두 사람이 한 마음이면 단단한 쇠도 자를 수 있고, 뜻을 같이하는 말은 난초의 향기와도 같다. 참 좋은 글귀네요.”
외손자며느리는 난초의 꽃향기를 피워내듯 가지런한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다.

“단금의 ‘금’자, 여란의 ‘란’자를 따서 금란회라고 지었겠지? 쇠처럼 단단하고 난초처럼 향기로운 사귐, 금란지교(金蘭之交)의 뜻으로 말이야.”
“금란지교는 알았지만 주역에 근거한 건 전혀 몰랐네요. 주역의 명구가 우리 생활 속에 의외로 깊게 뿌리내렸네요.”
“태극과 건·곤·감·리 네 괘로 된 태극기를 표상으로 하는 대한민국이 아니더냐. 한국인들의 집단 무의식 속에 주역 철학이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지.”
듣고 보니 정말 그랬다. 외손자며느리는 주역 <계사전>의 그 구절을 소리 내 읊조렸다. 의미를 새기면서 읊으니 시를 낭송하는 느낌이었다.
“안철수·문재인 후보의 단일화를 말씀하시려고 동인 괘를 뽑으셨군요.”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무소속 안철수 후보와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의 단일화는 분명 대선 판도를 결정짓는 일이겠지.”
“안철수면 낙승, 문재인이면 석패요?”

외손자며느리가 특유의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심성이 바르고 슈트가 잘 어울리는 남자’라며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

정치는 복잡한 함수가 아니라 산수
“얘야, 정치는 복잡한 함수가 아니라 단순한 산수란다. 복잡하게 생각할 거 하나도 없어. 문 후보는 처음부터 태생적 한계를 안고서 여기까지 달려왔단다. 안철수 후보 지지 세력 가운데 상당수가 민주통합당과 ‘친노’에 비호감이라는 거 알잖아. 상대적으로, 문 후보 지지 세력은 안 후보를 지지하는 데 별 주저함이 없지.”
“할아버님, 그렇다고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로 당당히 선출된 문재인 후보가 무소속 안철수 후보에게 양보할 수 있나요?”
“그들로서는 어떡해서든 정권교체만하면 되는 거 아닌감? 문제는 국민 다수도 그렇겠냐는 거다. 정치 혁신을 바라는 국민은 정권교체에 별 매력을 못 느끼는 듯해. 새누리당이나 민주통합당이나 거기서 거기라는 걸 너무 잘 알아버린 거지. 그래서 안철수 바람이 부는 거고.”
“안철수 후보도 정권교체 주장하잖아요.”
“출마 선언문과 기자회견 내용을 잘 봐라. 단일화의 조건이 정치혁신과 국민의 동의야. 정권교체라고 안 했단 말이다. 안철수 후보가 민주통합당만 바라보고 있는 것 같지가 않아.”

백두옹은 법주사 초대형 쇠솥을 천천히 한 바퀴 돌았다. 주역에서 말하는 솥에는 다리가 셋이다. 그중 하나라도 부러지면 솥이 기울어져 귀한 음식을 쏟아버린다. 백두옹은 모처럼 진정성이 있는 박근혜·문재인·안철수 세 후보가 귀한 솥의 세 다리 같게만 여겨졌다. 장점이 많은 세 후보를 모두 쓸 방도를 생각한다면 몽상일까?

“설마 안철수가 새누리당과의 연대를 생각하겠어요?”
뒤따라 돌던 외손자며느리가 놀라며 묻는다.
“그건 모르는 일이지. 대선까지는 아직 세 달 가까이 남았단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누가 알겠니?”
사람들은 자꾸 정치개혁을 말한다. 세상이 다 변했는데 정치인들만 구태의연하다고 침을 튀긴다. 하지만 잘 따져보자. 정치인들만큼 수시로 검증 받고 투표로 심판 받아온 부류가 이 나라 어느 분야에 또 있는가. 정치인이 털갈이할 때 낯빛만 바꾸는 게 대중이다. 대중 가운데 나라 걱정하고 이웃 걱정하고 세계 시민정신에 부합하는 당당한 이가 얼마나 될까.

백두옹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시절운(時節運)이라는 걸 떠올렸다. 개인이나 국가에도 운이 있지만 시절에도 운이 있다. 한 시대의 운명은 그 시대 지성의 총화요, 그 결과다. 제각기 흩어져 그야말로 콩가루 형국이 되느냐, 단단히 뭉쳐 보루가 되느냐는 역시 시절운이 따라야 한다.

세계적 불황기다. 한반도 주변 정세도 험하다. 고난의 연대를 겪으며 누적돼온 뒤틀린 욕망이 사회 구석구석에 만연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간과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 있다. 지금 이 나라에 서광이 뻗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산하에 불멸의 혼들이 잠 깨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각지도 않았던 기적 같은 일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게 된다. 그것이 오래전, 한국 역학의 약속이다. 바라옵건대 프레임에 갇히지 않은 큰 정치인들이 툭 나서서 큰일을 벌여주기 바란다. 요란하게 우짖는 대중의 소리에 너무 안달하지 말고 대인다운 소걸음을 걸어주기 바란다.

백두옹은 여러 날 두문불출했다. 박근혜 후보에게 쓴소리를 하고 법주사 다녀온 뒤로 줄곧 그랬다. 박 후보는 웃음을 잃지 않고 여느 때와 다름없는 행보를 했지만 마음은 어느 때보다 무거웠을 거였다. 그 침잠은 매우 값진 것이다. 시대적 소명 앞에서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과 냉정하고 깊이 있게 대화하는 시간이라서 그렇다. 아버지는 어쩌면 꿈길로 찾아와 딸에게 일러주고 갔는지도 모른다. ‘딸아, 그 가혹한 세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내 딸아! 나를 밟고 이 힘겨운 고팽이를 넘어가라. 누구든 자식 된 자, 그 아버지를 극복하고 자신의 시대를 여는 것! 그것이 묵은 것을 밑거름으로 그 위에다 새싹을 틔우는 이 대지의 연대기란다. 부디 작은 나를 버리고 큰 나를 찾아다오. 그리하여 네 앞에 놓인 새로운 길을 헤쳐가라. 딸아, 눈물겨운 내 딸아, 결단의 순간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쓰지 마라. 늦으면 늦을수록 수습하기가 그만큼 더 어려워진단다. 지하에서 이 아비가 도우마. 네 어미와 함께 널 도우마’.

광장에서 동인 결성하면 형통하리니
백두옹의 예상대로 박근혜 후보가 사과했다. ‘5·16, 유신, 민혁당 사건 등은 헌법 가치가 훼손되고, 대한민국의 정치발전을 지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생각합니다’. 말에 책임을 져온 그로서는 역사관을 돌연히 바꾸는 강도 높은 수위였다. 그를 지지하던 보수층에서 반발할 정도였다. 산토끼 잡으려다 집토끼 놓친다는 말이 나왔다. 3김 가운데 하나인 JP가 보고 화낼 만했다. 하지만 문재인 후보와 안철수 후보 모두 환영했다.

추석 전후 지지율이 초관심사다. 백두옹은 동인 괘의 핵심을 정리했다. 키워드는 ‘동인우야(同人于野)면 형(亨)하다’였다. 밀실에서 사사로이 연대하지 않고 광장에서 천하의 떳떳한 도리로 동인을 결성하면 형통하다. 그것이 소인배가 아닌 군자나 대인의 도리다. 아래 세 효(
)의 중심인 음효(--)에서는 ‘동인우종(同人于宗)이니 인(吝)하다’고 했다. 같은 종씨나 당파에서 동인을 지으니 부끄럽다는 뜻이다. 실리만 챙기려다 명분을 잃으면 야합이 된다. 대인이 취할 바가 아니다. 물론 국민이 동의해 주지도 않는다.

세 나그네가 한 길을 가는 지금, 안철수·문재인 후보가 짝을 짓고 행복한 길동무가 될 수 있을까? 홀로 가게 될 박근혜 후보는 국민을 길동무로 삼을 수 있을까?
사람들은 야권 후보 단일화를 낙관한다. 양측이 따로따로 세를 확장하다가 대선을 코앞에 두고 극적으로 단일화할 거라고 본다. 단일화하지 못하면 이마에 주홍글자라도 새길 기세다. 그런데 현실은 당위보다 늘 우선한다. 단일화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다는 얘기다. 정당정치 체제에서 무소속 안철수 후보는 정당이라는 척목이 없다. 전에도 말했듯 용은 척목이 없으면 하늘을 날 수 없다. 척목을 가지고 있는 민주통합당이 문재인 같이 올곧은 후보를 총리로 주저앉히고, 국가리더십이 검증되지도 않은 안철수 후보에게 대통령 자리를 양보하는 건 정도(正道)가 아닐 뿐더러 치욕이다. 반대로 안철수 후보가 지난 번 서울시장 선거 때처럼 스스럼없이 양보할 가능성도 희박하다. 욕심 없는 안 후보가 뒤늦게 대통령이 욕심나서가 아니다. 그 양보가 ‘문재인 대통령’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까지 삼파전으로 갈 가능성도 크다.

정치판은 변화무쌍하다. 남은 80여 일! 후보들이 정책을 다듬고 국가리더십을 검증 받는 시간으로는 짧지만 판세가 뒤집힐 여지는 얼마든지 많은 시간이다. 동인 괘 다섯 번째 효사에 ‘선호도이 후소(先號<54B7>而後笑)’라는 매우 짓궂은 장면이 연출된다. 먼저 울부짖다가 나중에 웃는다는 뜻이다. 먼저 웃고 나중에 통곡하는 선소 후호도(先笑後號<54B7>)도 있다. 떠돌이 신세를 뜻하는 여(旅:
) 괘에 나온다. 먼저 웃다 나중에 통곡하는 것보다는 먼저 울다 나중에 웃는 편이 낫다.

박근혜 후보의 미덕은 무게중심이다. 그 무게중심이 흔들린다. 말을 신중히 하고 행동도 무거운 안철수 후보를 쳐다보는 보수층이 늘었다.
정치인은 말로 세상을 움직인다. 세계적인 명연설의 대부분은 걸출한 정치인들이 절박한 정국을 돌파하고자 국민에게 호소한 내용들이다. 그러므로 뛰어난 정객은 모국어의 연금술사요, 음유시인이기도 한 것이다.

어두운 밤의 등불 같은 고전, 주역은 말한다. 장차 배신할 사람은 그 말이 부끄럽고, 중심이 의심스러운 사람은 그 말이 산만하며 지켜야 할 것을 잃은 사람은 그 말이 굽힌다고. 중심이 의심스럽고 지켜야 할 것을 못 지키는 지도자를 국민이 어떻게 믿겠는가.



김종록 성균관대 한국철학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밀리언셀러 『소설 풍수』와 『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 『바이칼』 등을 썼으며 중앙일보에 ‘붓다의 십자가’를 연재했다. 본지 객원기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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