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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 온 6세女 성추행범 모습에 판사들 '경악'

여자아이 성추행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은 박모씨 재판에 등장해 당시 상황을 재연했던 박씨의 애완견 ‘준희’. 박씨는 준희가 성추행 범인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4일 서울북부지방법원 301호. 한 여성이 강아지를 품에 안고 법정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이례적인 강아지의 등장에 판사들도 놀랐다. 이 여성은 여자 어린이 A양(9)을 성추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박모(70)씨의 가족. 여자아이를 만진 건 박씨가 아니라 바로 이 강아지일 수 있다며 법정에서 검증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재판장인 김재환 부장판사(형사 11부)는 이를 허락했다. 파격이었다. 강아지가 법정에 출석해 범죄 입증에 참여하는 보기 드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법정에선 강아지 앞발이 어린이 엉덩이에 닿을 수 있는지, 강아지 발의 촉감이 사람의 손과 비슷한지, 강아지의 움직임이 성추행 상황처럼 진행될 수 있는지 등 ‘강아지 검증’이 이어졌다. 대법원 관계자는 “동물이 법정에 등장했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며 “극히 이례적인 일”이라고 말했다.

 문제의 사건은 지난해 11월 25일 오후 6시쯤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에서 벌어졌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박씨와 A양 등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 A양이 갑자기 뒤를 확 돌아봤다. 누군가 자신의 허벅지와 엉덩이를 만지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떤 할아버지와 강아지가 보였다. A양은 “할아버지가 나를 보고 웃고 있어 무서워 다른 엘리베이터를 탔다”고 진술했다. A양은 집에 가자마자 “뒤에 있던 할아버지가 몸을 만졌다”고 부모에게 말했다. ‘나쁜 손’ 주인공을 찾는 수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경찰은 ‘강아지를 데리고 있던 할아버지’를 추적한 끝에 박씨를 범인으로 지목했다.

엘리베이터 앞에는 감시카메라 없어

 박씨가 ‘나쁜 손’의 장본인임을 입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폐쇄회로TV(CCTV)가 있지만 1층 엘리베이터 앞에는 감시카메라가 없었다. 사건 당시 박씨와 A양 이외에도 배달원 등이 현장에 있었지만 목격자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동원한 게 거짓말탐지기. 그런데 박씨가 지병 때문에 오랜 기간 약을 복용한 탓인지 거짓말탐지기는 ‘탐지 불가’라는 답만 내놓았다. 측정 대상자가 거짓말과 진실을 말할 때 나타나는 민감한 몸의 변화를 측정할 수 없다는 얘기다. 결국 이런 상태로 재판이 진행됐고, 박씨 측은 “데리고 있던 개가 앞발로 아이의 허벅지 부근을 건드린 것을 착각한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주장을 내놨다. 이에 따라 유례없는 애완견의 법정 재연이 진행된 것이다.

 재판부가 오랜 숙고 끝에 내린 결론은 박씨의 유죄. 아이를 만진 건 강아지가 아니라 박씨라는 판단이었다. 박씨에게 징역 2년6월, 집행유예 3년이 선고됐다. 사회봉사 80시간, 성폭력 치료 강의 수강 40시간, 신상 정보공개 3년도 명령했다. 일주일에 1홉(소주 반 병 정도) 이상의 술을 마시지 말라는 당부도 덧붙였다. 형량에 대해 이창열 서울북부지법 공보판사는 “성폭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에 따라 5년 이상의 유기징역 또는 3000만원 이상 5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돼 있는데 최하한선을 선고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아지의 법정 재연 등을 관찰한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피해자는 ‘허벅지부터 엉덩이까지 위로 한 차례 쓰다듬는 느낌이었고, 쓰다듬는 느낌이 드는 즉시 뒤를 돌아봤는데 개는 가만히 있었다’고 진술했다”며 “개가 앞발을 아래 방향이 아닌 위 방향으로 움직였다거나 그것도 한 차례만 움직였다는 것은 경험칙상 상정하기 어렵다”고 유죄 판단의 이유를 밝혔다. 또 “피해자가 사건 당시 초등학교 2학년으로 개가 만지는 것과 사람이 만지는 것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지적 능력에 문제가 있어 보이지 않는다”며 “피해 어린이의 진술이 일관되고 박씨와 평소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니어서 특별히 무고할 이유나 동기가 없다”고 판시했다.

‘강아지 재판’ 2라운드

 박씨가 즉시 항소하면서 ‘강아지 재판’은 2라운드를 맞게 됐다. 박씨는 재판이 끝난 뒤 “법원이 어린아이의 말만 들은 것”이라며 “나이가 많아 봉사활동도 쉽지 않다”고 말했다. 박씨의 강아지는 슈나우저 품종 수컷으로 취재진이 직접 재 보니 몸길이 57㎝에 높이 43㎝, 일어서면 83㎝ 정도였다. 사람을 잘 따라 처음 보는 기자와도 장난을 곧잘 쳤다. 박씨는 “강아지가 사람을 잘 따른다”며 “분명 강아지가 아이를 보고 만진 것”이라고 항변했다. 그러면서 “5초 정도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라 나는 기억도 잘 안 나고 청각장애인이라 상황 파악이 잘 안 된다”며 “당시 다른 사람들도 옆에 많았는데 왜 나를 범인으로 몰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박씨 측은 당시 사건 현장에 있던 음식점 배달원과 10세쯤 되는 남자아이를 조사하면 결백이 입증될 것이라는 주장도 내놨다.

 하지만 수사를 담당했던 서울 노원경찰서 장세열 강력2팀장은 “조사 과정에서 할아버지가 강아지를 언급한 적이 없었다”며 “강아지가 신체 접촉을 했다면 사람 손이 만지는 것과 어떻게 느낌이 같을 수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결국 박씨냐, 강아지냐의 논란은 2심 재판부에서 또 한 번 심판대에 오르게 됐다. 2심 재판부도 동물의 출석을 허용할지 미지수이지만 법조계에선 애완견의 법정 재연이 이뤄진 데 대해 긍정적인 평가가 나온다. 노영희 대한변호사협회 대변인은 “입증 기회를 요구해도 제한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을 계기로 동물을 이용해 입증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이 열린 것”이라며 “피고인의 답답한 마음을 해소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성화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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