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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후이촨, 쑨원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밀착 경호

1958년 겨울,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 국민당 혁명위원회(민혁) 전국대회에 나타난 탄후이촨(왼쪽). 민혁 부주석이었던 항일명장 차이팅카이(가운데)와 초기 중공당원 샤오리즈(오른쪽)는 탄후이촨을 신해노인(辛亥老人)이라고 불렀다. [사진 김명호]
탄후이촨(譚惠全·담혜전)은 쑨원의 충직한 경호원이었다. 쑨원은 생전은 물론이고 사후에도 탄후이촨의 극진한 보호를 받았다.
1922년, 광둥(廣東)성 광저우에 총통부를 차린 쑨원은 통일전쟁(北伐)을 시작했다. 성장 천중밍(陳炯明·진형명)은 지방자치의 신봉자였다. 북벌을 탐탁해하지 않았다. 광둥군 총사령관을 겸하고 있던 천중밍은 쑨원을 없애기로 작정했다. 휘하에 1만5000명가량의 무장병력이 있었다. 쑨원의 군대는 거의 전선에 나가 있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88>

쑨원은 중국인답지 않게 사람을 잘 믿는 습관이 있었다. “의심 많아서 손해 볼 것 없다”는 만고의 진리를 무시할 때가 많았다. “의심은 죄악이다. 단 국민들이 국가 지도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에게 의혹의 눈초리를 보내는 것은 당연하다. 워낙 잘 속이기 때문이다.”

“광저우를 떠나라. 천중밍의 동향이 심상치 않다”고 일러바치는 사람이 있어도 믿지 않았다. 확인은커녕 “반란이 발생해도 광저우를 떠나지 않겠다”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6월 15일 밤, 광둥군이 총통부와 쑨원의 거처를 포위했다. 16일 새벽 2시, 총통부 비서와 군 연락책이 특무대장과 함께 쑨원의 방문을 도끼로 내리쳤다. 잠결에 피신을 강요당한 쑨원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다급하게 쑹칭링을 흔들어 깨웠다. “큰일 났다. 빨리 도망가자.” 잠시 후 쑨원의 후계자 중 한 사람이었던 후한민(胡漢民·호한민)의 동생이 달려와 합세했다. 쑹칭링은 이들을 거들떠보지 않았다. 까치발을 하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초로의 경호원이 눈에 들어오자 만면에 화색이 돌았다.
쑹칭링의 진가가 들어나기 시작했다. “중국에 나 같은 건 없어도 된다. 너는 없으면 안 된다. 내가 시간을 끌 테니 먼저 피신해라.” 쑨원은 의사 복장을 하고 세 사람을 따라 나섰다. 어렸을 때 동네 어른들이 자주 하던 “정 급할 때는 여자 치마 폭에 숨어라. 그것처럼 안전한 게 없다”는 말이 실감 나는 밤이었다. 그간 부하들 앞에서 큰소리친 걸 후회했다는 기록은 남기지 않았다.

쑨원의 탈출을 먼발치에서 지켜본 사람이 구술을 남겼다. “사방에서 총소리가 요란했다. 다섯 명이 총통을 에워싸고 나갔다. 총통은 백색 가운에 청진기 목에 걸고 약 상자를 들고 있었다. 와중에 응급 환자를 치료하러 나가는 사람들 같았다.”
다섯 명 중 네 명은 국민당 당사(黨史)에 이름을 남겼다. 나머지 한 사람, 탄후이촨은 사건 82년이 지난 2006년에 와서야 쑹칭링의 유물을 정리하면서 신원이 밝혀졌다. 1961년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아무런 직책이 없었기 때문이다.

상중(喪中)의 쑹칭링. 1925년 3월, 베이징 티에스즈골목(鐵獅子胡同) 5호. 국제사회에서 ‘웰링턴 쿠’라고 불리던 외교부장 구웨이쥔(顧維鈞)의 집이었다.
인간사가 다 그렇듯이 탄후이촨과 쑨원 부부의 인연도 우연히 시작됐다. 1911년 10월, 어쩌다 보니 신해혁명에 졸병으로 참여했고, 쑨원이 미국에서 귀국하던 날 주변에 칼 차고 왔다갔다한 게 다였다. 쑨원은 어수룩해 보이는 탄후이촨을 총애했다. 중요한 건 아니지만 같은 마을 태생이라는 것도 나중에 알았다. 쑹칭링의 신임도 남달랐다. 늦은 결혼을 한다는 소문을 접하자 직접 찾아가 옷과 철제금고를 선물할 정도였다.

쑨원에게 피신을 권한 네 사람은 단순한 비서들이었다. 말은 청산유수였지만 전쟁 경험이 없고 무기도 다룰 줄 몰랐다. 총알이 빗발치는, 이승과 저승이 종잇장 하나 차이인 상황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었다. 탄후이촨은 이들과 달랐다. 사격은 백발백중이었고 못하는 무술이 없었다. 현지인이라 광둥어에 능숙했고 지리에도 밝았다. 생김새도 유리했다. 나이가 많고(당시 49세) 체격이 왜소해 군인 티가 나지 않았다. 이날 쑨원은 탄후이촨 덕에 안전한 곳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1925년 3월, 쑨원이 베이징에서 세상을 떠난 후에도 탄후이촨은 쑨원의 영구(靈柩)를 떠나지 않았다.
2년 후, 엉뚱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베이징은 봉천군벌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의 천하였다. 1927년 말 봉천군벌 확대회의가 열렸다. 장제스의 국민혁명군(북벌군)에게 위협을 느낀 장쭝창(張宗昌·장종창)이 대담한 발언을 했다. “베이징 교외 샹산(香山) 비윈쓰(碧雲寺)의 금강보좌탑(金剛寶座塔)인지 뭔지에 안치된 쑨원의 시신을 없애버리자.” 난징에 쑨원의 묘지를 마련한 북벌군이 국부 쑨원의 시신을 모실 날이 임박했다며 기세가 등등할 때였다.

장쭝창은 언행이 일치하는 사람이었다. 부하들을 몰고 비윈쓰에 들이닥쳤다. 쑨원의 영구에 삿대질을 해댔다. “평생 혁명 타령만 해 대더니 꼴 좋다. 죽어서 탑 속에 갇힐 주제에.” 나이를 헤아리기 힘든, 초라한 모습의 탄후이촨이 노려보는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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