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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 잔뜩 모으면 뭘해?”CRM 열풍의 아픈 추억

영국의 세계적 대형마트 체인 테스코의 웹사이트. 고객정보에 관한 빅 데이터를 성공적으로 활용하는 기업으로 꼽힌다. [블룸버그 뉴스]
인터넷 인기 검색어 동향을 도표 등으로 체계적으로 보여주는 구글 트렌드(Google Trends), 여기 들어가 보면 흥미로운 사실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빅 데이터(Big data)를 키워드로 치면 대한민국의 관련 정보 검색량이 인도 다음으로 2위인 것이다. 국내 네티즌이 구글보다 네이버·다음 같은 토종 포털 검색을 월등히 선호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웬일일까 싶다.평소 친분 있는 국내 기업 경영진과 대화하다 보면 구글·아마존처럼 역사가 20년도 되지 않는 기업들이 어떻게 고객 데이터를 최대한 활용해 경쟁사와 차별화된 비즈니스 모델을 만들고 고속 성장해 왔을까 하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이처럼 빅 데이터에 대한 기업 경영진의 관심이 커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하다. 실제로 빅 데이터와 관련 선진 분석기법을 적극 활용하는 기업들이 경쟁사 대비 평균 5~6%의 높은 생산성을 보인다는 학계 논문이 나오기도 했다.

맥킨지 컨설팅 빅 데이터(Big Data)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기업이 빅 데이터를 제대로 분석하고 활용하는 데 서툴다. 어떻게 첫 단추를 끼워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우리 기업들은 해외 경영 트렌드를 빨리 따라가는 편이다. 하지만 유행 타듯 남들이 하니까 따라서 하다간 별 소득 없이 돈만 잔뜩 들일 수 있다. 가령 1990년대 후반에 고객관계관리(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CRM) 열풍이 불어 많은 기업이 막대한 투자를 해 관련 시스템을 구축했지만 효과를 제대로 본 곳이 많지 않았다.

과일가게 주인 영업장부에서 배울 점
엄청난 양의 고객 데이터를 모을 수 있는 정보기술(IT) 시스템을 구축해 놓으면 성과가 자연스레 뒤따를 것이라고 기대한 것이 안이했다. 영업팀의 고객정보 관리를 의무화하고 관련 데이터를 그때그때 입력하도록 했지만 현실적으로 잘되지 못했다. 외근이 잦은 영업직원들은 회사로 복귀해 가며 이러한 영업기록을 꾸준히 정리해 나가는데 상당한 업무부담을 느꼈다. 큰돈을 들여 구축한 CRM 시스템은 비싼 애물단지가 돼버렸다.많은 기업은 이러한 씁쓸한 추억 탓에 빅 데이터 및 선진 분석기법 전략을 수립하는 데 주춤하고 있다. 빅 데이터 또한 일과성 유행 아니냐는 의심이다. 하지만 맥킨지의 경험에 비춰 볼 때 지금이 실제 경영 성과에 연동된 현실적인 빅 데이터 전략을 수립할 만한 시기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이제 데이터 입력은 실시간으로 가능하고 훨씬 간편해졌다. 다만 빅 데이터 선진 분석기법 도입을 위해 유의할 점이 있다. 2~3년간 글로벌 기업들과 빅 데이터 전략을 공동 수립해 본 경험을 토대로 말씀드린다.

가장 흔한 실수는 데이터를 잔뜩 모아 놓은 뒤 ‘이를 갖고 어떤 일을 할까’ 사후적으로 고민하는 것이다. 이러면 곤란하다. 생각과 개념이 먼저고 데이터는 나중이다. 어떤 것이 효율적일지 동네 작은 가게를 예로 들어 보자. 필자가 오래전 거주한 동네에는 손님이 늘 바글바글하는 과일가게가 있었다. 주인에게는 보물과 같은 노트가 한 권 있었다. 낡고 손때 묻은 이 노트에는 외상값은 물론이고 단골 고객의 이름과 그 식구들이 좋아하는 과일의 종류까지 빽빽하게 메모돼 있었다. 우리 집만 봐도 부모와 우리 형제들이 좋아하는 과일을 속속들이 아니까 그날그날 들어온 신선한 것들을 제때 추천해 줬다. 집안 제삿날을 메모해 뒀다가 며칠 앞두고 “신선한 제수용 과일이 많이 들어왔다”는 전화를 걸어 오기도 했다. 단골집마다 제삿날은 물론이고 가장이나 안주인의 생일, 결혼기념일 등을 파악해 놓기도 했다.

빅 데이터 추진, 조급하면 그르쳐
과거 아파트 개발이 활발하던 시대에는 이사를 자주 다녔지만 이제 특정 거주지 정착 기간이 길어지는 추세다. 동네마다 10년 이상 사는 터줏대감이 많다. 기존 고객을 상대로 매출을 극대화할지 아니면 새로 이사 온 사람들을 상대로 판촉을 강화할지 과일가게 주인 입장에선 자명하다. 그래서 고객 경조사 정보 축적이 긴요한 것이다. 집집마다 과일을 언제 많이 사는지, 계절별로 어떤 과일은 선호하는지, 경조사 때는 어떤 과일을 많이 쓰는지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했다. 신규 고객을 늘리기보다 충성고객 마케팅을 강화해 매출을 늘릴 수 있었다.

근래 마케팅 이론으로 자주 거론되는 ‘상품예측(Next-product-to-buy)’ 모델이 바로 그 동네 과일가게 아저씨의 발상인 것이다. 단지 낡은 노트가 전산시스템이고, 주인 머리에서 나온 아이디어는 컴퓨터 작업을 통해 가르쳐준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요컨대 빅 데이터를 잔뜩 쌓아놓고 무엇을 할지 고민하는 기업 경영진이 있다면 다음부터는 그 순서를 바꿔봐야 한다. 빅 데이터를 어디에 쓸지 구체적으로 방향을 정한 뒤 어떤 데이터를 모을지 판단해야 한다.

빅 데이터 하면 영국의 다국적 유통업체 테스코를 흔히 거론한다. 매주 10억 건 이상의 고객 로열티 카드 데이터를 분석해 고객군을 세밀하게 나누고 고객군별로 차별화된 할인 패키지를 제공한다. 이 덕분에 지난 10년간 세계 대형마트 시장에서 13%의 시장점유율 향상을 기록했다. 이 회사도 처음에는 고객군을 6종 정도로 나눴지만 부단한 연구 노력과 시장 테스트 결과 고객군을 훨씬 세분화해 마케팅 시스템에 내재화할 수 있었다. 오늘날엔 매주 고객에게 전달되는 e-메일·문자 등 판촉 메시지가 1000만 종에 이를 정도다. 소비자를 곡식 낟알처럼 아주 미세하게 나눠 공략하는 것이다.

빅 데이터와 선진 분석기법을 이용해 영업성과를 높이려면 현업 관리자들에게 데이터에 의미 부여를 하는 안목을 길러줘야 한다. 그러려면 ‘검증·학습(Test & Learn) 프로그램’이 작동해야 한다. 목전의 성과를 급히 내도록 서두르는 건 근시안적이다. 우리가 다양한 운동을 통해 근육을 조금씩 만들어 가듯이 학습량이 쌓이고 역량이 서서히 늘어갈 수 있도록 긴 호흡으로 기다리고 투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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