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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쏟아도 멀쩡한 옷, 연잎 흉내내서 만들죠

임현의 박사가 대덕연구개발특구 내 한국기계연구원 로비에서 자연모사공학의 미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생명체가 그렇듯 효율이 높으면서도 자연에 해를 끼치지 않는 제품이 가능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대전=프리랜서 김성태
아무리 들여다봐도 평범한 유리 조각이었다. 반나절 동안 질소가스를 이용한 세정, 나노입자 코팅, 플라스마 건식 식각(에칭) 등 복잡한 처리를 거쳤다지만 맨눈으로는 이 유리 조각의 ‘신비’를 알 길이 없다. 유리 조각을 손에 든 임현의(42·사진) 박사의 눈이 빛났다.“흙탕물 속에서도 먼지 하나 없이 물에도 젖지 않은 채 고고한 연잎 아시죠? 그 안에 담긴 자연의 지혜를 유리 조각 위에 재현했다고 보면 됩니다.”

파워 차세대 ⑤ 한국기계연구원 '나노 자연모사'연구실장 임현의 박사

여느 나뭇잎과 비슷해 보이는 연잎이 빗물과 흙탕물을 만났을 때 돋보이는 것처럼, 이 유리 조각도 물과 먼지를 만날 때 비범해진다. 특별한 유리 조각에 떨어진 물방울은 퍼지지 않고 맺혀 굴러 내린다. 먼지나 오염물질도 함께 없어지니 더러워질 틈이 없다. 다른 기능도 숨어 있다. 주변 빛의 반사를 최소화해 햇빛 아래에서도 투명도가 높다. 이건 나방의 눈 구조를 흉내 냈다. 자연을 닮은 기술의 가치는 크다. 스마트폰의 화면에 적용하면, 더러워지지 않고 지문도 묻지 않으며 야외에서도 선명하게 잘 보이게 된다. 유리가 아닌 섬유에 적용하면 빗물뿐 아니라 커피가 쏟아져도 더러워지지 않는 옷이 만들어지고, 카메라 렌즈에 적용하면 작지만 선명하고 적목 현상도 없는 제품이 가능하다. 태양전지, 건축용 유리나 페인트 등 상업적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한국이 앞서갈 수 있는 개척 분야
임 박사는 한국기계연구원 ‘나노 자연모사’ 연구실장이다. 대전광역시 대덕연구개발특구에 자리 잡은 연구실은 육중한 실험장비로 가득하지만, 임 박사와 20여 명의 연구진은 그 속에서 자연을 배우고, 자연을 모사한다. 자연모사공학(Nature Inspired Engineer-ing)은 21세기에 급부상하는 새로운 연구 분야다. 말 그대로 자연의 내면, 생물체의 신비를 탐구하고 복제해 인간에게 이로운 제품을 만들려는 시도다. 생물 모방(biomimicry), 또는 생체 모방이라고 불린다. 생명체뿐 아니라 자연 전체에서 영감을 얻는다는 의미에서 ‘자연중심 기술’로 부르자는 의견(이인식 과학칼럼니스트)도 있다.

연잎 표면을 1만 배쯤 확대해 보면 무수한 돌기(왼쪽 사진)를 확인할 수 있다. 물이 퍼지지 않고 물방울로 맺히는 연잎 효과(lotus effect)의 비밀이다. 이를 흉내 내 유리 표면에나노 크기의 입자를 만들면 머리카락 굵기보다 작은 물방울(흰 공 모양)도 그대로 맺혀굴러 내린다. [사진 한국기계연구원 나노자연모사연구실]
자연 모사는 이미 오래된 기술이다. 라이트 형제의 비행기도, 선박의 유선형 바닥도 모두 자연 모사의 한 예다. 하지만 새롭게 각광받기 시작한 건 10여 년 전부터다. 생물 구조를 분자 단위에서 이해하고, 이를 실제로 본뜨는 나노 기술이 크게 발달한 결과다. 세계적으로 새로운 분야이다 보니 한국도 앞서나갈 가능성이 충분하다. 미국의 경우 1997년 『생물 모방』을 출간한 재닌 베니어스(저술가)가 만든 비영리단체 생물모방협회와 여기서 만든 인터넷 사이트 애스크네이처(asknature.org) 등이 최신 연구를 알리고 독려한다. 베를린 공대를 주축으로 30여 개 대학과 연구소들이 모여 연구 네트워크(BIOKON)를 독일에 설립한 것도 2001년의 일이다. 국내에서는 한국기계연구원과 포스텍, KAIST 등에서 왕성하게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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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모사공학 기술은 ‘사람의 몸’에도 적용될 분야가 많다. 임 박사 연구실에서도 이런 연구를 여럿 진행하고 있다.
인공감각 기술이 대표적이다. 생체 모사 청각 소자를 개발하는 이 연구는 한마디로 속귀에 자리 잡은 달팽이관의 기능을 대체하는 게 목표다. 기존의 인공 달팽이관은 너무 크고 복잡해 미관도 안 좋고 배터리 소모도 크다. 연구팀은 실제 달팽이관의 형태를 모사해 수백 나노미터(㎚·10억 분의 1m) 크기의 유모 섬유(청각세포)를 재현하고, 초소형 전자기계장치(MEMS)로 구현한 마이크에다, 생체 이식용 소재를 써서 완전한 체내 이식을 목표로 한다. 과학재단이 선정한 미래 유망 파이오니어 융합연구 과제 중 하나로 2단계(3년 예정) 연구가 한창이다. 융합연구단장을 맡고 있는 김완두 박사는 “원천기술이 완성되면 5년쯤 임상시험을 거쳐 2020년까지 실용화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공감각 기술과 인공장기 소재 개발 중
인공장기 소재도 개발 중이다. 연골이나 머리뼈를 대체하기 위해서는 생체 지지체(스캐폴드)를 만든 뒤 여기에 세포를 키워 사람 몸에 이식하게 된다. 연구실은 몇몇 의과대학과의 공동 연구를 통해 각종 장기에 가장 잘 맞는 형태의 지지체를 만드는 기술·장비를 개발한다. 임 박사는 대전에서 태어나 고교까지 마친 토박이다. 연구에 푹 빠져 살지만 애환이 없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발표를 앞두고 핵심 장비가 고장 나 애를 태운 적도 여러 번 있어요. 지난해에는 인근 지역 정전으로 인공장기 연구실에서 배양하던 세포가 모두 죽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바쁠 때는 밤 10시 전에 퇴근한 기억이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시댁과 친정 등 가족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겁니다. 초등학교 동창이자 경찰관으로 근무하는 남편과 두 아들이 제 연구 생활을 적극 응원해 주는 것도 고맙죠.”

고향에서 연구활동에 전념하는 게 행복하다는 임 박사. 하지만 과거엔 자신의 직장이 ‘기계’를 연구하는 곳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다. 임 박사는 대학(숙명여대), 대학원(고려대)에서 화학을 전공했다. 전공 분야를 넘어 학제적·융합적 연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박사후 과정을 거친 미국 UC버클리에서다. 임 박사가 속한 버클리대 연구팀은 메릴랜드대 기계공학과와 함께 초소형 전자기계 장치(멤스·MEMS) 관련 공동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멤스는 크기가 미크론(㎛·100만 분의 1m) 단위여서 서로 달라붙는 게 문제였다. 임 박사는 멤스 표면에 자기조립단분자막을 덮어 달라붙음 현상을 줄이는 방법을 찾아냈다.

“여러 학문 분야가 힘을 모아 문제를 해결하고, 이 과정에서 새로운 연구 분야가 창출되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미국 대학들은 학교·학과 구분을 넘어선 교수들 사이의 네트워크가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큰 관심이 없었던 기계공학과 내 연구 분야가 만나면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습니다.”
임 박사의 융합적 연구 경력은, 마침 새로운 미래 연구 분야를 찾던 기계연구원과 인연이 닿았다. 임 박사는 2003년 기계연구원에 들어올 때 대전 본원 최초의 여성 연구원으로 화제를 모았다. 지난해에는 여성으론 처음 기계연구원 보직 실장이 됐다.

실장으로서 행정 업무까지 감당하는 게 쉽지는 않다. 임 박사는 “실장이 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반가움보다 걱정이 앞섰던 기억이 난다”고 털어놨다. 요즘도 연구원들 사이의 팀워크를 조절하고 각종 정책 보고서를 쓰는 행정 업무까지 하느라 바쁘다. 정부 출연연구소의 역할도 고민거리다.
“출연 연구소는 10년 후를 내다보며 기초·원천 기술을 개발하는 게 맞는 것 같아요. 하지만 요즘엔 기업체나 대학 연구팀들과 똑같이 결과를 놓고 경쟁하는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기업체·연구소·대학의 역할을 나눠 협력할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제품화를 위해선 인력·자금을 갖춘 대기업이 더 많이 기여했으면 합니다.”
정부연구소, 10년 후 기초 기술 주력해야

자연모사 기술의 강점은 더 좋은 ‘물건’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는다. 사람과 자연을 위한 지속 가능한 기술 개발의 열쇠가 될 수 있다는 게 임 박사의 생각이다. 좋은 예가 ‘적정 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이다. 이는 개도국의 가난한 이들이 실제 쓸 수 있는 값싸고 간단한 도구나 기술을 뜻한다.
“물 부족에 시달리는 가난한 나라에서 복잡한 기계장치는 의미가 없습니다. 비싸기도 하지만 유지·관리도 어렵기 때문이죠. 우리가 연구 중인 나노 구조체를 이용한 물 수집 기술이 확립되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이 연구의 단초가 된 것은 사막 딱정벌레다. 물 없는 아프리카 나미브 사막에서도 생존하는 이 벌레의 각질층에는 공기 중에 있는 소량의 습기를 효율적으로 빨아들이고 보관하는 구조가 숨어 있다. 나노 구조물로 이걸 흉내 내는 게 임 박사의 관심 분야다.
임 박사는 15일 프랑스 파리로 떠났다. 관련 학회에 참석한 뒤 프랑스의 비영리단체인 OPUR(국제 이슬 활용 기구)을 방문해 앞으로의 협력 방안을 협의하기 위해서다. 이 단체는 물 부족에 시달리는 개도국 사람들을 위해 이슬·안개 속에서 물을 확보하는 친환경적인 적정 기술 도구를 개발·보급한다. 임 박사는 “아직은 나노 구조물을 만드는 데 비용이 많이 들지만, 기술이 완성돼 대량생산으로 값이 싸지면 일반 그물막을 만드는 수준의 비용으로 깨끗한 물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가 꿈꾸는 연구 주제는 이렇게 환경과 자연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담고 있다. 자연에 순응해 사는 생물들처럼 수동적(passive)이지만 효율적이고 자연친화적인 기술을 개발하자는 의미다. 장기적으로는 상처가 나도 새 살이 돋는 생명체의 자기 치료(self-healing) 능력을 나노 구조체를 통해 재현하는 게 목표다.
임 박사는 “자연에서 배운 기술은 효율적이고, 자연에 해(害)를 적게 주고, 지속 가능하다”고 말했다. 자연모사공학의 길을 개척하는 임 박사의 표정이 밝은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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