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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부문 당선작/평론 부문 당선작] 이름을 찾는 주체들의 문장 -이재원-

1. 꿈에서 깬 ‘나’들의 목소리



신해욱, 이근화, 심보선의 시를 중심으로

 꿈에서 막 깨어 정신을 주워 담은 당신이 가장 먼저 쓰고 싶은 문장은 무엇인가? 2000년대 한국 시들은 스스로를 꿈에서 깨우기 위해 자학도 서슴지 않으며 ‘자아와 세계의 동일성’이라는 서정의 오래된 문법과 미학의 굴레에서 벗어나려는 혁신적 노력을 계속해왔다. 내가 구성한, 나를 닮은 것들로 채워 있던 세계에 균열을 가하자 동일성의 우주, 완전하던 꿈의 세계는 마침내 찢어지게 되었다.



 문제는 이제 그 달콤한 꿈에서 깬 이후로 옮겨왔다. 최근 시들에서 주체는 ‘나’와 내가 아닌 것, 내 밖의 타자성을 구분하는 인식을 토대에 두고서 한국 사회의 정치, 경제적 혼돈이나 분열과 맞물리며 바깥의 문제, 즉 정치와 윤리의 문제에 뛰어들어 수평적으로 몸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꿈에서 깨었으나 아직 명료한 의식을 쥐지 않은 채 혼몽함 속에서 유영하는 이들의 몸짓은 꿈도 현실도 아닌 곳에 머무르고 있기에 아름답다. 그리고 이 몸짓들은 자주 묻는다. 꿈에서 깬 ‘내’가 시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요? ‘나’로부터 출발해 몸을 넓힌 서정의 자아가 어떤 문장을 완성해가는 중인지 이제 들어가 보자.



2. 휘청여서 무수한 ‘I’ - 신해욱의 시



 서정은 본질적으로 ‘나’라는 1인칭으로부터 출발한다. 신해욱의 시에서 ‘나’는 매우 빈번히 등장하는데, 이 ‘나’들은 1인칭이라는 자명해 보이는 존재에 대해 질문한다. 그리고 이러한 그의 시적 방법론의 배후에는 자아와 타자의 분리 이후 진정성을 지닌 뚜렷한 주체의 성립을 갈구하는 욕망이 잠재해 있다.

 

 나의 얼굴은 눈처럼 하얗고



 눈송이처럼 많다.



 -‘화이트’ 부분(『생물성』, 2009)



 신해욱의 시에서 나는 무생물적인 벽의 무늬 앞에서도 타자에 대해 경험하며 시선을 느낀다. 이 섬약한 ‘나’는 불안 속에서 차라리 “매일 다른 눈을”(‘눈 이야기’) 뜨며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다니기로 한다. 신해욱에게 얼굴이 여러 개라는 것의 의미는 주체의 복수성을 말하기보다는 주체와 분리된 신체로서의 것, 나아가 신체도 아니라 신체를 감싸고 있는 가면 같은 것에 가깝다. 얼굴이 나의 주체성을 드러내는 투명한 표상이 되지 못하고 분리될수록 주체는 더욱 가려진다. 또한 주체를 걷어내어 불투명한 하얀색으로 존재하는 얼굴은 무한한 타자의 시선 앞에서 “눈송이처럼 많이” 증식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이토록 무수한 얼굴들에 시달리다가 존재의 개별성을 상징하는 생일을 맞으면서야 나는 오롯이 ‘나’에 대해 집중해본다. 이때 “나는 내가 되어가고/나는 나를/좋아하고 싶어지지만”(‘축, 생일’)이라는 솔직한 심경이 드러난다. 여기서의 네 개의 ‘나’들은 의식 중에 있는 나와 사회 속을 사는 나, 그리고 진정 원하는 주체로서의 나라는 여러 영역의 경계를 디디며 의미를 생성한다. 신해욱의 나들은 그러므로 하나이지만 여러 피를 지닌 다수로 이해해야 하며, 이 혼혈적 갈래를 감추기 위해 혹은 감춰져야 하기에 ‘나’는 주체로서의 나와 상관없이 얼굴을 바꾸고 다닌다. 주체로 서기도 전에 완벽한 인간성을 요구받는 현실은 헛된 얼굴만을 늘어나게 했고 ‘나’라고 부를 만한 것을 정립하지 못한 상태에 처했기에 역설적으로 그의 시에서 ‘나’는 많은 부분에 등장하는 것이다. 이 반복은 나를 얻고자 하는 주술과도 같이 들린다.



 이때 희미해진 주체는 나를 벗어나는 행위를 통해 초월을 이루고자 한다. 내 안의 어떤 나와 타자가 동일화되는 부분을 들춰냄으로써 내 안의 타자성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존재를 확장하며 진정한 주체의 성립을 희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너만 좋다면”(‘보고 싶은 친구에게’)이라는 전제하에 특정한 나는 타자의 목소리로의 변신을 시도한다. 이처럼 신해욱의 시들은 언젠가 얼굴에 가면 없이도 웃을 수 있기를, 거짓된 백색이 아닌 투명함을 지닌 생물성으로의 나를 드러낼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정의가 내포하는 사회성과 신체성을 초월하기 위해 오늘도 신해욱의 무수한 ‘나’는 얼굴을 가릴 마스크와 안대를 여러 개 준비한다.



3.‘우리’라는 무형의 몸짓, ‘Am’ - 이근화의 시



 원하는 주체를 얻지 못한 나, 원하는 주체가 무엇인지도 불명확한 나는 기계들처럼 진화한다. 그런데 이 진화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나는 점점 더 물렁해지며 아무 냄새도 피우지 않는다”(‘우리들의 진화’, 이하 동일)는 사실이다. 나는 “사람들의 팔과 다리를 잡아먹는” 프레스기의 진화 앞에서 “빠른 속도로 자라”날 수밖에 없으며, “나의 팔과 다리는 끝까지 나의 것”이었으면 하는 당연해서 더 처연한 소망이 가능해진다. 쉼을 용납하지 않는 속도 속에서 팔다리가 사라진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동그라미”가 된다. 이 동그라미는 얼핏 나를 자주 웃고 자꾸 명랑하게 하는, 갈등이 없으며 모든 것이 나에게로 회귀하는 완전한 원형으로 진화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진화한 동그라미는 자주 웃고 명랑해지는 만큼 사실은 차가워지고 외로워지며, 존재자는 평면적이고 개성이 퇴화된 채 비본래적 존재로 고립된다.



 우리는 이 세계가 좋아서



 골목에 서서 비를 맞는다



 (…)



 지상으로 떨어지면서 잃어버렸던



 비의 기억을 되돌려주기 위해



 흠뻑 젖을 때까지



 흰 장르가 될 때까지



 비의 감정을 배운다



 -‘소울 메이트’ 부분(『우리들의 진화』, 2009)



 이데올로기적 호명으로서의 ‘우리’는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차이를 동일화할 때 가능하다. 그러나 이근화의 ‘우리’는 자아가 타자의 본질을 묵인한 채 소통이라는 환상 속에서 호명한 우리, 타자와의 경계를 구분 짓고 배제하는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소울 메이트’인 우리는 ‘이 세계’를 공통으로 좋아하는데, 이는 자아와 타자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는 익명적 비인칭에 가까운 ‘비의 세계’다. 비의 세계에서의 기억과 감정은 “지상으로 떨어지면서 잃어버렸던”, 의식 이전의 억압이나 동일화가 필요하지 않은 세계에서의 것과 가깝게 읽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흰 장르가 될 때까지”, 즉 너 혹은 나라는 존재들 사이의 규정과 경계가 지워진 모습으로서의 비인칭적 세계를 좋아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내밀한 동일성이 익명의 세계에 관한 것이므로, ‘우리’는 시집 곳곳에서 빈번하게 호명될수록 ‘누구나’의 의미와 유사해진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자꾸만 “우리를 지울 때까지” 익명의 존재가 되기 위해 달리는가. 그것은 존재자 없는 존재, 즉 익명적 있음이라는 상태에서 나올 수 있는 주체의 성립을 향한 의지 때문일 것이다. 깨어남 이전에 잠이라는 상태가 있어 우리가 의식의 존재를 알 수 있듯, 익명적 있음의 상태 속에서 주체는 존재할 가능성을 지닌다. 기계의 진화와 같은 속도로 본래적 존재로서의 나는 퇴화되고 있을지 모르는 지금, 주체 또한 점점 몸을 둥글려 자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권태와 무기력을 느끼는 지금, 이근화가 호명하는 ‘우리’는 본래적 주체를 되돌려오기 위한 절실한 외침으로 들린다. 진정한 주체의 성립은 자기 안에서는 결코 이뤄질 수 없으며, 이데올로기가 지워지고 나와 타자가 구분된 후 맺게 되는 관계들을 통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주체는 ‘우리’라는 개념의 본래 의미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음을 알기에, 이근화 시의 ‘우리’들은 몸을 비우고 비인칭의 세계, 즉 세계 안에서 be동사가 되기를 자청하며 기존의 의미와 세계관을 지워나가려 한다. 아무도, 아무것도 아닌 ‘우리’는 “마구 굴리면서 땀처럼 눈물처럼/우리를 만들어 보자”(‘그림자’)는 마음으로 시의 세계를 쌓아간다. 시의 이러한 존재 방법은 이전 서정의 한계를 비추는 것이며, 잃었던 윤리적 주체를 구축하고자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비인칭의 세계에 존재하는 이 불완전한 문장(‘I Am….’)은 무엇을 찾고 있는가.



4. 나는, ‘Love’ ― 심보선의 시



 진정한 주체로의 회생을 갈망하는 서정의 ‘나’들은 거대한 슬픔 덩어리인 세계 속에서 생경한 몸이 되어 새로운 이름을 얻기 위해 분투한다. 그리고 심보선 시에서의 주체는 홀로 있을 때 찾아오던 고독과 슬픔 속에서 자신의 바깥을 향해 손 내밀기 시작한다.



 나는 ‘나’라는 말이 양각일 때보다는 음각일 때가 더 좋습니다.



 하지만 내가 ‘나’라는 말을 가장 숭배할 때는



 그 말이 당신의 귀를 통과하여



 당신의 온몸을 한 바퀴 돈 후



 당신의 입을 통해 ‘너’라는 말로 내게 되돌려질 때입니다.



 -‘‘나’라는 말’ 부분(『눈앞에 없는 사람』, 2011)



이 시에서의 주체가 밑바닥에 놓이고 심지어 음각으로 쓰인 ‘나’라는 말을 마음에 들어 하는 까닭은 그것이 “사라질 운명을 감수하고” 쓰였기 때문이다. 사라짐을 감내하면서 고되게 ‘나’를 새기는 일은 더 이상 ‘나’의 이름 몇 글자로 세계를 완성할 수 없다는 자각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이며, 나를 지우면서까지 언제든 당신과 함께할 준비를 하는 과정이자 미래를 가능하게 하는 진정한 주체로 거듭나기 위한 일이다. 그렇기에 이 주체가 가장 바라는 ‘나’는 ‘당신’이라는 절대적으로 다른 존재에게 닿아 “귀를 통과하여/당신의 온몸을 한 바퀴 돈 후/당신의 입을 통해 ‘너’라는 말로” 되돌려지는 나, 즉 타자의 타자성을 인정하며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 성립되는 주체인 것이다. 당신이 없이 홀로 뱉어지는 ‘나’라는 말은 듣고 소화시키고 말해줄 ‘당신’이 없다면 죽음이라는 무(無) 앞에 선 어둠과 고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심보선의 시에서 주체는 ‘너’ ‘당신’이라는 완전한 타자와의 만남을 통해 형성될 때 슬픔으로부터 잠시 빠져나온다. 서정의 ‘나’가 ‘너’라는 타자를 향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막연히 눈앞에 없는 “당신을 향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미소 짓고 발걸음을 옮길 때(‘텅 빈 우정’), 지루하던 심장은 새로운 주체가 되고 다른 심장 박동이 되어 뛰기 시작한다.



 윤리를 지키려는 시인들의 몸짓을 통해 ‘나’에게로만 집중되던 사랑의 물결은 어느덧 내 몸 밖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이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 특별한 주체들의 행위가 나에게로만 향하던 사랑을 거두어 내가 아닌 것, 즉 타자와 세계를 향해 더 넓게 퍼붓기 위함이라는 점이다. 이때의 사랑은 사랑받기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랑하는 것 자체로 목적이 되는 자기지시성을 지니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들의 사랑은 그것이 닿는 대상에 대해 무한히 열려 있으며, 주체 자신의 충족이나 욕망과는 별개로 ‘사랑’이라는 행위 자체, 즉 방법적 사랑을 그치지 않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사랑은 윤리적이다.



 잃어버린 이후 오랫동안 찾아 헤맨 이름인 ‘사랑’. 우리는 이제 과거의 나를 잃기를 주저하지 않은 채 답이 없는 곳으로 사랑을 보낸다. 돌려받지 못할 문장이라 더 아름답다. 이 사랑이 비록 완전한 합일이나 쌍방의 형태가 될 수 없는 영원히 불가능한 것에 속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세계를 향해 “도리 없이 도리 없이 끌어안으며”(‘지금 여기’) 사랑을 할 때, 주체는 “한 번 심장이 뛸 때마다 한 개의 기념비적 미래”(‘심장은 미래를 탄생시킨다’)에 가까워진다. 나는 비로소 ‘사랑’이 된다. 사랑으로 존재한다. 내가 바로 사랑이다!(I Am Love!) “그리하여 나는 지금 여기에 있다 인간이기 위하여 사랑하기 위하여”(‘지금 여기’). 그리고 이 문장에 마침표는 영원히 찍히지 않을 것. <요약본>



▶이재원 평론 전문



[평론 당선 소감] 문학 근처 서성이던 나 … 문학은 편안하게 포옹해주었네



집에 가는 길에 스쳐가는 바람과 마주할 때가 있다. 지금의 이런 감촉의 바람이 이전에도 곁에 있었을까. 내 언저리에서 머물다 사라지거나 떠나간 것들을 떠올리는 날이 많았다. 그럴 때면 그 부재가 결국 내 탓인 것 같아 바람을 입에 담고 제대로 삼키지 못했고, 버리지 못하는 것들의 수만 늘어갔다. 변하지 않는 것과 가질 수 없는 것이 지닌 숙명적인 불가능성은 나를 문학의 근처에서 서성이도록 했다. 소용없는 일에 사랑을 쏟을 줄 아는 온기는 소중한 것이니.



 하늘이 유난히 하얗고 차가워 보이던 날, 소용없는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내게 문학은 편안한 온도로 포옹해주었다. 그때의 과분한 기쁨을 길이 잊지 않으려 한다. 부족한 점 많은 글을 따뜻하게 읽어주신 이광호·김미현 선생님께 깊이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 아직 막막함이 앞서지만 앞으로의 시간을 믿으며 노력하려 한다. 가볍지 않은 마음과 정직한 생각을 곁에 두고 계속해서 읽겠다는 행복한 약속을 해본다. 혼자만 보고 쓰던 세계를 함께 보게 되기에 설렘만큼 책임도 밀려오지만, 고마운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보니 잘해 낼 수 있겠다는 용기가 생긴다.



 제 생에 시라는 세계의 빗장을 열어주시고 인도해주시는 박주택 선생님, 늘 격려해주시는 김종회 선생님과 경희대 국문과의 여러 선생님들, 경희문예창작단과 현대문학연구회의 선후배님들, 감사합니다. 언제나 따뜻하게 있어주며 축하 건넨 사람들 모두, 계속 있어주세요.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그리고 좋아하는 일에 열정 쏟는 삶을 곁에서 보여주시는 아빠·엄마를 비롯해 할머니, 동생 이용훈·이준경, 함께 기뻐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끝으로 오롯이 혼자인 나를 매일 다른 표정으로 위안해주는 녹천역, 내일도 웃어줘.



◆ 이재원=1986년 서울 출생. 경희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동 대학원 석사 졸업.



◆평론 본심 진출작(6편)



● 권시온 : 디지털 코드와 진공의 시학-최동호론



● 박명기 : 모글리 신드롬-‘가능성’이라 불리는 아이들



● 방인석 : 죽음의 형식-김수영론



● 안지영 : 폐쇄된 텍스트에서 살아남는 법-최제훈론



● 이재원 : 이름을 찾는 주체들의 문장-신해욱, 이근화, 심보선의 시를 중심으로



● 주완식 : 존재 증명의 토포스, 분신으로서의 몸과 언어



[평론 심사평] ‘나’에서 다인칭으로 … 최근 한국시의 흐름 잘 짚었다



평론 본심 심사 중인 이광호(왼쪽)·김미현씨. [김도훈 기자]
좋은 문학평론은 특정한 작품에 대해 말하는 방식으로 ‘문학적인 것’에 대해 말한다. 특정한 텍스트를 대상으로 하고 텍스트를 경유해야 한다는 것은, 비평의 숙명이면서 비평의 매혹이기도 하다. 문학비평은 작품의 매혹과 함께할 때만 빛날 수 있다. 문학작품의 매혹을 발견하고 그것을 맥락화하고 마침내 그 매혹의 일부가 될 때, 비평은 완성된다.



 예심을 통과한 비평들은 시에 관한 것이 현저히 많았다. 그것이 최근의 비평적 흐름과 관계가 있는지는 단언하기 어려웠다. 마지막까지 논의된 글은 세 편이었다.



 ‘모글리 신드롬’은 ‘아이’가 상징질서에 편입되면서 겪는 폭력의 양상이라는 맥락으로 최근의 시를 읽어 나간 점이 독특하고 창의적이었다. 각각의 텍스트에 대한 분석력도 인정할 수 있었지만, 때로 모호하고 현학적인 서술들과 개별 텍스트들 사이의 논리를 만들어 가는 힘에서 아쉬움이 있었다.



 ‘폐쇄된 텍스트에서 살아남는 법’은 젊은 작가 최제훈의 소설에 대한 비평이다. 탄탄한 기본기를 바탕으로 문장력과 분석력에서 안정감을 보여 줬다. ‘괴물’로서의 텍스트와 ‘복수’의 의미를 연결시키는 발상은 흥미롭고 문제적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최제훈 소설에 대한 기존의 논의를 넘어서는 문제의식은 아니라고 할 수 있었다.



 당선작이 된 이재원씨의 ‘이름을 찾는 주체들의 문장’은 최근의 한국시에서 ‘나’의 동일성으로부터 벗어나 다인칭의 목소리로 나아가는 흐름을 의미화하고 있다. 젊은 시인들의 텍스트를 비평적인 틀로 엮어내는 문장력과 구성력이 돋보였고, 그것이 재래적인 서정적 자아와 무엇이 다른가를 설명해 내는 능력도 인정할 수 있었다. ‘비인칭적 우리’와 윤리와 사랑의 관계에 대한 좀 더 밀도 있는 논리가 아쉬웠지만 그런 논리의 시도 자체가 충분히 의미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었다. 이씨의 비평이 그 비평적 가능성에서 신뢰할 만하다고 심사위원들이 판단한 것은, 텍스트의 매력 안에서 비평의 논리를 찾아내는 데 적극적이고 충실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본심 심사위원=김미현·이광호(대표집필 이광호)



◆예심 심사위원=권혁웅·김영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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