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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수감중 사시합격하자 안기부 찾아와…"

민주당 문재인 후보는 지난 4·11 총선에서 당선된 다음날인 4월 12일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인사를 하러 봉하마을에 갔다. 사진은 노 전 대통령 기념관에 전시된 사진 앞을 걸어가고 있는 문 후보.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부산 선대본부장, 노무현 대통령 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시민사회수석비서관, 다시 민정수석, 노무현의 마지막 비서실장, 그리고 노무현재단 이사장. 문재인이라는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2002년 말부터 4·11총선까지 약 10년간 오직 노무현만으로 수식되어 온 그가 민주당 대통령 후보가 됐다. ‘대통령 문재인’을 말하기 시작한 지 6개월 이 채 되지 않았다.

◆유치장에서 사시 합격 통보

부산 경남고 재학 시절 소풍 가서 친구들과 함께 기념 촬영한 문재인 후보(뒷줄 가운데).

그는 6·25전쟁 중인 1952년 경남 거제도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흥남의 문씨 집성촌에서 살아온 부모는 ‘흥남 철수작전’으로 한반도의 남쪽 끝까지 피란내려 왔다. 어머니가 연탄배달을 해야 했을 정도로 피란민의 삶은 가난했다. 문재인은 유년 시절을 얘기할 때마다 어머니의 연탄 배달을 돕다가 리어카와 함께 길가에 처박혔던 일을 떠올린다. 그는 부산의 명문이었던 경남중-경남고를 나왔다. 건축가 승효상씨 등이 그와 경남고 동기다. 경남고엔 전체 수석으로 입학했고, 입학 후 문과에서 1등을 할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그러나 모범생은 아니었다. 지역 명문가 자제들이 많이 입학한 경남중·고에서 계층간의 위화감을 경험한 그는 『사상계』 같은 사회비평 잡지를 탐독했고, 술·담배에도 손을 댔으며, 싸움을 하다 정학도 당했다. 당시 별명이 ‘문제아’였다고 스스로 회고한다. 그는 재수 끝에 4년 장학금을 받으면서 사법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경희대 법대(72학번)에 진학했다. 그러나 대학 입학과 더불어 유신체제가 시작되면서 운동권 학생의 길을 갔다. 대학 3학년 때는 총학생회 총무부장을 맡았다. 당시 총학생회장이 강삼재 전 신한국당 사무총장이었다. 학내에서 유신 반대 시위를 주도한 그는 제적을 당했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문재인 후보가 1976년 특전사 예하 1공수여단 3대대 복무 시절 낙하산 군장을 하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석방되자마자 입영통지서가 날아들었다. 사실상 강제징집이었다. 신병훈련을 마친 그가 배치된 곳은 특전사령부 제1공수특전여단. 당시 특전사령관은 12·12 때 신군부 세력에 의해 총격을 당했던 정병주 소장, 소속 여단장은 전두환 준장, 소속 대대장은 장세동 중령이었다.

 특전사 제대 후 아버지가 급작스레 사망하자 그는 사법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게 잘된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80년 ‘서울의 봄’ 때 복학도 했다. 그러나 다시 시위를 하다 구속됐다. 1차 합격 후 2차 시험을 치르고 결과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그는 청량리경찰서 유치장에서 사시 합격통지서를 받았다. 경희대 학생처장과 법대 동창회장이 그의 사시 합격을 축하하기 위해 유치장으로 찾아왔다. 경찰서장은 그들을 유치장 안으로 들여보내 줬고, 그 안에서 조촐한 소주 파티가 열렸다. 합격 직후 안기부(현 국정원) 직원이 문재인을 찾아와 “과거 데모할 때와 생각이 같은가”라고 물었지만 문재인은 “그때 나의 행동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합격 취소를 각오한 말이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노무현과의 만남

문재인 후보는 7년 열애 끝에 경희대 2년 후배인 김정숙씨와 1981년 결혼했다.
1982년, 문재인은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마쳤다. 수료식 때 법무부 장관 표창도 받았다. 하지만 원하던 판사 임용에는 실패했다. 시위 경력 때문이다. 대형 법률사무소의 스카우트 제의를 마다하고 그는 노모가 있는 부산으로 내려왔다. 사시 동기인 박정규가 노무현 변호사를 그에게 소개해 줬다. 이때의 만남을 문재인은 ‘운명’이라 규정한다. 문재인이 없었다면 노무현은 없었을 것이다. 노무현이 없었어도 오늘의 문재인은 없었을지 모른다.

 둘은 ‘변호사 노무현 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를 차렸다. 87년 6월항쟁 때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국본)가 서울보다 부산에서 먼저 결성됐는데, 부산국본의 상임집행위원장이 노무현, 상임집행위원이 문재인이었다. 당시 김광일·이흥록 변호사와 함께 노무현·문재인은 대표적인 부산지역 재야인권변호사였다. 87년 민주화 이후 이들에게 동시에 정계입문 권유가 있었다. 노무현은 88년 13대 국회에 입성했다. 당시 노무현을 떠민 이가 문재인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변호사로 남았다. 그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 부산지부와 경남지부장을 역임하며 부산·경남 시국사건 변론을 도맡았다. 그는 2002년 대선 국면에서 부산 선대본부장을 맡으면서 노무현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다.

◆정치참여 거부하던 청와대 ‘왕수석’

문재인 후보(오른쪽)가 2005년 1월 노무현 대통령으로부터 민정수석비서관 임명장을 받은 뒤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에 당선된 노무현은 문재인에게 “당선시켜줬으니 끝까지 책임져 달라”면서 청와대 민정수석이란 중임을 맡겼다. 노무현은 TV로 생중계되던 2003년 ‘검사와의 대화’에서 갑자기 배석해 있던 민정수석 문재인을 일으켜 세웠다. 노무현 정부가 추진하던 ‘검찰개혁’에 검사들이 반발하자 “이런 사람이 추진하는 건데 (진정성을) 못 믿느냐”는 취지의 말을 했다. 노무현이 평소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라고 말하던 그의 얼굴이 중앙무대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민정수석 시절 검찰 개혁뿐 아니라 국정원·경찰 등의 권력기관 개혁, 국민참여 재판제 도입과 같은 법원개혁, 각종 장·차관 인사, 정책 대소사에 그의 의견이 반영됐다. 그러면서 ‘왕수석’이란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수석을 맡은 지 1년 뒤인 2004년 2월, 민정수석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의 사퇴엔 열린우리당의 ‘부산 차출론’이 작용했다. 노 대통령과 당을 위해 4월 총선에 나서라는 요구였으나 그는 거절했다. 요지부동인 그에게 열린우리당에선 “왕수석 노릇을 하니 계속하고 싶은 모양”(염동연 전 의원)이란 공개적 비아냥도 나왔다. 노무현계 내부의 견제도 있었다. 정권 초반부터 안희정·이광재 등 노 대통령 주변의 386세대 참모들과 문재인·이호철 같은 부산 출신 참모들 간엔 갈등이 있었다. 기존 정치권의 눈으론 융통성이 없는 그에 대해 386 그룹과 가까운 강금원 전 창신섬유회장(작고)은 “문재인은 정치를 해선 안 되는 사람”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이런 갈등구조 속에 문재인은 ‘칭병’하고 청와대를 나왔다. 그리고 아내와 히말라야 트레킹을 떠났다.

 그러나 ‘노무현과의 운명’은 단단했다. 트레킹 도중 호텔에서 제공하는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IHT)을 통해 노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알게 된 그는 히말라야 등반을 중단하고 귀국해 탄핵심판 변호인단의 간사로 합류했다.

 노무현의 대통령 복권 후 문재인은 시민사회수석과 민정수석을 연달아 맡았다. 이후 잠깐 청와대를 떠났다가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정권 말에 복귀해 10·4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었다. 10·4 남북공동선언은 문재인이 꼽는 노무현 정부 최대 업적 중 하나다.

 노무현의 대통령 퇴임 후 노무현은 봉하로, 문재인은 경남 양산으로 각기 낙향했다. 그러나 검찰의 ‘박연차 게이트’ 수사로 인해 노무현과 그 측근, 그리고 형 노건평과 부인 권양숙 여사에 대한 검찰 수사가 이어지면서 문재인은 다시 노무현 곁으로 돌아와야 했다.

◆정치인 문재인

문재인 후보(단상 위 가운데)가 6월 17일 서울 서대문구 독립문 앞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 못하게 됐습니다.” 그의 저서 『운명』의 마지막 문장이다.

 2009년 5월 노무현의 서거. 대중에게 그가 강렬하게 각인된 건 아마도 이때일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를 담담히 발표할 때, 노 대통령 국장(國葬) 때 그가 보여준 절제된 모습 때문이다.

 노무현의 서거 이후 ‘폐족(廢族)’을 자처하며 물러나 있던 노무현계는 문재인을 중심으로 다시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문재인은 스스로 “나는 정치와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는 입장을 계속 유지했다. 2009년 10월 경남 양산보궐선거에서 그는 친노그룹 송인배 후보를 지원하면서도 끝내 유세 연단에는 오르지 않았다. 누굴 도울 순 있어도 직접 정치를 하진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런 그가 정치 참여를 결심하게 된 결정적 시기는 2011년 김해을 보궐선거였다고 한다. 이때 야권은 국민참여당 이봉수 후보를 단일후보로 냈다. 하지만 봉하마을이 있는 이곳에서 당시 한나라당 김태호 후보에게 패했다. 문재인은 “정권교체는 시대적 숙제인데, 이젠 야권 전체가 힘을 모아야 한다”고 판단을 내렸다고 한다. 김경수 공보특보는 “문 후보의 정치참여는 순간적으로 내린 결정이 아니라 정권교체에 대한 열망, 시대적 소명에 대한 고민이 점차 누적되어온 결과”라고 설명했다.

 지난 4월 총선, 노무현과 자신의 정치적 고향인 부산에서 당선된 문재인은 6월에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쑥스러움이 많고 권력의지가 없는 사람’으로 통하던 문재인은 출마선언문에서 ‘불비불명(不飛不鳴)’을 말했다. 지금까지 날지도, 울지도 않고 조용히 때를 기다렸으나 이제는 높이 날아보겠다는 뜻이다. 그는 민주당 순회경선에서 당내 경쟁자인 손학규·김두관·정세균을 넘었다. 새누리당의 박근혜, 장외의 안철수와 만나기 전에 그는 “노무현을 넘어선 문재인”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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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중앙일보 입사 이래 북한 문제와 양자 외교 관계를 비롯한 외교안보 현안을 오래 다뤘다. 편집국 외교안보부장ㆍ국제부장과 논설위원ㆍ도쿄총국장을 거쳤고 하버드대 국제문제연구소(WCFIA) 펠로우를 지냈다. 부소장 겸 논설위원으로 외교안보 이슈를 추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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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