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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동그라미 건드리지 말라” 로마군에 대들다 절명

도메니코 페티(1588~1623)가 1620년에 그린 아르키메데스(상상화).
뭔가를 위해 죽는 것보다는 그 뭔가를 위해 사는 게 더 어렵다는 견해도 있지만, 자신의 일이나 신앙을 위해 순교한다는 것은 예사롭지 않다.
영국의 수학자·철학자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1861~1947)는 죽음마저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정신을 ‘로마의 실용·기술 vs 그리스의 이론·과학’이라는 차이를 설명하는 데 동원했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과학자·수학자인 아르키메데스(기원전 287년께~212년께)를 사례로 들었다. 화이트헤드는 ‘아르키메데스처럼 수학 연구에 몰입하다가 죽음을 맞이한 로마인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로마가 실용적·점진적·기술적 개량만 했지 그리스처럼 이론적·과학적 도약을 이루지 못한 것은 아르키메데스만 봐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새 시대를 연 거목들 <21> 아르키메데스


다수의 과학사가들은 아르키메데스를 르네상스(15세기~16세기 중엽)나 아이작 뉴턴(1642~1643) 이전에 태어난 가장 위대한 수학자로 평가한다. 뉴턴과 독일 수학자 카를 가우스(1777~1855)와 더불어 인류가 낳은 3대 수학자로 손꼽기도 한다. 9세기 아랍 수학과 16~17세기 유럽 수학이 아르키메데스의 수학을 재발견하지 못했다면 역사의 흐름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엔지니어·발명가이기도 한 아르키메데스는 시칠리아 섬에 있는 항구 도시 시라쿠사에서 태어났다. 시라쿠스는 기원전 734년 그리스의 코린트 사람들이 개척한 식민 도시였다. 한때 그리스 도시국가 중에 가장 강성했다. 시라쿠사는 라틴어로 ‘위대한 그리스’라는 뜻인 마그나 그라이키아(Magna Graecia)에 속했다. 오늘날의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에 걸쳐 있던 마그나 그라이키아는 로마에 그리스의 문화·과학·철학을 전수했다. 마그나 그라이키아 사람들을 로마인들은 그리스인, 그리스인들은 로마인으로 간주했다.

투석기와 거울 광선으로 로마군 괴롭혀
아르키메데스가 사망한 것은 제2차 포에니 전쟁(기원전 218∼201년) 때다. 시라쿠사는 로마와 지중해 패권을 다투고 있던 카르타고 편을 들었다. 기원전 213년 시라쿠사를 공략한 로마의 장군은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기원전 268년께~208년)였다. 시라쿠사는 아르키메데스가 고안한 각종 신무기로 로마군을 괴롭혔다. 투석기로 미사일처럼 돌을 로마 진영에 퍼부었다. 거울을 활용해 로마 전함을 불태웠다는 전설도 내려온다. 거울로 ‘죽음 광선(death ray)’를 발사했다는 것이다. ‘죽음 광선’이 실제로 가능한지 수차례 실험이 있었다. 2010년 12월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500명의 어린 학생들과 한 대중 과학 TV 프로그램에 나와 이 전설이 사실인지 실험했다. 가능성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죽음 광선’은 전함의 화재를 유발했다기보다는 적군을 일시적 실명 상태로 만드는 데 더 유용했을 것이라는 가설도 있다.

신무기 덕분인지 시라쿠스는 1년여를 너끈히 버텼다. 그러나 기원전 212년 아르테미스 축제 기간에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로마는 성벽 공략에 성공했고 이듬해인 기원전 211년에는 시라쿠사를 완전히 함락시켰다. 로마군은 약탈과 살인에 나섰다. 점령군 사령관 마르켈루스는 아르키메데스 한 명만은 살리라고 명령했다. 그를 괴롭힌 적군이지만 아르키메데스의 재주가 아까웠던 것이다.

아르키메데스는 도시가 함락된 것도 모르고 흙에 도형을 그리며 연구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가 누군지 모르는 로마 병사가 난입하자 “내 동그라미들을 건드리지 말라”고 소리쳤다. 분격한 병사는 아르키메데스를 찔러 죽였다. 아르키메데스는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는 학자였다. 그리스 저술가 플루타르코스(46?~120?)에 따르면 목욕을 싫어한 아르키메데스는 하인들의 강요로 마지못해 목욕을 하게 되는 경우에도 몸에 손가락으로 선을 그려가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설에 따르면 아르키메데스는 마르켈루스에게 항복하러 수학 기구를 가지고 가다가 그의 짐을 황금으로 오인한 병사들에게 죽임을 당했다. 분노와 상심으로 어쩔 줄 모르던 마르켈루스는 아르키메데스의 장례를 후하게 치르게 했다.

부력(浮力) 현상은 ‘아르키메데스의 원리(Archimedes’ principle)’라 불린다. 아르키메데스는 목욕탕에서 부력의 원리를 발견한 순간 “알아냈다” “유레카(Eureka)”를 외치며 옷도 안 입고 거리를 질주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심리학에서는 아르키메데스가 체험한 것을 ‘아하 경험(aha experience, 아하 經驗)’이라고 부른다. 아하 경험은 순간적으로 문제 해결 방안이 떠오르는 통찰의 순간에 흔히 터져 나오는 감탄사인 아하!(aha!)를 차용한 개념이다.
아르키메데스는 초기 형태의 미·적분법을 개발했다. 미·적분학을 정립한 뉴턴과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1646~1716)의 대선배다. “지렛대를 주면 지구를 움직이겠다” “서 있을 곳을 마련해 주면 세상을 움직이겠다”는 유명한 말로 지레의 원리를 사람들에게 각인시킨 것도 ‘역학의 아버지’인 아르키메데스다. 석탄산업이나 개발도상국에서 아직도 사용되고 있는 ‘아르키메데스의 나선형 펌프(Archimedes’ screw)’를 발명한 것도 아르키메데스다. 그가 계산한 원주율은 중세까지 쓰였다. 오늘날 자동차에 쓰이는 톱니바퀴를 이용한 주행계기도 그가 처음 만들었다.

17세기 시작된 조합론, 2000년 앞서 연구
아르키메데스가 인류 최고의 수학자 중 한 사람이라는 사실이 몇 년 전 다시 확인됐다. 아르키메데스의 논문 7편이 수록된 아르키메데스 팰림프세스트(Archimedes Palimpsest)가 발견된 것이다. 팰림프세스트는 ‘재활용 양피지’다. 원래 글을 지우고 뭔가 다른 내용을 새로 쓴 양피지인 것이다.
오늘날 원본이 남아 있는 고대 문헌은 없다. 복사본의 복사본의 복사본이 남아 있는 것이다. 아르키메데스의 논문이 담긴 아르키메데스 팰림프세스트의 모태는 10세기에 탄생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한 필경자(筆耕者)가 아르키메데스의 논문을 필사한 것이다.

1229년 4월 과학의 역사에 ‘참극’이 벌어졌다. 이스라엘 사막에 있는 성 사바스(Sabas) 수도원에서 한 수도자가 아르키메데스의 논문집을 감귤 주스, 우유로 닦고 부석(浮石·pumice)으로 문질렀다. 글을 적을 양피지가 귀했던 중세에는 흔한 일이었다. 아르키메데스의 논문집은 그리스정교회 기도서로 탈바꿈했다. 기도서 자체도 문헌적 가치가 있는 내용이었지만, 과학의 역사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아르키메데스의 논문을 지우고 기도서로 만들었기 때문에 오히려 아르키메데스 팰림프세스트가 보존됐다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교회가 귀중히 여기는 종교서이기 때문에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아르키메데스 팰림프세스트는 다시 고향, 이제는 이스탄불로 이름이 바뀐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돌아가 1844년까지 잠들어 있었다. 성묘교회(聖墓敎會)에 있던 아르키메데스 팰림프세스트를 1906년 해독한 것은 코펜하겐대학의 J. L. 하이베르 교수였다. 그는 당대 최고의 아르키메데스 전문가인 문헌학자였다. 돋보기로 기도문 뒤에 숨어 있는 텍스트의 80%를 해독해 번역본을 1910년 출간했다. 아르키메데스 팰림프세스트는 제1차 세계대전의 혼란 속에서 다시 사라졌다가 1998년 9월 다시 나타났다. 게르상이라는 프랑스 사람이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내놓은 것이다. 곰팡이가 가득했다. 문헌학자들에겐 최악의 난제였다. 익명의 도서 수집가가 200만 달러에 구매해 월터스예술박물관에 보관·복원을 의뢰했다.
2000년부터 12년간 국제적인 연구가 시작됐다. 돋보기 시대가 아니었다. 첨단 과학기술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고대 문헌을 연구하는 사본학(codicology) 전문가에서 스탠퍼드대 물리학자까지 최고의 전문가들이 동원됐다. 책을 펼칠 수 있게 접착제를 제거하는 데만 4년이 걸렸다.

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2%는 해독되지 않았지만 놀라운 발견이 있었다. ‘소화불량을 일으킬 정도의 난제’라는 뜻인 ‘스토마키온(Stomachion)’이 포함돼 있었던 것이다. 얼핏 보기에는 스토마키온은 퍼즐 맞추기 게임처럼 보였다. 분석해보니 2000년을 앞선 연구 주제가 담겨 있었다. 17세기, 18세기 초에나 시작된 조합론(組合論·combinatorics)의 원조 또한 아르키메데스라는 게 밝혀졌다. ‘역학적인 정리들에 관한 방법(Method Concerning Mechanical Theorems)’도 발견됐다. 아르키메데스의 과학 방법론이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다. 아버지 페이디아스는 천문학자였다. 결혼 여부나 자식에 대해서도 전혀 알려진 게 없다. 아르키메데스는 시라쿠사의 참주 히에론 2세(?~기원전216/215)와 가까운 친척이었다. 히에론 2세는 자신의 왕관이 순금인지 아니면 장인이 은을 섞었는지 알아봐 달라고 해 아르키메데스가 “알아냈다” 체험을 하게 한 장본인이다. 일설에 의하면 아르키메데스가 고대에 유명해진 것은 히에론 2세와 가까웠기 때문이다.
로마 철학자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기원전 106~43년)는 아르키메데스가 사망한 지 137년 후인 시칠리아를 방문했다. 책에서 읽은 내용이 생각나 아르키메데스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모른다” “여긴 그런 거 없다”였다. 결국 키케로는 수풀에 파묻힌 무덤을 발견해 복원했다. 세월이 흐르자 아르키메데스의 무덤은 다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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