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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작림 폭살한 관동군 처벌 유야무야  쿠데타 봇물

만주군벌이던 장작림이 폭살당한 황고둔 현장. 이 사건의 주모자인 관동군의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는 군부의 ‘처벌 반대론’ 덕에 예비역 편입의 징계를 받는 데 그쳤다. [사진가 권태균]
1928년 6월 3일 20량짜리 귀빈열차가 북경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만주군벌 장작림(張作霖)이 탄 열차였다. 장작림은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과 밀월관계였다. 1925년 6~7월 장작림은 휘하의 봉천성 경무처장 우진(于珍)으로 하여금 조선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미야마쓰(三矢宮松)와 ‘한인취체에 대한 쌍방협정’, 이른바 ‘삼시협정(三矢協定)’을 맺었다.

[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만주국 ② 장작림 폭살과 3월 쿠데타

그로부터 장작림 휘하의 만주 당국은 만주의 한인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해 조선총독부에 넘겨주었다. 이에 반발한 김좌진은 신민부를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혁명군으로 개편해 장작림 정권을 타도하려 했을 정도로 장작림은 친일정권이었다. <만주의 삼부⑧ 북만주의 통합 바람 참조>

장작림은 일본군의 비호를 받게 되자 장개석의 국민정부를 꺾고 전 중국의 패자가 되기를 바랐다. 1927년에는 북경을 수도로 삼는 북양정부(北洋政府:초대 총통은 원세개)의 총통 자리까지 올랐다. 그러나 장개석의 국민혁명군이 강한 기세로 북벌에 나서면서 장작림은 북벌군과 결전을 포기하고 만주로 퇴각하는 중이었다. 이에 관동군(關東軍)의 정치장교들은 장작림이 쓸모가 없어졌다고 판단했다. 장작림을 제거하고 만주를 직접 지배할 계획을 세운 것이다.

1 폭약은 장작림이 타고 있던 8량째 열차를 정확히 겨냥했다. 2 폭살사건 현장조사 장면. 3 장작림 폭살을 지휘한 관동군 고급 참모 고모토 다이사쿠.
열차는 6월 4일 새벽 심양(瀋陽)부근 황고둔(皇姑屯) 근처까지 왔는데, 경봉선(京奉線:북경∼심양)과 만주철도 연장선의 입체교차점 부근에서 시속 10㎞의 저속으로 뚝 떨어졌다. 장작림이 탄 8량이 교각을 지날 무렵 엄청난 폭발음이 들렸다. 교각(橋脚)에 설치된 200㎏의 화약이 터지면서 열차는 대파되고 철교도 붕괴되었다.

마적에서 출발해 중원 통일제국을 꿈꿨던 만주군벌 장작림의 두 손과 두 발이 날아갔다고 전해진다. 장작림은 현장에서 숨지기 직전 “일본군이 한 짓이다”고 말했다고도 한다.

일제의 주구(走狗)가 일제에 의해 폭살당한 이 사건은 ‘장작림 폭살사건’ ‘황고둔사건’ 등으로 불리며 전 세계에 충격을 던졌다. 관동군의 소행이란 의혹이 일자 일본 정부는 장작림이란 이름 대신 ‘만주 모 중대사건(滿洲某重大事件)’이라고 부르면서 대책 마련에 부심했다. 관동군은 현장에서 시신으로 발견된 두 명의 아편쟁이 소행이라고 주장했으나 의혹은 불식되지 않았다.

의혹의 눈길은 관동군으로 쏠렸다. 일본이 대한제국 소유였던 간도(間島)를 청나라에 넘겨주는 대신 남만(南滿)철도 부설권을 획득하고는 그 철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으로 군대 주둔권을 확보한 것이 관동군의 시작이었다. 1905년 러일전쟁 직후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요동반도 최남단인 여순(旅順)과 대련(大連) 지역을 양도받아 관동주(關東州)를 설치했다. 관동(關東)은 원래 만리장성의 동쪽 끝인 산해관(山海關) 동쪽을 뜻했다. 일본이 관동주에 군사령부를 두면서 만주 주둔 일본군을 관동군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당초 1만 명 정도에 불과했지만 1940년대에는 70만~80만 대군으로 늘어나게 된다.

전 세계가 장작림 폭살사건에 대해 크게 주목하자 일본은 봉천총영사관과 봉천경찰 측의 합동조사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열차에 장작림의 군사고문 마치노 다케마(町野武馬:1875~1968) 예비역 대좌가 타고 있었지만 천진(天津)에서 하차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의문은 증폭되었다. 마치노는 그전부터 만주를 중국에서부터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인물이었다. 폭파에 사용된 전선이 일본군 초소까지 연결되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현장에서 발견된 두 명의 시신도 관동군의 공작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조선주둔군 기리하라(桐原貞壽) 중위를 신문한 결과 조선주둔군에서 200㎏의 화약을 불법 반출해 사용했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결국 관동군의 고급 참모 고모토 다이사쿠(河本大作:1883~1955) 대좌의 지시에 따라 중대장 도우미야(東宮鐵男)가 현장을 지휘해 폭살을 단행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고모토는 오사카 육군지방유년학교와 중앙유년학교를 거쳐 육사 15기(1903)로 졸업한 전쟁기계였다. 이 사실은 당시 총리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에게 보고되었다. 상해에서 의열단의 저격을 받고 겨우 살아난 육군대장 다나카는 1927년 4월부터 총리로 재직하고 있었다.

다나카는 사건 반년이 지난 12월 14일에야 일왕 히로히토(裕仁=昭和)에게 고모토의 소행임을 알리면서 엄벌에 처하겠다고 보고했으나 육군을 중심으로 처벌 반대론이 일어나자 태도를 바꾸게 되었다. 그래서 세계를 놀라게 한 이 사건에 대한 처벌은 1929년 5월 14일 고모토를 일본 본토로 전근시켰다가 예비역으로 편입시킨 것이 전부였다.

다나카는 일왕에게 ‘관동군은 장작림 폭살사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지만 경비상의 감독 책임을 물어 전보시켰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히로히토가 “앞의 보고와 다르지 않는가?”라고 이의를 제기하자 1929년 7월 내각 총사직을 단행할 수밖에 없었다. 다나카는 두 달 후인 9월 28일 귀족원 의원 당선 축하연을 한 다음 날 돌연 사망하고 말았다. 히로히토는 이 사건 이후 자신은 정부 정책에 불만이 있어도 일절 간여하지 않았다면서 전후에 자신의 전쟁책임론을 부인하는 소재로 이용했다.

이 사건의 여파는 계속되었다. 장작림의 아들 장학량(張學良)은 관동군의 예상을 뒤엎고 1928년 12월 29일 오전 7시 만주 전역에 북양정부(北洋政府)의 오색기(五色旗)를 국민정부의 청천백일만지홍기(靑天白日滿地紅旗)로 일제히 바꾸어 다는 역치(易幟)를 단행했다.

전국 각지에서 반일시위가 일어났다. 일본이 이때 육군 형법에 따라 고모토를 사형시키고 군부의 정치 관여를 엄격하게 금지시켰다면 이후 아시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육군대장 출신 다나카가 총리로 있었던 데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은 사실상 군부정권이었다. 이 사건 이후 육군유년학교와 육군사관학교를 나온 영관급 정치장교들은 어떤 일을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하시모토(橋本欣五郞), 네모토 히로시(根本博) 등의 영관급 장교들은 1930년 10월 사쿠라회(櫻會:벚꽃회)를 결성하고 이듬해 3월 군사 쿠데타에 나서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삼월사건(三月事件)’이다. 영관급 정치군인들이 육군 고위층 및 우익 민간 파시스트 오카와 슈메이(大川周明:1886~1957) 등과 손잡고 쿠데타를 일으켜 육군대신 우가키 가즈시게(宇垣一成:1868~1956)를 총리로 옹립하려는 계획이었다.

이들이 육군대신 우가키를 옹립하려던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우가키는 육군유년학교가 생기기 전에 육군지원병으로 입대해 군조(軍曹:하사관) 때 육군사관학교 1기로 들어가 1890년 졸업한 인물이었다. 우가키는 1931년 1월 군 간부들에게 보내는 비밀훈시에서 군의 가장 기본적인 사명은 국방을 책임지는 것이라면서 “국방은 정치에 선행한다”고 말했다. 마치 군인이 국방이라는 미명하에 정치에도 관여할 수 있다는 투였다.

우가키는 1931년 1월 초 스기야마(杉山) 전 육군차관과 나중 조선총독(1942년 5월~1944년 7월)과 총리(1944년 7월~1945년 4월)를 역임하는 고이소 구니아키(小磯國昭) 군무국장(軍務局長), 니노미야 하루시게(二宮治重) 참모차장 등 육군 수뇌부와 육군 과장급, 그리고 하시모토와 네모토 등의 사쿠라회 핵심 인물들을 관저로 불러들여 쿠데타를 논의했다.

민간인 파시스트 오카와 슈메이 등은 1만 명 이상의 대중을 동원할 수 있다고 큰소리쳤고 후작(侯爵) 도쿠가와 요시치카(<5FB3>川義親)는 20만 엔의 거사 자금을 제공했다(10만 엔, 37만 엔, 50만 엔을 지원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국가 개조라는 거창한 명분으로 3월 20일 쿠데타를 일으켜 일왕을 옹립하고 정당정치를 종식시키려던 계획은 이틀 전에 중지되고 말았다. 군사과장 나가타 데쓰산(永田鐵山) 대좌 등을 중심으로 시기상조론 등이 등장하자 육군대신 우가키가 계획 중단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나가타나 오카무라(岡村寧次) 대좌 등이 시기상조론을 주장한 것은 쿠데타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만몽(滿蒙:만주·몽골)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쿠데타 결행론자들이 ‘쿠데타로 국내를 먼저 군부체제로 정비한 후 만몽을 침략하자’는 내선외후파(內先外後派)라면, 나가타 등은 ‘만몽(滿蒙)을 먼저 침략한 후 쿠데타를 일으키자’는 외선내후파(外先內後派)파였다. 비록 무위에 그쳤지만 3월사건은 이후 ‘소화동란사(昭和動亂史)’라고까지 불리는 잇따른 쿠데타와 테러의 시작이었다.

장작림 폭살사건과 3월사건이 아무런 처벌 없이 끝난 뒤 영관급 정치장교들은 잇따른 쿠데타와 테러에 나섰다. 1931년 9월의 만주사변, 1931년 10월 쿠데타 사건(10월사건), 1934년 11월 원로·중신들을 살해하려 한 육군사관학교사건, 1936년의 육군 쿠데타 사건(2·26사건) 등이 그것이다. 장작림 폭살사건과 3월사건의 주모자를 육군 형법에 따라 처벌하지 못한 데 따른 비극적 결과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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