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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아이] 아동 성범죄의 불편한 진실

정경민
뉴욕특파원
1992년 『트라우마와 치유』란 딱딱한 제목의 책 한 권이 미국 사회를 들끓게 했다. 저자는 하버드대 심리학과 주디스 허먼 교수였다. 그는 성범죄 피해 소녀들을 상담하면서 보고 들은 바를 낱낱이 까발렸다. 가해자의 70~80%는 가족이나 이웃이란 불편한 진실이었다. 그의 고발을 계기로 그동안 가려져온 아동 성범죄의 맨 얼굴이 드러났다.



 아버지·삼촌 혹은 동네아저씨가 가해자였기에 피해자는 침묵을 강요당하기 일쑤였다. 이로 인해 피해 아동이 겪는 고통은 베트남전 참전군인이 호소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게 허먼 교수의 경고였다. 미국에서 아동 성범죄 재판과 피해 아동에 대한 체계적인 심리 치료가 본격 시작된 건 이때부터다.



 94년 뉴저지주에서 벌어진 ‘메건 살인사건’은 아동 성범죄의 실상을 다시 한번 일깨웠다. 강아지를 미끼로 7살 소녀를 납치해 성폭행하고 목 졸라 살해한 범인은 바로 옆집 아저씨였다. 그는 두 차례나 아동 성범죄를 저지른 전과자였지만 메건의 부모는 그저 친절한 이웃으로 알았다. 이를 계기로 성범죄자의 이름과 사진은 물론 주소까지 공개하는 ‘메건 법’이 제정됐다.



 10년 후인 2004년 미국 사회는 플로리다주에서 벌어진 잔혹한 아동 성범죄에 다시 한번 치를 떨었다. 집에서 자던 9살 소녀 제시카 런스포드가 이웃 아저씨에 의해 납치됐다. 범행이 들통날까 겁난 범인은 소녀에게 집에 보내준다고 속이고 쓰레기봉투에 들어가게 한 뒤 그대로 인근 야산에 생매장했다. 시신 수습 과정에서 필사적으로 봉투에 구멍을 뚫으려 한 소녀의 손가락뼈가 발견되자 여론은 폭발했다.



 더욱이 범인은 아동 성범죄 전과 2범으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모범수로 2년 만에 출소한 것으로 드러났다. 플로리다주는 이를 계기로 아동 성범죄자는 초범이라도 25년 이상 감옥에서 못 나오게 하고 살인을 했으면 사형까지 시킬 수 있는 ‘제시카 법’을 제정했다.



 7살 초등생을 납치해 성폭행한 ‘고종석 사건’을 계기로 국내에서도 아동 성범죄가 다시 도마에 올랐다. 심지어 물리적 거세(去勢)나 사형제 부활론까지 나왔다. 그렇지만 우리는 여전히 아동 성범죄의 불편한 진실은 애써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동 성범죄의 상당수가 가족과 이웃에 의해 저질러진다. ‘술김에’ 혹은 ‘피해자와 합의’를 구실로 아동 성범죄에 솜방망이 처벌이 내려지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미국이 아동 성범죄를 단호하고 가혹하게 처벌하기 시작한 것도 거북하지만 엄연한 진실을 마주하고 난 뒤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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