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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스탄티누스·헨리8세·대원군, 종교 재산으로 재정위기 넘으려 했다

왼쪽부터 콘스탄티누스 [로마 황제·274~337], 헨리 8세 [영국 국왕·1491~1547], 흥선 대원군 [조선 정치가·1820~1898], 마리오 몬티 [이탈리아 총리·1943 ~]


올 3월이었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이 해묵은 논쟁거리를 꺼냈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종교인 과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소득이 있는 국민은 세금을 내야 한다’는 원칙이 근거였다. 찬반 논쟁이 봇물을 이뤘다. 온갖 근거와 그럴듯한 논리가 동원됐다. 경제 역사가들이 종교인 과세를 ‘밀레니엄 논쟁거리(Millennium Dispute·1000년을 입씨름해도 답을 찾기 어려운 주제)’라고 한 까닭을 알 만했다. 박 장관은 좀체 답을 찾기 힘든 논쟁을 왜 시작했을까. 이런저런 해석이 나왔다. 금세기 최대 경제 현안인 재정위기가 근본 원인이라는 데 이론이 없다. 미국·유럽·일본은 이미 위기에 빠졌다. 한국이라고 안전지대는 아니다. 복지 확대 등 돈 써야 할 곳은 빠르게 늘고 있다. 반면 정부가 세금을 더 거둬들일 곳은 마땅찮은 상황이다.

[뉴스 속으로] 1000년을 이어온 논쟁, 종교 과세



주요 국가들은 최근 세수를 늘리기 위해 다급하게 움직이고 있다. 미국과 독일 등이 예금 주인들의 정보를 요구하며 스위스와 조세피난처를 압박하고 있다. 급기야 마리오 몬티 이탈리아 총리가 올 2월 종교인 과세를 공론화했다. 국내에서도 박 장관 발언 이후 찬반 논란이 거세지면서 종교계 권력다툼, 교회 대물림·매매, 승려들의 도박 등 종교의 자유라는 장막 저편에서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모습들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심상찮은 조짐이다. 인류 역사에서 재정위기와 종교계 타락이 씨실과 날실처럼 교차하면 큰 폭풍이 일었다. 그 결말은 하나같이 기존 종교인들에겐 큰 시련이었다.



밀라노 칙령 발표해 기독교 끌어안아



 첫 번째 충돌은 313년 말에 일어났다. 로마 주피터(제우스) 신전에 일단의 무장병력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콘스탄티누스 황제(272~337년)의 친위대 소속 병사들이었다. 당황한 사제들이 항의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병사들은 이 잡듯이 신전 곳곳을 뒤졌다. 정치적 반역자를 색출하려는 게 아니었다. 그들이 찾는 것은 너무나 세속적인 물건이었다. 수세기 동안 로마 귀족 등이 기부한 황금과 은이었다.



 콘스탄티누스의 병사들이 들이닥친 곳은 주피터 신전만이 아니었다. 로마 12신을 모시는 신전까지 짓밟혔다. 황금과 은이 무더기로 실려 황실 곳간으로 옮겨졌다. 이전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세속의 권력이 지엄한 신전 문턱을 넘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해 콘스탄티누스가 발표한 밀라노 칙령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이 마음에 드는 방식으로 신을 모실 수 있도록 한 황제 명령이었다. 그 덕분에 기독교가 공인됐다. 이는 곧 로마 12신의 추락을 의미했다. 칙령 직전까지 그들은 로마 국교의 절대자였다. 종교 전문가들은 "콘스탄티누스가 신흥 세력인 기독교를 자기 편으로 끌어들이고 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그 칙령을 발표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경제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요인은 따로 있다. 바로 로마의 재정위기다. 당시 로마는 오랜 내전으로 나라 살림살이가 사실상 거덜 나 있었다. 두 가지 원인 때문이었다. 귀족들은 주피터 등의 신전에 금과 은, 토지를 명의신탁하는 등의 방식으로 세금을 떼먹었다. 반면 황제들은 내전과 정복전쟁을 밥 먹듯이 했다. 로마 설립 초기부터 관행으로 굳어진 식량 무료배급 등 복지 비용도 만만찮았다. 재정이 파탄 날 수밖에 없는 구조였던 셈이다.



 로마 황제들은 손쉬운 방법에 의존했다. 돈에서 금과 은 함량을 줄이는 수법을 동원했다. 더 많은 돈을 찍어내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는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었다. 끝내 돈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했다. 재정과 통화 위기가 동시에 발생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직전 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개혁을 단행했다. 서방 역사상 처음으로 인구 센서스를 실시하고 예산을 편성했다. 하지만 재정위기와 인플레이션을 완전히 해결하진 못했다. 모든 부담이 콘스탄티누스에게 지워졌다. 그는 먼저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신뢰를 잃은 기존의 돈 대신 솔리두스(Solidus)라는 새 돈을 찍어냈다.



 문제는 금을 조달하는 방법이었다. 당시 손쉬운 것은 정복전쟁이었다. 이웃 국가를 공격해 금을 약탈하거나 조공으로 받는 방식이다. 콘스탄티누스는 동방원정에 성공했다. 하지만 전쟁에 들인 비용을 감안하면 조공 등으로 받은 금은 많지 않았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콘스탄티누스는 주피터 등 전통 신들을 모시는 종교계에 도움을 요청했다. 신전 깊숙한 곳에 잠자고 있는 황금과 은을 세금으로 거둬 정부 곳간을 채우자는 제안이었다. 사제들은 싸늘하게 거절했다. 결국 황제가 행동에 나섰다.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다.



 영국 금융통화 역사가인 고(故) 글린 데이비스는 『화폐의 역사』에서 “콘스탄티누스가 밀라노 칙령을 발표하며 종교의 자유 등 고상한 동기를 주장했다”며 “하지만 그의 본심은 신전 털기였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신전에서 징발한 금과 은은 상당했다. 솔리두스가 이후 몇백 년 동안 질이 좋은 돈으로 인정됐다. 기축통화의 반열에 오를 정도였다. 돈 가치가 안정되자 생산과 교역이 늘면서 세수도 증가해 재정위기가 진정됐다.



 『로마제국 쇠망사』를 지은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은 “콘스탄티누스가 너무나 세속적인 본심을 감추기 위해 밀라노 칙령 직전에 로마 12신전을 지키는 사제들의 비리를 강하게 비판했다”고 말했다. 요즘 흔한 여론조성 작업이다.



수녀원서 황금촛대·십자가까지 빼앗아



 두 번째 사달은 콘스탄티누스 사후 1000여 년이 흐른 뒤에 일어났다. 무대는 1530년대 영국이었다. 주인공은 바로 ‘바람둥이 왕’으로 불린 헨리 8세였다. 그도 쪼들렸다. 프랑스 등과의 갈등 때문에 공격적으로 군함을 건조했다. 전 왕비와 이혼 문제로 로마 교황과 결별한 직후 가톨릭 신자들의 반발로 세금도 제대로 걷히지 않았다.



 헨리 8세가 콘스탄티누스의 전술을 미리 공부했을까. 그도 가톨릭 교구 신부와 수도사들의 사치와 성적 타락, 탐욕 등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수도원과 수녀원 등을 해체하라는 포고령을 발표했다.



 영국 역사학자인 고(故) 조지 우드워드는 저서인 『수도원 해체』에서 “헨리 8세가 자신이 정의의 사도인 것처럼 행세했다”며 “하지만 그의 속셈은 수도원 해체를 주관하는 부서의 이름에서 그대로 드러난다”고 지적했다. 바로 ‘왕실 재정을 확충하는 부서’였다.



 헨리 8세가 처음부터 수도원을 해체할 요량은 아니었다. 그는 성당과 수도원 등에 세금을 물리려 했다. 하지만 가톨릭계가 거세게 저항했다. 이미 이혼 문제로 헨리 8세와 가톨릭계는 서로 틀어져 있었다.



 헨리 8세는 정면 돌파에 나섰다. 그는 연간 수입이 200파운드에 미치지 못한 군소 수도원을 해체하고 재산을 몰수하도록 명했다. 전체 500여 곳 가운데 3분의 2가 해체 대상이었다. 하지만 쉽게 번 돈은 쉽게 나가는 법이라고 했다. 헨리 8세가 몰수한 수도원 재산은 순식간에 동났다. 군함을 건조하고 그 자신의 사치 욕망을 채우는 데 돈을 쏟아부어서다.



 자금 갈증이 좀체 풀리지 않자 헨리 8세는 1538년엔 한술 더 떠 수녀원에 손대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539년에는 대형 수도원까지 털기에 이른다. 그가 손쉽게 팔아 현금화할 수 있었던 압류재산은 황금촛대와 십자가, 접시 등이었다. 이 물건들은 런던에 도착한 순간 화폐 주조창(Royal Mint)으로 보내져 금화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질이 좋아진 파운드화는 콘스탄티누스의 솔리두스처럼 국제 교역에서 기축통화로 구실하기 시작했다.



 헨리 8세는 콘스탄티누스보다 긴 기간 동안 조직적으로 종교계 재산을 압류했다. 그의 수도원 털기는 20년 동안이나 이어졌다. 방법도 좀 더 체계적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다짜고짜 신전을 털었다. 반면 헨리 8세는 해체령을 내리는 등 법적 모양새를 갖췄다.



 헨리 8세가 압류한 재산 가운데 가장 요긴한 것은 땅이었다. 그는 땅도 압류 즉시 팔아치웠다. 이를 위해 수완이 좋은 런던 상인을 중개업자로 고용했다. 그들은 자기 돈으로 땅을 사들인 뒤 나중에 고가에 되팔아 수익을 남기기도 했다. 그들은 바로 왕실 허가를 받은(Royal Chartered) 투기꾼들이었다.



 헨리 8세는 나중에 새로운 별명을 하나 얻는다. ‘영국 해군의 아버지’다. 그가 구축한 해군력은 나중에 식민지 개척의 원동력이 된다. 그가 19세기 영국 패권의 두 기둥 가운데 하나를 세운 셈이다.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산업혁명이었다.



서원이 보유한 땅·재산 국가서 압류



 한국의 역사에도 콘스탄티누스의 후계자가 있었다. 141년 전인 1871년 한반도에서 일어난 서원철폐도 비슷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해는 흥선 대원군이 왕권강화 차원에서 중건한 경복궁이 완성되기 한 해 전이었다. 재정이 고갈된 상태였다. 대원군은 로마 황제들처럼 돈 가치를 떨어뜨리는 편법까지 동원했다. 당백전을 찍어내 살포했다. 종교단체와 비슷한 특권을 누렸던 서원도 표적으로 삼았다.



 당시 서원들도 백성의 원성을 샀다. 춘궁기에 가난한 백성들에게 쌀을 빌려주고 추수기에 고리를 붙여 회수했다. 갚지 못하는 농민의 땅을 빼앗아 일부 서원은 웬만한 대지주보다 더 많은 땅을 보유했다.



 콘스탄티누스와 헨리 8세와 마찬가지로 대원군은 서원들의 부도덕한 행위를 질타했다. 그리고 1871년 서원 철폐령을 내려 600여 곳을 문 닫게 했다. 땅과 재산을 압류해 국가에 귀속시켰다.



 역사가들은 어떤 일이 한 번 일어나면 우연이고 두 번 이상 되풀이되면 필연이라고 말한다. 조건만 갖춰지면 같은 일이 또 일어날 수 있다는 얘기다.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과 마리오 몬티 이탈리아 총리가 제기한 종교인 과세 논란을 보며 콘스탄티누스 등이 벌인 일이 떠오르는 까닭이다. 



◆솔리두스=재산을 둘러싼 세속 권력과 종교계의 충돌은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낳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신전의 황금을 털어 만든 솔리두스(Solidus)라는 새 돈은 이후 동로마제국 시대까지 생명을 유지할 정도로 큰 신뢰를 받았다. 영어 단어 Solid(견고한, 충실한)도 솔리두스에서 파생됐다는 게 금융통화 이론가들의 설명이다.



◆파운드 스털링=헨리 8세가 수도원에서 빼앗은 금 덕분에 파운드화의 질이 높아졌다. 이후 영국 돈이 서유럽 국제교역의 결제통화로 자리 잡았다. 19세기 영국 금융패권의 주춧돌이 마련된 셈이다. 무역상들이 헨리 8세 이후 파운드화를 신뢰해 파운드 스털링(Pound Sterling)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스털링의 의미를 놓고 논란이 분분하기는 하지만 ‘별처럼 찬란하고 믿을 수 있는’이란 게 금융 역사가들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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