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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보다 최후 심판일에 관심 쏟은 과학혁명 아버지

뉴턴은 기회 있을 때마다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했다. 고드프리 넬러가 그린 뉴턴(1702).
많은 경우 새 시대를 연 거목들은 자신이 개막한 새 시대와 그 이전 시대 사이에 낀 ‘중간인’이다. 영국 과학자 아이작 뉴턴(1642~1727)의 경우도 그렇다. 뉴턴의 유고를 1936년 소더비 경매에서 구매해 검토한 영국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는 뉴턴이 ‘근대 최초의 과학자’라기보다는 ‘마지막 마법사’라는 결론을 내렸다. 고대 수메르ㆍ바빌로니아에서 시작된 마법의 전통이 뉴턴에 이르러 끝났다는 주장이다. 뉴턴은 17세기 ‘과학혁명의 아버지’이지만 과학보다는 오히려 성경의 해석, 연금술에 더 관심이 많았던 것이다. 뉴턴은 연금술 연구를 위해 중금속을 맛보다 중독될 뻔한 적도 있다.

遺稿의 반은 신학·연금술 관련 내용
뉴턴을 18세기 최고의 연금술사이자 최고의 성서학자로 평가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가 남긴 글에서는 심지어 미신적, 비과학적인 사고도 다수 발견된다. 뉴턴이 남긴 저작은 1000만 단어 분량이다. 그중 400만 단어는 신학, 100만 단어는 연금술에 대한 것이다. 어쩌면 그럴 수밖에 없었다. 뉴턴은 과학이 철학이나 종교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기 전에 활동했던 사람이다. 홍수나 혜성 같은 자연 현상을 신(神)의 뜻과 결부시키는 시대였다. 17세기는 화학과 연금술도 아직 제대로 분리되지 않은 시대였다. 뉴턴이 살던 시대에는 ‘과학자(scientist)’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오늘날 우리가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을 당시에는 ‘자연철학(natural philosophy)’이라고 불렀다. 초기 자연철학자들은 본격적인 훈련을 받지 않은, 돈 많고 한가한 아마추어들이었다. 과학자라는 말이 등장한 때는 1833년이다. 마침 뉴턴의 열렬한 팬이었던 윌리엄 휴얼(1794~1866)이라는 영국 철학자·역사가가 처음 사용한 것이다.

광학ㆍ역학ㆍ수학ㆍ물리학ㆍ철학에서 뉴턴이 이룩한 성과를 나열하다 보면 그가 왜 ‘지난 1000년 중 가장 위대한 인물’, 그리스 과학자 아르키메데스(기원전 287께~212)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 사이에 태어난 가장 위대한 과학자로 손꼽히는지 알 수 있다. 뉴턴은 세 가지 운동 법칙, 미적분학, 수리물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그가 1671년 발명한 반사망원경은 현대의 망원경과 거의 같은 구조로 돼 있다. 줄여서 ‘프린키피아(Principia)’라고 하는 그의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Mathematical Principles of Natural Philosophy)』(1687)는 자연과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문헌이다. 뉴턴의 발견은 과학혁명뿐만 아니라 산업혁명까지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 학계의 평가다. 뉴턴은 아인슈타인이 구체화한 질량과 에너지의 동등성에 대한 생각까지도 이미 하고 있었다.

과학으로 세상을 흔들었지만 뉴턴의 출생은 평범했다. 아버지는 문맹이었는데 젠트리와 노동자 사이의 중간 계층인 요먼(yeoman)이었다. 아버지는 ‘거칠고 사치스럽고 연약한’ 인물이었는데 뉴턴이 1642년 크리스마스 아침에 태어나기 석 달 전 사망했다. 조산아였기에 뉴턴은 몸이 약했다. 과연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 불확실할 정도였다. 뉴턴이 태어난 곳은 링컨셔다. 링컨셔는 ‘철의 여인’ 마거릿 대처 총리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1661년 뉴턴은 케임브리지대에 입학했다. 수학을 독학했으며 르네 데카르트(1596~1650)의 철학과 방법론에 깊이 매료됐다.

1666년 흑사병이 돌자 케임브리지대는 휴교에 들어갔다. 뉴턴은 어머니의 집이 있는 링컨셔로 돌아가 2년 동안 휴식을 취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달빛이 은은한 어느 날 밤, 우연히 정원에 있는 사과나무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봤다. 뉴턴 하면 떠오르는 바로 그 사과다. 그 순간 만유인력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요리용 사과가 달린 ‘켄트의 꽃(Flower of Kent)’이라는 종의 이 사과나무는 아직도 뉴턴이 살던 집에 남아 있다.

사과 이야기는 뉴턴 자신이 남긴 글에는 없다. 지인들의 기록에는 있다. 남들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본인이 직접 사과 이야기를 널리 유포했을 가능성이 크다. 뉴턴이 사과 이야기를 지어냈다는 설도 있다. 왜 그랬을까. 성경의 창세기에 나오는 ‘지식의 나무(선악과)’가 보통 사과나무로 인식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뉴턴이 자신의 발견을 성경과 결부시키고자 했을 가능성이 있다. 만유인력 발견에 영감을 준 것은 연금술이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감추려고 사과 이야기를 꾸며냈다는 설도 있다.
인간 뉴턴, 과학자 뉴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의 종교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18세기 이후 뉴턴은 과학자의 표본으로 숭상됐다. ‘과학자 뉴턴’이라는 이미지를 살리기 위해 뉴턴이 신학에 대해 논한 것은 나이가 들어서였다는 ‘억지’ 주장도 제기됐다. 사실과 달랐다. 뉴턴에게 과학은 인간을 위한 신(神)의 계획을 알아내려는 수단이었다. 뉴턴의 신은 두 군데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다. 성경과 자연이었다. 그래서 뉴턴에게 종교와 과학은 불가분의 관계였다.

뉴턴은 성공회 신자였고 신앙 생활은 청교도적이었다. 그러나 삼위일체는 부정했다. 뉴턴은 ‘이단’이었던 것이다. 뉴턴은 30세 무렵 삼위일체가 사기(詐欺) 내지 음모의 소산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사학자이기도 한 뉴턴이 3~5세기 그리스도교 교회사를 연구한 끝에 내린 결론이다. 뉴턴은 3~5세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초대 교회의 신앙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했다.

예수가 신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으나 뉴턴은 예수가 재림할 시기에 대해 매우 궁금해했다. ‘하느님의 나라’가 도래하기 때문이다. 뉴턴은 ‘하느님의 나라’는 하늘이 아니라 땅에 건설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재림 시기를 알려면 성경에 나오는 사건들의 연도를 아는 게 필요했다. 뉴턴이 성경 연대기의 전문가가 된 이유다.
뉴턴은 1727년 사망 시 교회의 종부성사를 거부했으나 민간인으로서는 최초로 웨스트민스터 대수도원에 묻혔다. 연금술과 성경 연대기에 대한 뉴턴의 저작은 출간된 일이 없다. 만약 출간됐다면 뉴턴을 영국의 아이콘으로 삼고자 했던 영국 정부에 당혹감을 안겨줬을 것이다.

뉴턴은 과학과 결혼했다. 자신을 한때 버리고 그가 3세 때 대지주에게 재가한 어머니 때문인지 여성을 싫어해 평생 결혼하지 않았다. 뉴턴은 의붓아버지가 사망해 어머니가 돌아올 때까지 할머니 손에서 외롭게 컸다. 뉴턴은 요즘 말로 하면 성애에 대해 아무런 관심이 없는 ‘무성애자(asexual)’였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숫총각이었을지 모른다. 친구는 두 명이었는데 우정이 깨지자 요즘 말로 ‘멘붕(mental breakdown)’ 상태에 빠졌다. 성격은 까다로운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멋진 묘비명과 유언으로도 유명
뉴턴은 학교에서도 혼자 놀았는데 원래는 공부를 열심히 안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상급생과 싸운 일이 있었는데 뉴턴이 이겼다. 뉴턴은 공부로도 그를 이기겠다고 다짐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맹렬히 책을 읽었다. 어머니가 곡물과 채소를 팔아 오라고 시키면 하인에게 맡기고 자신은 클라크라는 사람의 집에 가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될 때까지 공부했다.

케임브리지대 교수 시절 동료들은 그가 웃는 것을 딱 한 번 봤다. 연구에만 골똘해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쉬는 법이 없었다. 식사하는 것까지 잊어버릴 정도였다. 한동안 새벽 2, 3시까지 연구했는데 오히려 역효과라는 것을 깨닫고 12시 취침으로 생활방식을 바꿨다. 뉴턴은 관운도 좋았다. 국회의원, 왕립학회 회장으로도 선출됐다. 1699년에는 철학자 존 로크 등 인맥을 동원해 왕립 조폐국 이사가 됐다. 봉급이 괜찮은 자리였는데 수많은 위폐범의 목을 치는 자리이기도 했다. 뉴턴은 신명 나게 일했다. 일종의 비밀경찰을 만들어 위폐범들을 색출해 그들의 생사를 쥐고 흔들었다.

IQ가 190으로 추정되는 뉴턴은 엄청난 자신감으로 무장한 인물이었다. 수천 년, 수백 년의 과학이나 신학의 오류를 바로잡을 ‘선택된 자’의 지위를 자임했다. 요즘 사람이라면 사진 찍기를 즐겼을지도 모른다.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초상화에 나타난 그의 모습이 상당히 달라 어느 게 그의 실제 모습인지 알기 힘들 정도다.
인간과 접촉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잘 웃지도 않고 과묵했다. 쓸데없이 귀찮은 분쟁에 끼어들까 봐 서신교환도 꺼렸다. 엄청난 비밀주의자였던 그는 영국 왕립학회 동료들이 애걸복걸해야 마지못해 자신의 논문을 공표했다. 공표한 다음에 ‘누가 먼저냐’는 시비가 붙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이들이 있으면 죽기 살기로 그들과 싸웠다. 비스마르크 등 수많은 거목과 마찬가지로 뉴턴도 건강염려증(hypochondria) 환자였다.

묘비명과 세상 떠날 때 남긴 말이 뉴턴의 것만큼 멋진 경우도 드물다. 뉴턴의 묘비명은 시인 알렉산더 포프(1688~1744)가 썼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 포함됐다. “자연과 자연의 법칙이 밤의 어둠 속에 감춰져 있었다. 신(神)께서 말씀하시길 뉴턴이여 있으라 하시니 어둠이 모든 빛이 되었다.”
뉴턴이 남긴 유언은 이렇게 시작한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볼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에 나는 해변에서 노니는 어린 소년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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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