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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키스트 그룹, 호서은행서 6만원 빼냈지만 허사

천진의 금탕교. 이회영과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집단 주거지인 금탕교장이 다리 부근에 있었다. 다리 양쪽은 중국의 경제개발로 인해 격세지감이 느껴질 만큼 변모했다. [사진가 권태균]
1930년 3월 중순, 천안경찰서의 형사들이 인천에서 맹렬한 수색작업을 벌이고 있었다. 그 내용은 철저한 비밀이었다. 그래서 동아일보 기자가 탐문에 들어간 결과 '선하증권(船荷證券)을 위조, 6만여 원을 사취(詐取)'라는 제목의 보도를 할 수 있었다. 화물 운송 기관이 발행하는 선하증권은 은행에서 현찰로 교환할 수 있었다.기사는 ‘피해자는 호서(湖西)은행’인데 충남 아산에서 미곡상을 하는 최석영(崔錫榮)이 7만여 원 상당의 선하증권을 위조해 천안 호서은행에서 6만여 원으로 할인해서 바꾸고는 ‘어디로인지 종적을 감추어버렸다’는 내용이었다. 일경이 긴장했던 것은 최석영이 국내로 잠입한 아나키스트 신현상(申鉉商)과 함께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형사대가 인천 일대를 뒤지고 있을 때 신현상과 최석영은 이미 북경에 도착해 있었다. 정화암은 ‘호서은행 본점과 지점을 통해 15회에 걸쳐 5만8천원이라는 거금’을 빼냈다면서 ‘엄청난 거액’이라고 회상했다. 1929년 말 최상품 쌀 10㎏이 2원20전이니 현재 10㎏당 2만5000원 정도로 환산하면 6억원이 넘는 거액이었다. 그래서 한꺼번에 들여오지 못하고 일부만 가져왔는데 북경에 안전한 장소가 생기면 나머지도 가져올 계획이었다.자금이 생기자 중국 내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재중국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無聯) 대표대회(이하 대회, 일부에서는 무정부주의자 동양대회로 표기)’를 개최했다. 앞으로 운동 방향을 토의해서 결정한 뒤 자금을 집중하기 위한 것이었다.북경과 천진은 물론 상해, 복건 등지에서 활동하던 한인 아나키스트들이 북경으로 달려왔다. 북만주의 한족총연합회에서는 김종진과 이을규가 일제의 감시가 심한 중동선(中東線)을 우회해 천진을 거쳐 북경에 도착했다.

1930년 6월 하순 열린 이 대회에서는 두 방향을 놓고 논쟁이 벌어졌다. 유기석(柳基石:일명 柳絮) 등은 의열단처럼 국내로 잠입해 직접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김종진, 이을규 등은 북만주 운동에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회에 참석했던 이을규는 “선생(김종진)은… 각지 동지들이 만주기지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재정적인 면에서는 물론 인적(人的)인 점에서도 우선적으로 총력을 기울여 민족대계의 기반을 만주에다 닦자고 호소해서 만장일치로 승인했다(시야 김종진 선생전)”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대표대회가 끝나갈 무렵 예기치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몇 명씩 분산 숙식하던 아나키스트들의 한 숙사(宿舍)를 새벽녘에 중국 경찰을 앞세운 일본영사관 경찰이 습격한 것이다. 자금을 마련해 온 신현상·최석영은 물론 김종진·이을규 등과 이회영의 아들 이규창까지 체포되었다. 일제가 조선 강도단이 북경에 잠입했다고 사칭하면서 일부 부패 경찰을 매수해 숙소를 급습한 것이었다.

복건성에서 농민 자위운동에 나섰던 한국과 중국의 아나키스트들
이들 중 일부는 국내로 압송되면 장기간 투옥되는 게 불가피했다. 이 대회에 참석했던 오면직(吳冕稙:일명 양여주)과 김동우(金東宇)는 훗날 일제에게 사형당했을 정도로 아나키스트들은 대일항쟁의 최일선에 있었다. 이때 중국 대학 출신인 아나키스트 유기석이 같은 아나키스트였던 북경시장 장음오(張蔭梧)를 비롯한 중국 국민정부 간부들에게 일제의 간계이자 중국 주권의 침해라고 설파해 신현상과 최석영을 제외한 전원을 석방시켰다.

문제는 사라진 자금이었다. 만주 운동에 사용할 활동자금은커녕 여비도 없었다. 이회영의 거처인 천진 금탕교장(金湯橋莊) 부근에 큰 방 하나를 얻어서 공동으로 자취하던 아나키스트들은 비상수단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천진의 일본 조계지 한복판인 욱가(旭街)의 중·일 합자은행 정실은호(正實銀號)를 털기로 한 것이다. 중국의 사법권이 미치지 못하는 치외법권 지대는 그만큼 경비가 삼엄했다.

거사에 동행했던 정화암은 “김지강·양여주(오면직)·장기준·김동우가 실행하고 내가 후견인으로 동행하기로 했다. 네 동지들은 정해진 시간에 권총을 가지고 떠났다. 나는 그들이 돌아올 길목에서 기다렸다. 12시15분 정각, 양여주와 장기준은 창구에서, 김지강은 정문에서, 김동우는 후문에서 일시에 총을 뽑았다.(몸으로 쓴 근세사)”라고 회고하고 있다.

잠시의 실랑이 끝에 금고 문을 열지는 못하고 책상 위에 있던 돈만 자루에 담고 빠져나왔는데, 정화암은 “보따리를 풀고 돈을 세어보니 우리가 기대했던 금액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그런대로 우선의 대책을 세울 수 있는 금액이었다. 중국 돈 3천원과 일본 돈 몇백원이었다”라고 설명했다. 이 사건은 다음 날 중국대공보(中國大公報)를 비롯한 각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는데, 은행을 빠져나간 지 불과 2∼3분 후에 경찰이 출동했고 30분 뒤에는 일본 조계에 비상경비망이 쳐졌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조금만 지체했으면 백주에 총격전이 벌어졌을 상황이었다.

이들은 이 자금을 가지고 만주로 떠나는데 무기 때문에 이동이 쉽지 않았다. 만약에 대비해 3진으로 나누어 1진이 떠난 다음 날 2진이 출발하고, 그 다음 날 3진이 출발하는 식으로 북만주로 향했다. 이때 이회영의 딸인 규숙·현숙 자매가 권총 10여 정과 폭탄 10여 개를 몸 속과 짐 속에 넣어 운반했고, 이회영은 아들 규창과 복건성의 농민 자치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상해로 떠났다.

인원이 보강된 북만주의 한족총련은 사업 확장에 나섰다. 한족총련의 아나키스트들은 농민들에게는 지지를 받았지만 공산주의자들은 물론 일부 민족주의자들과도 대립했다. 한족총련의 지방자치주의에 중앙 중심의 사고에 젖어있던 일부 민족주의자들이 반발했다. 1931년 구정(舊正)에 구파 백정기(白貞基)가 고령자(高嶺子)에서 공연한 항일 연극도 문제가 되었다. 독립운동가를 자칭하는 한 관리자가 국내에서 쫓겨 온 부부의 재산과 미모의 부인을 빼앗기 위해 그 남편에게 일제 첩자라는 누명을 씌우는 연극 내용에 일부 민족주의자들이 반발했다. 결국 1931년 여름 일부 민족주의자들이 한족총련을 탈퇴하고 말았다.

1930년의 ‘5·30 간도사건’은 아나키스트와 공산주의자를 무력대결로 몰고 갔다. 1930년 5월 30일 자정, 연변 용정촌(龍井村)의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동산(東山) 대륙(大陸)고무간판 밑에 집결해 책임자 김철(金喆)의 회중전등을 신호로 영사관, 정류장, 기관차, 전기공사, 철도 등을 차례로 방화한 것이 ‘5·30 간도폭동’의 시작이었다. 만주 전역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이 사건은 한인들이 주도했지만 조선공산당이 아니라 중국공산당의 지시로 시작되었다는 특징이 있다. 코민테른에서 한 나라에는 한 개의 공산당밖에 없다는 일국일당주의(一國一黨主義)를 식민지에도 기계적으로 적용하면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1930년 3월경부터 해체되고, 그 자리를 중국공산당이 차지하게 되면서 명령권자가 바뀐 것이었다.

문제는 이때 중공(中共)은 이립삼(李立三)의 극좌 모험주의 노선이 지배하던 때라는 점이다. 1930년 6월 중공 정치국 회의에서 ‘현 단계 당의 정치적 임무에 관한 결의’를 채택했는데 이것이 중심 성시(成市)를 먼저 장악함으로써 전국적 승리를 쟁취하자는 ‘이립삼 노선’이었다. 중공 만주성위원회에서 ‘5·30 간도 폭동’을 통해 이립삼 노선을 먼저 시범으로 보인 셈이었다. 1931년 6월 28일 조선일보는 재판 결과를 보도하면서 “동일 동시에 화룡(和龍), 연길(延吉), 두도구(頭道溝) 등 간도 일대는 일대 수라장으로 변했다”고 보도했을 정도로 위력이 있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이즈음 만주군벌 장학량(張學良)이 1928년 6월 부친 장작림(張作霖)이 일본군에 의해 폭사한 이후 항일의지를 불태울 때였다는 점이었다. 장학량이 장개석(蔣介石)의 국민정부에 가담해 만주 전역에 청천백일기(靑天白日旗)를 거는 역치(易幟)를 단행하고 항일에 나선 시점이었으니 시기에 문제가 있었다. 이 사건에 대해 일제 재판기록이 “(중공 만주성위원회에서) 조선공산주의자들에 대하여 중국공산당에 입당시킨다는 미끼를 던져, 그들을 총동원하여……(中國共産黨事件判決寫: 1933)”라고 말한 것처럼 한인들의 중공 가입을 미끼로 이립삼 노선을 먼저 실천해 보였던 것이다. 문제는 중국인들은 빠지고 한인들만 앞세웠다는 점이다.

이후 장학량은 공산주의자 토벌에 적극 나서는데, 공비토벌대장인 길림성 군법처장 왕과장(王科長)에게 남대관(南大觀), 백남준(白南俊) 등 10여 명의 한족총련 회원들이 가담하면서 공산주의와 충돌은 더욱 격화되었다. 공산주의자들도 이에 맞서 한족총련 간부차장인 이준근(李俊根)과 김야운(金野雲)을 석두하자 김좌진 장군의 동생 김동진(金東鎭)의 집에서 저격 사살했고, 1931년 7월 11일에는 김종진도 해림역전 조영원(趙永元)의 집에서 납치해 살해했다. 그러나 이때는 같은 식민지 백성들끼리 살상전을 벌일 때가 아니었다.

김종진 살해 두 달 후인 1931년 9월 18일 일제가 만주사변(일명 9·18 사변)을 일으켜 만주 전역을 장악하면서 아나키스트들은 만주에서 도주해야 했다. 민족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아나키즘 등장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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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