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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손가락으로 냉전시대 녹인 ‘전설’

클래식 최초로 100만 장 이상 팔린 밴 클라이번의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음반. 1958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 후 미국 카네기홀에서 라이브로 녹음했다. 재킷 사진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콩쿠르에서 연주하는 모습이다.
며칠 전 텍사스 포트워스에서 온 e-메일에는 깜짝 놀랄 소식이 하나 들어 있었다. 밴 클라이번이 말기 골암 진단을 받았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를 만난 것은 올해 1월 포트워스의 한 파티장. 언제나처럼 무시무시하게 긴 팔과 손가락을 활짝 펴고 “오, 달링~” 하며 다가와 무릎을 굽히며 얼굴을 비비던 모습에서 병색은 찾아볼 수 없었는데 말이다. 하긴 우리에게 남아 있는 훤칠한 청년의 이미지는 무려 반 세기 전의 것. 지금 그는 80을 바라보는 노인이다. 하지만 조금 슬픈 것은 우리에게뿐 아니라 그의 인생 역시 어쩌면 냉전의 한복판에서 양쪽 진영 모두를 단 열 개의 손가락으로 녹여버린 그때 그 순간에 멈춰 있다는 내 생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미국 클래식 음악의 아이콘 밴 클라이번은 1934년 7월 12일 루이지애나주의 슈레브포트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최초의 선생은 어머니 릴디아 비 오브라이언이었다. 그녀는 프란츠 리스트의 제자인 아더 프리드하임을 사사하고 줄리아드 음악원의 전신인 New York School of Musical Art를 졸업했다. 콘서트 피아니스트를 꿈꾸었으나 부모가 반대하자 고향 텍사스로 돌아가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런데 세 살 난 클라이번이 제자에게 방금 가르친 선율을 그대로 쳐내는 게 아닌가. 그녀는 즉시 아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클라이번이 17세의 나이로 줄리아드 음악원에 입학해 전설적인 피아노 교사인 로지나 레빈의 수하에 입문하기 전까지 그녀는 아들의 유일한 스승이었다. 클라이번은 다섯 살이 되자 “나는 꼭 콘서트 피아니스트가 될 것”이라며 어머니의 기대에 순순히 부응했다.

올해 5월 텍사스 포트워스에서 촬영한 것이다
미국과 소비에트연방의 냉전이 절정이던 1958년, 자국 문화의 위대성을 세계에 알리고자 소련이 창설한 제1회 차이콥스키 국제 콩쿠르에서 미국 출신의 밴 클라이번이 1위를 차지한 것은 세기적 센세이션이었다. 적국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던 청중은 만면에 미소를 띤 큰 키의 금발 텍사스 청년이 무대로 입장하자 단숨에 무장 해제됐다. 그의 연주는 순수하고 솔직하며 감정에 호소하면서도 유쾌했다. 무대 매너는 우아하고 부드러웠으며 마치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듯 친절했다. 힘겨운 삶에 찌든 옛 소련의 민중에게 그는 마치 현실에서는 손에 잡히지 않는 몽상과도 같은 것이었다. 콩쿠르가 끝난 이후로도 경연 장소였던 모스크바 국립음악원 대강당에 ‘밴 클라이번 귀하’라고 적힌 수백 통의 편지가 몇 달간 배달될 정도였으니 그 인기는 가히 상상을 초월하고도 남았다.

사상 초유의 인기 행진은 물론 고국에서도 계속됐다. 전 미국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한 밴 클라이번은 클래식 음악가로는 최초로 뉴욕 시가지에서 색종이 테이프 퍼레이드를 했고 그의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 음반은 클래식 음반 최초로 100만 장이 팔리며 빌보드 차트에 125주나 머물렀다. 유럽에 비해 턱없이 짧은 역사와 그에 따른 문화적 열등감을 단박에 해소시켜 준 이 청년이야말로 당시 미국 사회가 원하던 영웅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연주자로서 한창 전성기를 구가할 40대의 나이에 그의 경력은 이미 내리막을 내딛고 있었다. ‘전혀 발전하지 않는다’는 혹평에 시달리기 시작했고 연주 중 멈추는 경우도 이따금씩 발생했다. 무엇보다 감당해내기 어려운 많은 공연이 그를 점차 무대와 멀어지게 만들었다. 결국 1978년 9월부터 그는 장장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정식 공연장에서 연주하지 않았고 이후로도 국가를 대표하는 외교 사절로서 펼치는 연주 이외에는 극히 적은 수의 음악회에만 서는 등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은 사실상 접은 셈이 됐다.

그러나 화려한 경력 이후 내리막길을 걸은 여타 음악가들의 드라마틱한 말로와는 판이하게 그의 인생은 차분하게 진행됐다. 고향인 텍사스주 포트워스시에 자리 잡은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밴 클라이번 재단’과 ‘밴 클라이번 피아노 콩쿠르’의 정신적 지주로서 지역 음악계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물론 사람들의 뇌리에는 아직도 ‘모스크바의 텍사스 사람’으로 남은 채.

지금도 수많은 언론의 주목을 받는 그지만 그 누구도 1958년 이후 50 년간 그의 삶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그에게 원하는 건 그저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 있던 주인공의 감동적인 회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걸까. 미국과 러시아 두 나라, 그것도 두 나라의 지도층과 민중의 판타지를 골고루 충족시켜준 영웅의 삶은 정작 머나먼 지난날에 박제됐다. 하지만 지난 세월 동안 천 번도 넘게 받았을 질문에도 늘 난생처음 들은 것처럼 성심성의껏 답하는 그는 여전히 타고난 미국의 아이콘이다. 우리가 아는 그의 유일한 어두운 면이라곤 매우 늦은 시각에 잠자리에 들어 오후 늦게야 일어나 활동을 시작한다는 것 정도다. “모두가 잘 때 혼자 깨어 있는 기분은 참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고 말하는 그가 느낀 스스로의 인생 또한 혹시 그런 것이었을까. 아무쪼록 살아 있는 전설의 안녕을 빌어본다.



손열음씨는 2009년 밴 클라이번 피아노 콩쿠르와 2011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각각 2위에 입상했다.

도민이 행복한 더 큰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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