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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지지 않는 나라’ 이끈 영국 첫 유대인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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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말부터 유럽은 발전에 한계를 보였다. 인구 증가와 자원 고갈은 각국의 사회불안을 야기했다. 다양한 자원과 노동력을 확보하고 또 생산품을 판매할 시장이 필요했다. 유럽 제국은 세계 도처에서 금·은·상아·면화·노예를 집중적으로 찾아다니느라 혈안이 됐다. 월등한 군사력을 보유한 영국·프랑스·네덜란드·스페인·포르투갈 등 당대 열강은 해외 식민지를 개척해 이들을 정치·경제적으로 지배했다. 특히 막강한 해군력을 자랑하던 영국은 세계 각 대륙에 진출해 ‘해가 지지 않는 대영제국’을 건설했다. 이른바 제국주의다. ‘제국주의’의 어원은 로마시대부터 유래하지만 이 단어가 본격적으로 쓰인 시기는 1870년 영국신문 데일리뉴스가 프랑스 제2제정을 제국주의라고 규정한 이후부터다. 이 대영제국 제국주의를 선도한 인물은 벤저민 디즈레일리(사진)라는 유대인이었다.

로스차일드 유대금융인 가문과 각별
디즈레일리는 1804년 런던에서 태어났다. 오래전 포르투갈에서 영국으로 옮겨 온 세파라디 유대인 가계다. 유대인은 당시 유럽 사회의 하층 계급에 속했으므로 상류사회 진출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디즈레일리의 아버지는 아들이 13세가 되던 해 그를 성공회로 개종시켰다.젊은 시절 법률과 문학을 공부했지만 개종 유대인에 대한 당시 영국사회의 문은 두터웠다. 그래서 문인이 될까 하는 생각을 갖고 1826년 첫 소설인 '비비언 그레이'를 필명으로 발표했다. 이후 네덜란드·독일·이탈리아·그리스·터키·이집트 등 세계 각지를 여행하면서 국제사회에 대한 견문을 넓혔다.

1832년 하원의원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그러다 1837년 토리당(현 보수당)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1846년 토리당은 로버트 필의 곡물법 폐지 문제로 분열됐다. 디즈레일리는 ‘필법’에 반대하면서 보호무역주의를 대변하는 중견 보수정객으로 발돋움했다. 1846년을 시작으로 세 차례 재무장관직을 맡았다. 로스차일드 유대금융인 가문과 각별한 유대관계를 맺었다.디즈레일리는 1860년 드디어 대영제국 총리 자리에 올랐다. 당대 라이벌이며 자유무역주의자인 윌리엄 글래드스톤과는 재무장관과 총리 자리를 서로 주고받았다. 이 두 경쟁자가 빅토리아시대를 주도하면서 대영제국의 번성기를 이끌었다 .

디즈레일리는 1870년대 영국이 세계의 중심으로 부상하자 강력한 제국의 통합을 토리당의 제1정강으로 내세워 1874년 총선에서 압승을 거뒀다. 그는 총리 자리에 복귀해 6년을 재임했다. 적극적인 제국주의 외교정책을 폈다. 1875년 수에즈 운하의 주식을 사들였다. 수에즈 운하는 원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주재 프랑스 영사를 지낸 페르디낭 드 레셉스의 발상으로 프랑스가 주도적으로 건설에 참여했다. 이후 이집트와 프랑스가 지분을 반반씩 나눠 공동 관리했다. 디즈레일리는 대영제국의 확장을 위해선 운하 통제권 장악이 긴요하다고 봤다. 그는 유대 금융인 리오넬 로스차일드의 재력을 동원해 운하관리청의 이집트 지분을 사들이고 이집트를 대영제국 지배권 아래 예속시켰다.

1877년 러시아·터키전쟁 때는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영국 해군을 파견하는 무력시위로 영국 제국주의의 위용을 만방에 떨쳤다. 이 와중에 키프로스를 얻기도 했다.
당시 빅토리아 여왕은 지금의 영국 여왕같이 명목상의 군주가 아니고 정치 권력의 주요한 축이었다. 그런데 여왕의 충실한 평생 조언자였던 남편 앨버트공이 1870년대 초 세상을 떠나자 여왕은 한동안 우울증에 빠져 총리·각료들과 정사를 논의하는 것조차 기피했다. 노(老)재상 디즈레일리는 빅토리아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음을 알아챘다. 그래서 갖은 방법을 동원해 여왕에게 접근, 급기야 여왕의 신임을 얻는 데 성공한다. 1876년 디즈레일리는 빅토리아 여왕을 인도의 황제로 추대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흡족한 빅토리아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디즈레일리에게 비컨스필드 백작 작위를 수여했다.

디즈레일리는 남아프리카와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일어난 폭동과 국내 경제의 악화로 1880년 총선에서 패배하자 정계를 은퇴했다. 평생 천식에 시달렸던 그는 그 다음 해 기관지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천대받던 신분의 유대인 디즈레일리는 영국 역사상 유대인으론 최초로 두 차례나 총리 자리에 올랐고 아울러 폐쇄적인 영국 귀족사회의 일원이 됐다. 그리고 그 시대 세계 판도를 주도한 영국 제국주의를 선도해 국력의 최대 융성기를 이끌었다.

평등사상 영향 받아 노동자 선거권 부여
디즈레일리는 확고한 보수주의자였지만 사회문제에 대해선 색다른 입장을 보였다. 1867년 노동자에게 선거권을 부여한 것이나 산업자본가의 횡포로부터 노동자 계급을 보호하는 정책을 편 것 등이다. 어려서 가정에서 교육받은 유대인의 평등사상에 영향을 받은 듯하다. 유대인 대다수는 평등사상을 신봉한다. 이는 십 수세기에 걸친 유대인의 유랑기간 중 단 한 번도 위계질서에 의해 움직이는 국가나 무력체계를 가져 본 적이 없는 데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무력에 의해 타국을 강점하거나 또는 식민지화하는 제국주의는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일부 정치학자가 주장하는 ‘신제국주의론’에 의하면 제국주의는 아직도 지구상에 존재한다. 유엔 창설 이후 수많은 지역과 전문 국제기구들이 출현해 세계는 다자구도로 재편됐다. 여전히 막강한 군사력·경제력을 보유한 강대국들이 그들의 이해에 입각한 각종 국제규범을 만들어 약소국의 복종을 강요한다. 간접적 제국주의 영향력 행사다. 또한 이들은 세계화·개방자유무역 등을 국제사회의 새로운 보편가치로 확산시켜 강대국 주도의 국제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여전히 ‘주먹이 법’인 세계 구도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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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