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쑹자수 자녀 교육법 “뭐든 읽고 생각나는 건 무조건 써라”

쑹자수는 자녀 6명을 모두 미국의 명문대학에 유학시켰다. 1915년 하버드대 외국인 학생회 부회장 시절의 쑹즈원(둘째 줄 왼쪽에서 셋째).   [사진 김명호]
중국 혁명가나 대(大)정객들의 사생활은 엉망이었다. 쑨원(孫文·손문), 장쉐량(張學良·장학량),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고문을 역임한 도널드(William Henry Donald)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쑨원이 특히 심했다며 재미있는 구술을 남겼다. “임시대총통에 취임한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는 총통직에서 물러난 쑨원의 요구를 들어줬다. 전국의 철도를 총괄하는 철도독판(鐵道督辦)에 임명하고 매달 3만원을 봉급으로 책정했다. 엄청난 액수였다. 쑨원은 전에 서태후가 이용하던 전용열차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모두 열여섯 량의 열차 안에는 참모, 경호원을 비롯해 온갖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그중에는 야릇한 차림을 한, 정체불명의 미녀들이 많았다. 밤마다 복도 다니기가 민망했다.” 이동하는 동물원 같았다는 표현은 하지 않았다.

쑨원의 고굉(股肱)이나 다름없는 쑹자수(宋嘉樹·송가수)만은 예외였다. 기독교 목사, 매판상인, 혁명가가 합쳐진 복잡한 사람이었지만 사생활은 건전했다. 자녀 교육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다 보니 부인 니꾸이전(倪桂珍·예계진) 외에 여자 친구를 사귈 시간도 없었다.쑹자수는 자녀들에게 자신이 겪은 모험담을 들려주기를 즐겼다. 항상 “세상에는 어려운 일이 없다. 마음가짐이 문제다”로 끝을 맺었다. 셋째 딸 메이링(美齡·미령)이 아버지를 한마디로 평한 적이 있다. “대범한 사람이었다. 둘째 언니 칭링(慶齡·경령)과 쑨원의 결혼을 무산시키지 못한 것 외에는 무슨 일이건 해내고야 말았다. 아버지가 살아 있었더라면 나와 장제스의 결혼도 많은 얘깃거리를 남겼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1918년 쑹자수가 사망한 후부터 쑹즈원은 누나와 동생들을 돌봤다. 1920년대 모친 니꾸이전과 함께.
쑹자수 부부는 “가장 선진적이고, 과학적인 것이 위대한 교육방식이다. 천성이 곧 개성이다. 개성을 억압하는 것처럼 미련한 짓은 없다”며 암기 위주의 중국식 전통교육을 무시했다. 지식의 신봉자이기도 했다. “지식이 힘이다. 믿을 거라곤 머릿속에 든 지식밖에 없다. 지식을 갖춰야 경험을 활용할 줄 안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다. 뭐든지 읽고, 생각나는 건 무조건 쓰게 했다. 자녀들이 쓴 글을 모아 아동신문(上海兒童報)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돌릴 정도였다.

언론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남들이 모르면 한 게 아니다. 널리(廣) 알리지(告)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불필요한 일 한 것과 다를 게 없다. 안 하느니만 못하다.” 1927년 4월 4일, 둘째 사위 장제스를 시발로 아들, 딸, 사위들이 ‘TIME’의 표지를 수차례 장식할 줄 예견이라도 한 사람 같았다.쑹자수는 “미래의 지도자는 친구 쑨원처럼 동서를 관통해야 한다”는 확신이 있었다. 영어도 중요시했다. 미국에 사람을 보내 구입한 다량의 아동서적을 애들과 함께 읽고 썼다. 붓글씨 교육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목적을 분명히 설명했다. “세상 돌아가는 일을 알려면 영문 실력이 뛰어나야 한다. 중국 고전도 중요하다. 배울 게 많다.”

쑹자수는 뛰어난 얘기꾼이기도 했다. 아는 것도 많았지만 풀어내는 재주가 탁월했다. 장남 쑹즈원(宋子文·송자문)은 나이가 들어서도 어린 시절 들었던 얘기를 잊지 못했다. “아버지의 얘기는 모두 사람에 관한 것이었다. 인물 묘사는 당할 사람이 없었다. 등장인물마다 성격이 선명하고 코믹했다. 경험과 지식의 결정체였다.” 쑹자수는 자신이 쑹씨 왕조(宋家王朝)의 문을 연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을 줄은 꿈에도 모른 채 1918년 세상을 떠났다.

지금도 천안문광장에 가면 마오쩌둥의 대형 초상화 건너편에 쑨원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마오는 정권을 장악하고 신중국의 문을 열었지만 쑨원은 그러지 못했다. 1895년 29세 때부터 1911년 봄까지 12차례 무장 폭동을 일으켰지만 모두 실패했다. 제대로 된 정부의 수반 자리를 차지한 적도 없었다. “법치를 무시하고 폭동만 일삼는 투기꾼” 소리도 많이 들었다. 그래도 “국부” 혹은 “중국 혁명의 선구자” 소리를 듣는 이유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쑨원은 혁명관이 확실했다. “무력으로 뒤집어엎는 것이 혁명이다. 성공하면 몇 년간 강력한 군사독재를 실시해야 한다. 남들이 뭐라건 안정이 됐다고 느끼면 헌정에 충실하고 민주제를 정착시켜야 한다.” 중국인들은 쑨원이라면 이렇게 했으리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번번이 실패하다 보니 대포 소리를 들으며 조롱거리가 된 적도 있지만 구국이나 결단 따위의 말은 함부로 입에 담지 않았다.

1925년 베이징에서 사망했을 때 빈소에 걸린 유언도 왕징웨이(汪精衛·왕정위)가 쑹즈원이 보는 앞에서 작성한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동지들은 계속 분발해라”였다. 쑨원은 이런 유언을 한 적이 없다. 쑹칭링의 손을 붙잡고 “달링” 소리 몇 번 한 게 다였지만 이의를 제기하며 시시콜콜 따지는 중국인도 거의 없다.
쑹자수를 만나기 전까지 쑨원은 흔해 빠진 청년 개혁가에 불과했다. 중국을 대표하는 혁명가로 변신하는 과정에서 쑹자수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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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