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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이 세상에 태어났어라

곽효환 시인이 본 백석,이상향과 사랑 찾아 떠난 고독한 유랑자

이데올로기에 휘말리지 않고 문단과도 거리 둔 삶
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은 시인 백석[白石·본명 백기행(白夔行)·1912~95]은 시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꼽힌다. 백석에 관한 학위 논문만도 600편이 넘고 지금도 매년 수많은 연구논문들이 발표되고 있다. 또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흰 바람벽이 있어’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등의 작품은 많은 독자가 애송시로 꼽는다. 이렇게 작품성과 대중성을 두루 갖춘 경우는 100여 년 한국 근대문학사를 통틀어 흔치 않은 일이다. 특히 1935년부터 41년까지의 6년여 동안 집중되고 있는 그의 작품들이 발표된 지 70여 년이 지났음에도 시간의 풍상과 장벽을 뛰어넘어 여전히 현재성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사랑받는 일은 예외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백석은 1912년 7월 1일 평북 정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조선일보 사진반장을 지냈고, 집안이 정주에서 하숙집을 했던 것으로 미루어 일찍이 개화한 중류층 집안에서 성장한 것으로 보인다. 오산소학교, 오산학교,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는데 당시 교장은 민족운동가 고당 조만식이었다. 동향 선배 시인 김소월을 동경했고 뛰어난 어학적 재능을 보이며 영어와 러시아어를 잘했다.

30년 조선일보 신년현상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됐고, 35년 조선일보에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했다. 이듬해에는 시 33편을 수록한 첫 시집 『사슴』을 펴냈다. 이 시집은 겹으로 접은 한지에 인쇄해 고급스러우면서 두툼한 느낌을 준다. 문학적 출발점이 소설인데 별도의 절차 없이 곧바로 시를 발표하고 얼마 후 전격적으로 시집을 펴낸 일은 등단절차를 중시하고 장르 간 벽이 완강한 한국 문단 풍토에 비추어 볼 때 이례적이다.

39년 만주로 떠났다가 광복 후 고향 정주로 돌아왔다. 이때 조만식 선생을 도우며 솔로호프의 『고요한 돈강』등 러시아문학을 번역 출간했다. 분단 과정에서 그냥 북에 남았으며 러시아문학을 번역하면서 동화시집『집게네 네 형제』 발간을 비롯한 동화시 창작과 아동문학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에 입각한 문학의 도식화에 반대한 후유증으로 58년 당으로부터 이른바 ‘붉은 편지’를 받는다. 59년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기 힘들다는 최고의 오지인 ‘삼수갑산(三水甲山)’의 삼수(압록강 인근의 양강도 삼수군 관평리) 소재 국영협동조합으로 내려가 양치기 일을 했다. 이후 일부 체제에 순응하는 시를 발표하기도 했으나 눈에 띄는 문학활동은 하지 못했다. 95년 1월 84세를 일기로 타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당대의 다른 문학인들과는 사뭇 다른 길을 걸었다. 우선 그는 일제 식민통치가 가장 극심하게 진행되던 30년대 후반부터 40년대 초반까지 작품활동을 했음에도 친일시가 없다. 동시에 항일이나 식민치하의 참상을 고발한 작품 또한 없다. 그리고 분단 과정에서 이데올로기의 격동에 휘말림이 없었고, 납·월북과는 무관하게 만주에서 고향인 정주로 돌아갔다. 요절하거나 해외로 망명하지 않고서는 일제와 해방 그리고 분단에 이르는 격변기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시대상황과는 다르게 개인사적으로 흠결이 없는 셈이다.

둘째로 당대 문인들과 별다른 교류 없이 문단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홀로 문학의 길을 걸었다. 그 흔한 문학그룹이나 동인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상공간과 사랑을 찾는 고독한 여행과 유랑의 길을 택했다.

셋째로 모더니즘의 영향을 토속적 세계로 승화시켰다. 그는 일본 유학 시절 영문학을 전공했고 귀국해서는 러시아 비평가의 글들을 신문에 소개했다. 또 시집 『사슴』에서 유년의 화자를 통해 무수한 평북 방언을 쏟아내며 토속적인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여러 정황을 종합해 볼 때 모더니즘과 근대에 대한 상당한 수준의 인식을 토대로 의식적으로 평북 방언을 사용해 고향인 관서지방의 풍물과 풍속을 그렸다.

그의 시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음식이다. 음식이 시 제목으로 등장(‘국수’ ‘수박씨 호박씨’)하고, 음식을 친구로 삼는 동료의식(‘선우사’)이 나타나는가 하면 유년의 놀이에도 빠짐없이 먹는 것이 등장(‘하답’ ‘고야’ 등)한다. 또 여행지의 풍물과 특성을 음식(‘통영’ ‘북관’ ‘북신’ 등)으로 나타내고 조상이나 민간신앙에 입각한 제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종류의 음식(‘오금덩이라는 곳’ ‘목구’ 등)에 관심을 보인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어렸을 때 먹은 것이라고 한다. 백석은 떡, 나물, 국수 등 가장 기본적인 욕구 대상이자 유년의 기억이 담긴 소박한 음식들을 일상에 결합시켜 시적 의미를 형성하는 주요한 고리로 삼았다. 문학 외적으로 가장 큰 백석의 매력은 정주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부유하면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삶을 살았다는 데 있다. 백석의 시세계는 여러 요소가 하나로 어우러져 평화롭게 공존하는 이상적 공동체 세계와 사랑의 시원을 찾는 끝없는 유랑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요정 대원각을 길상사로 내놓은 기생 자야의 연인
시 잘 쓰고 잘생긴, 게다가 영어와 러시아어에 능하면서 말수가 적고 분위기 있는 모던보이인 백석은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로맨스 또한 많았다. 하지만 백석의 사랑은 대개 외롭고 쓸쓸한 결말을 맞는다. 그 가운데 백석이 ‘란(蘭)’이라 불렀던 통영의 여인 박경련, 그리고 요정 대원각을 길상사로 내어놓고 백석문학상을 출연한 기생 자야(김영한) 여사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다. 박경련과의 사랑은 열렬했으나 일방적이었고, 끝내 이뤄지지 못했으며 뜻밖의 반전까지 있다. 35년 가장 친한 친구 허준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백석은 통영 출신의 동료기자이자 친구인 신현중에 의해 이화고녀를 다니는 통영 출신의 18세 신여성 박경련을 보고 한눈에 반한다. 이후 백석은 신현중과 함께 세 번에 걸쳐 통영을 방문하지만 그녀를 만나지 못하고 마지막 방문에서는 박경련 집안의 완강한 반대에 부닥쳐 혼인을 승낙받지 못하고 돌아간다. 그리고 몇 달 후 그녀의 결혼 소식을 듣고 크게 낙담한다. 결혼 상대가 다름 아닌 통영에 동행했던 친구이고 당시 약혼자가 있었던 신현중이었기 때문이다.
이 여행의 산물로 백석은 ‘통영’이라는 제목의 시 3편과 ‘남행시초’ 연작 등을 남겼다. 이 사랑은 박경련의 의중과는 상관없는 백석의 일방적인 짝사랑이어서 더 가슴 절절하고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흰 바람벽이 있어’(1941)에도 흔적이 남아 있다.

“…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자야 여사는 자신이 쓴 『내 사랑 백석』에서 “백석이 사귄 다섯 여자 가운데 진정으로 사랑했던 여인은 자야였고 자신 또한 백석에 대한 사랑을 평생 올곧게 간직했다”고 말한다. 1936년 우연히 함흥 영생여고보 회식장소에 나갔다가 옆자리에 앉은 자야에게 반한 백석은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죽기 전에 우리 사이에 이별은 없어요”라고 말했고 이후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38년 백석이 만주에 같이 갈 것을 제의했으나 자야 여사는 혼자 서울로 오면서 헤어졌고, 이후 백석이 조선일보 기자로 복귀하며 재회해 잠시 청진동에서 동거했다. 하지만 39년 백석이 만주로 떠나며 영영 이별을 했다고 한다.

북에서 버림받고 남에서 잊혀졌다 재조명 ‘늦복’
해방 후 처음으로 2005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작가대회에 참석한 필자는 많은 북쪽 문인에게 백석을 물었다. 대부분 모른다고 했고 몇몇 원로 문인들로부터 간신히 “동시 쓰고 러시아문학 번역했던 백석을 묻느냐”는 답을 들었다. 고향인 북에 남았으나 시인으로 기억되지 않는 백석이 안타까웠다.
남쪽에서도 백석은 분단이라는 특수상황 때문에 오랫동안 조명받지 못하다가 88년 납·월북 문인 해금 이후에야 비로소 본격적인 논의의 대상이 됐다. 어느새 가장 사랑받는 시인이 되고 탄생 100주년을 맞아 이어지는 학술회의와 전집 발간, 그리고 내로라하는 화가들이 참여하는 시·그림전과 그의 시를 노래로 만든 콘서트 등의 벼락 같은 축복을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은 천상에서 어떻게 생각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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