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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세상을 바꾸는 ‘팬픽’

양성희
문화부 기자
1990년대 1세대 아이돌 팬덤에 대한 생생한 묘사로 인기를 끌고 있는 케이블 채널 tvN의 드라마 ‘응답하라 1997’. 일부 팬들 사이에서 ‘어둠의 팬문화’로 일컬어지는 팬픽을 거론해 화제가 됐다. H.O.T 팬인 여고생 은지가 PC통신 동호회에 팬픽을 쓰기 시작한 것. 소녀들이 팬픽을 돌려보는 장면, 수위 높은 성애 묘사 등이 리얼하게 보여졌다. 팬픽을 쓰면서 은지는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깨닫고 국문과에 가기로 한다. 그리고 30대가 된 은지는 방송작가가 돼 있다.

 팬픽은 말 그대로 팬들이 쓰는 작품들. 아이돌 팬들이 아이돌을 주인공으로 쓰는 로맨스·성애물, 드라마팬들이 원작을 기반으로 재창조한 ‘외전’들을 일컫는다. 아이돌 팬픽은 멤버들이 주로 남자이니 남자들끼리 사랑하는 ‘게이 로맨스물’로 진화했다. 드라마 ‘외전’ 팬픽은 2003년 ‘폐인’을 양산한 MBC ‘다모’가 기점이다.

 팬들이 쓰고 소비하는 팬픽은 특히 10대 소녀들의 억눌린 성적 욕망을 투사하는 10대들의 하위문화 형태로 나타난다(최근에는 아이돌 팬층이 넓어지며 팬픽 소비·생산층도 30, 40대로까지 넓어졌다). 여성들에게 청소년기부터 성적 욕망의 주체라는 자각을 일깨워주는 중요한 계기이기도 하다.

 인터넷이 결정적 변수였다. 90년대 초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PC통신에 젊은 여성들이 뛰어들게 된 계기도 서태지와 아이들, H.O.T 팬클럽 활동이었다. 당시 ‘천리안’의 최대 규모 동호회는 H.O.T 팬클럽 ‘리옷(LEOT)’. 팬픽도 그 안에서 시작됐다. 단순히 10대용 야한 소설이라고 치부하기엔 뛰어난 문학성과 극적 재미를 갖춘 작품도 많았다. 일부는 공식 출판되기도 했다.

 팬픽 시장은 곧 인터넷소설(인소)·로맨스소설 시장으로 이어졌다. 팬픽을 쓰다가 인소를 쓰거나 대중소설 작가로 변신한 경우도 적잖을 것으로 추정된다. 최근에는 인터넷 로맨스 시장이 확대되면서 팬픽 자체의 열기는 과거보다 많이 꺾였다.

 인터넷 소설들이 TV 드라마로 옮겨져 빅히트를 하자 팬픽·인소로 이어지는 방대한 로맨스물 시장이 대표 한류 상품으로 자리 잡은 TV로맨스물의 원천이 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 SBS 드라마 ‘49일’은 신화의 팬픽 ‘49일간의 유예’ 표절 시비에 휘말렸다. MBC ‘하이킥3’는 일부 에피소드가 동방신기 팬픽 ‘해피 투게더’와 유사하다는 지적을 받았다.

 최근 전 세계에서 3000만 권이 팔려 출판시장을 뒤흔든 ‘그레이’도 팬픽의 위력을 보여주는 사례다. 49세의 중년 여성 작가 E L 제임스는 ‘트와일라잇’의 팬픽을 쓰다가 역시 인터넷에서 쓴 성애소설 ‘그레이’로 초대박을 쳤다. 문학적 야심보다는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위해 팬픽을 쓰던 팬픽 작가 최초의 극적인 출세담이다. 팬과 인터넷이 참으로 많은 것을 바꾸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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