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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리 대첩의 영웅, 공산주의 총탄에 스러지다

김좌진 장군이 암살당한 북만주 산시역 부근의 정미소. 아나키스트와 연합했던 김좌진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소속 한인에게 암살당했다. [사진가 권태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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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파는 아나키즘을 공산주의의 사촌이라고 공격했지만 공산주의를 가장 먼저 비판한 것도 아나키스트들이었다. 특히 볼셰비키 러시아가 전체주의 사회로 변하면서 아나키스트들은 공산주의자들과 적대적 관계로 변했다. 김좌진 장군의 암살 사건도 이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1930년 벽두. 김좌진(金佐鎭) 장군은 오랜만에 활기에 차서 새해를 맞았다. 전년 7월 결성된 재만한족총연합회(在滿韓族總聯合會: 이하 한족총련)가 북만주지역 운동에 새 바람을 일으키고 있었다. 1월 20일 오후 김좌진은 중동선(中東線) 산시(山市)역 근처에 있던 한족총련 소속 도정(搗精)공장으로 나갔다. 중동선 일대의 한인들이 생산하는 수만 석의 미곡을 도정해 위탁판매 과정에서 중국 상인들에게 농단을 당하지 않게 설치한 정미소였다. 그날 오후 4시 김좌진은 이 정미소에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소속 한인(韓人)의 총에 사망하고 말았다. 공산주의 세력이 김좌진 제거라는 극단의 선택을 한 배경에 아나키스트들과의 갈등이 있었다. 김좌진 등이 주도하는 신민부 군정파는 ‘독립운동의 가면을 쓰고 자금을 징수한다’는 공산주의자들의 비난에 이론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신민부의 자금 징수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 신민부는 1925년 10월 총회에서 매호당 6원의 의무금 징수를 결의하고 가능한 지역부터 징수해 목릉현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에서 500여 명의 독립군 장교를 양성하는 비용 등에 충당했다. 그러나 신민부 군정파는 공산주의자들의 선전 공세에 대응책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 공산주의에 대한 반박 이론을 갖고 있었고 자신들의 이상을 펼칠 활동공간이 필요했던 아나키스트들과 결합해 한족총련을 결성했던 것이다.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6개 항의 당면 강령 중 1번이 “우리는 재만동포의 항일 반공사상의 계몽 및 생활개혁의 계몽에 헌신한다”는 것이었다. 항일과 반공을 같은 가치처럼 대했던 것은 볼셰비키 혁명 후의 러시아 상황 때문이었다. 아나키스트 바쿠닌은 1870년에 이미 “그에게 러시아 인민 전체에 군림할 왕좌를 주거나 독재권을 주어 보라……일 년도 못 가서 그는 차르(러시아 황제) 자신보다 더 악독한 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코로코트'지(誌), 제네바)”라고 공산주의의 전체주의화를 예견했다. 러시아 혁명에 참여했다가 서유럽으로 망명했던 볼린은 “비록 잠정적이고 과도기적인 형태라 할지라도 국가사회주의자들에게 그 운명이 맡겨진 혁명은 반드시 파산하고야 만다”고 주장했다.

충남 홍성의 김좌진 장군 사당. 김좌진은 독립운동에 나서기 전 집안 노비들을 모두 해방시켰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다니엘 게렝은 “사실상 사회주의 정부와 사회혁명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요소다. 양자를 화해시킬 수는 없다'아나키즘')”고 서술했던 것이다. 이회영도 1921년 5월 러시아에 갔던 조소앙(趙素昻)이 북경으로 돌아오자 그 상황을 물은 후 “그러한 독재권을 장악하고 인민을 지배하는 정치는 옛날의 절대 왕권 정치보다도 더 심한 폭력 정치이니 그러한 사회에 평등이 있을 수 없으며, 마치 새 왕조가 세워지면 전날의 천민이 귀족이 되듯이 신흥 지배계급이 나타나지 않겠는가?”라고 비판했다. 우익은 물론 좌익 전체주의에도 아나키스트들은 반발했다. 이을규가 “소위 좌익이란 자들이 그 지방에 끼어 있거나 넘나드는 곳에서는 반드시 운동자 상호간은 물론이요 주민들 사이에서도 불화와 알력이 일어나고 있었다('시야 김종진 선생전')”고 회고한 것처럼 정서적인 반감도 심했다. 김종진은 “공산주의는 본질적으로 인간의 존엄과 자유를 무시하고 유린하는 강권노예적인 사대주의적 독재사상이기에 민족자주독립과 국민의 자유인권을 위해 투쟁하는 우리로서는 배격해야 될 반동사상이라는 것을 적극 계몽 선전하자는 결론을 얻었다('시야 김종진 선생전')”고 말했다. 그런 김종진에게 공산주의자 김남천(金南天)이 찾아와 타협을 요청한 적이 있었다. 대화가 결렬되자 김남천은 토론회를 개최해 민중의 판단을 받자고 제안했고, 아나키스트 김종진·이을규와 김남천 외 2명의 공산주의자 사이에 토론회가 열렸다. 토론 당사자 이을규는 그 상황을 생생하게 전한다.

“만주에서 그들의 반민족적, 비인도적인 행동을 열거 성토하여 ‘민족의 죄인이요, 인류의 반역자’라고 단죄하고 ‘소련의 주구는 물러가라’고 호령을 하자 청중들이 만세를 부르며 일제히 호령하는 바람에 그 자들 10여 명 일당은 형세 불리함을 알고 도망했다.(시야 김종진 선생전)”
공산주의 세력을 항일(抗日) 공동전선의 우군(友軍)으로 바라보지 않고, ‘민족의 죄인’ ‘인류의 반역자’ ‘소련의 주구’로 공격했으니 타협이 불가능했다. 한족총련에서 활동했던 정화암은 “해림(海林)을 중심으로 한 한족총련 지역과 영안(寧安)현을 중심으로 한 공산지역은 항상 팽팽한 대결상태에 있었다. 어쩌다 잘못하여 상대방 지역으로 들어가게 되면 서로 죽고 죽이는 비극이 벌어지기도 했다(몸으로 쓴 근세사)”고 회고했을 정도였다.

김좌진 장군의 고향인 충남 홍성에 세워진 동상.


한족총련은 이처럼 일제와 공산주의 세력 모두를 적으로 돌린 채 조직 확장에 나섰다. 재만한인무정부주의자연맹의 강령 중에 “우리는 한 개의 농민으로서 농민대중과 같이 공동으로 노작(勞作)하여 자력으로 자기 생활을 영위”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한 명의 농민’을 자처하면서 생활비를 자체 해결하는 아나키스트들에게 농민들이 신뢰를 보낸 것은 당연했다. 한족총련 교육위원장 이을규는 당시 활동을 이렇게 회고했다.

“과거의 다른 단체와 같이 권력과 위세를 부리지도 않으며 공산당들과 같이 모략이나 또는 무조건 나를 따르라는 식의 궤휼이나 오만도 없이 자기네(농민)의 의견을 존중하면서 다같이 일하고……부락적으로 집결해 이웃끼리 서로 도우며 안전하게 살자고 하는데 누구 하나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또 중국 지주와 중국 관청과의 토지 매매, 임대 등의 교섭을 대행해 준다고 하니 이런 고맙고 편리한 일이 또 있겠는가. 이것이야말로 하늘에서 떨어진 복이요 캄캄한 밤중의 햇빛이었다.(이을규, 시야 김종진 선생전)”
그러나 러시아 국경과 접해 있었던 북만주 지역은 만주의 다른 지역보다 공산주의 세력이 강한 지역이었기에 그만큼 공산주의 세력의 반발도 거셌고, 그 결과가 극단적인 암살로 나타났던 것이다. 테러를 부정하면서 결정적 시기에 봉기할 것을 주장하는 공산주의 혁명 이론과도 다른 일탈이었다. 더구나 그 대상이 청산리 대첩의 영웅 김좌진 장군이었으니 만주는 물론 국내도 큰 충격이었다. 김좌진이 암살되자 한족총련에서는 즉각 범인색출에 나섰다.

“군사위원장 이붕해(李鵬海)씨의 지휘로 치안대의 일부는 그날 밤으로 해림역 부근에 있던 적마(赤魔)의 소굴(巢窟)을 급습해 김봉환(金奉煥: 일명 金一星) 외 1명을 잡는 동시에 놈들의 문서를 압수해서 이번 흉계가 김봉환의 지시라는 것과 직접 하수자가 박상실(朴尙實: 일명 朴尙範, 金信俊)이라는 것이 밝혀졌으나 하수자 박상실은 끝내 잡지 못했으므로 수일간 엄중한 조사를 마친 후 김봉환 외 1명을 처단했다.(시야 김종진 선생전)”
김봉환의 체포 장소에 대해 정화암은 ‘예배당에 숨어 있던 김봉환을 잡아 조사한 후 처형했다’고 조금 다르게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박상실도 무사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동아일보 1931년 9월 11일자는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모처에 도착한 정보에 따르면……전 신민부 수령 백야 김좌진씨를 총살한 박상실(최영석)이 이번에 아성현(阿城縣) 호로군(護路軍)총사령부의 손에 체포되어 그곳 영심처(令審處)에서 사형의 판결을 받고 수일 전에 형을 집행코자 봉천(奉天)으로 압송되었다 한다.”
동아일보는 만주 아성(阿城)현의 조선인 공산당 11명이 중국 관헌에게 체포될 때 박상실도 체포되었는데 때마침 민족주의 단체 행동대장 고강산(高岡山)도 체포되었다가 박상실을 알아보고 알려서 사형을 받게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 연변에서는 김좌진의 암살범이 박상실이 아니라 공도진(公道珍: 일명 李福林)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고려공청 만주총국 선전부장 양환준의 증언에 바탕을 둔 것이다. 양환준은 ‘조공 만주총국에서 김좌진을 제거하기로 결정하고 1929년 가을 공도진을 산시에 잠입시켜 이듬해 1월 제거한 것’이라면서 자신이 직접 만나서 들은 이야기라고 주장했다(연변문사자료, 제4집, 1985년 11월). 이복림으로도 불리는 공도진은 조공 만주총국의 지시로 김좌진을 살해한 후 반일유격대에 가담해 동북항일련군 제3군 제1사 정치부 주임, 중국공산당 북만임시성위(臨時省委) 조직부장을 역임했다가 1937년 전사했다는 인물이다.

한족총련은 엄동설한에 땅을 팔 수 없어 우선 초빈(初殯)했다가 4월에야 해림과 산시 사이의 석하역(石河驛) 동북방 산록에 안치했는데, 전 만주와 국내에서까지 수천 명의 조문객이 운집했다. 김좌진이 살해된 이후에도 한족총련은 조직을 정비하고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자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국내에 잠입했던 신현상이 거금을 구해 북경으로 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을규는 “이 소식은 선생(김종진)과 재만무정부주의자 연맹원들은 물론 한족총련 간부들에게도 참으로 기사회생의 기쁨이었다”라면서 김종진과 함께 희망에 차서 북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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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